00107 5. 세 가지 이야기 =========================
“어... 일반적인 상식에 비춰보자면...”
마차가 한참 구른 후 먼저 입을 연 것은 에빌로 누나였다. 아까 아저씨가 말한 이후 약 5분 정도 우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저씨의 얘기를 되짚어보기도 하고, 아저씨의 얘기를 듣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으음. 일단은 누나나 형의 얘기를 먼저 들어보자. 내 생각에는 비약이 좀 있을 수도 있으니까... 누나는 약간은 자신없는 투로 말했다.
“그 어... 크람 아저씨라고 했던가? 그 분도 아저씨 만큼 울퉁불퉁한 사람이잖아요. 아무리 나이들었어도 자기가 진다는 생각 자체를 안 했을 거고요. 그랬다가 아저씨한테 당하고 나서 처음으로 ‘늙었나’는 얘기를 했다면서요.”
톨라츠 아저씨는 마차가 가는 방향을 바라본 채, 그저 담담히 웃고만 있었다. 에빌로 누나는 아저씨의 반응을 잠시 살피다가, 여전히 자신없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다음 날부터 차가워졌다고 했잖아요? 아마 아저씨를 매일 마주칠 때마다, 자신의 늙음과 마주하는 기분이 들어서가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아저씨가 사제이니, 딸과 결혼시켜 가업을 물려줄 수도 없을 텐데 자꾸만 딸과 가까워지는 것도 보기 싫었을 거구요. 주임사제님이 별다른 혼을 내지 않았던 건 그런 사정을 크람 씨에게서 들었던 거 아닐까요?”
“아냐, 에빌로 양. 사제님은 크람 씨에게 톨라츠를 소개해 줬을 뿐, 톨라츠가 사제라고는 말하지 않았어. 그런 얘기를 하면 안 될 걸? 그렇지 톨라츠?”
“에빌로 양, 아쉽지만 에아임 씨의 말이 맞습니다. 수행중인 사제라는 걸 알면 그 분들이 대하는 게 아무래도 좀 달라지기 때문에 아주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면 말하지 않는 게 불문율입니다.”
칫, 하고 아쉽다는 듯 잇소리를 낸 에빌로 누나는, 약간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다시 원래의 자세로 돌아갔다. 나는 고개를 돌려 에아임 형을 보았고, 에아임 형은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내 생각은... 그 시치르라는 아가씨가 톨라츠에게 호감을 갖게 된 거 아닐까? 그 날, 그러니까 크람 아저씨라는 사람이 잔뜩 취해서 쓰러졌던 날 말이야. 그 날 밤에, 시치르가 팔을 만지고 친근하게 구는 모습을 크람 아저씨가 본 거지. 그 다음날 시치르가 좀 불편해 보인다고 했지? 그 날 밤에 아저씨가 엉덩이라도 때렸던 게 아닐까? 크람 아저씨는 ‘나를 이기려 드는 사위는 인정할 수 없다! 사위가 인성이 좋아야지!’ 이런 생각으로 톨라츠 당신을 쫓아낸 거고 말야.”
흐음... 아저씨는 별 말 없이 계속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저씨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와 아저씨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아저씨에게 물었다.
“말해도... 될까요?”
당연히 그러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아저씨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에아임 형도, 에빌로 누나도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는지, 아무 말 없이 우리 두 사람을 내다보았다. 아저씨는 한참 그렇게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알아챈... 건가요?”
나는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약간의 결례를 잠시 범하기로 했다.
“그 날, 레카 시에서 아저씨가 ‘사람의 어두운 면을 많이 보았다’고 했잖아요. 아마 그 얘기를 듣지 않았으면 이 생각을 하지 못했을 지도 몰라요. 혹시 이 얘기도 그런 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제 생각이 맞는 건가요?”
아저씨는 나를 좀 더 바라보다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알았나요?”
“어느 순간부터 시치르 양이 술을 안 마셨다는 이야기하고, 배를 가리는 듯 서 있었다는 거요.”
“아...”
뒤에서 형이 그제야 알았다, 는 투로 탄성을 냈다. 형이라면 눈치를 챌 수 있을 줄 알았다. 아저씨는 나에게 고갯짓을 해 보였다. 말해보라는 뜻이라고 생각한 나는 입을 열었다.
“크람 씨와 시치르 양은 근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크람 씨의 강압에 의한 것인지, 또는 둘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합의에 의해 이루어졌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저씨가 두 사람이 서로를 신경써주고 챙겨주었다는 표현을 하시지 않았겠죠. ‘서로 챙겨주었다’고 하셨으니까요.”
그제야 슬슬 에빌로 누나도 무슨 말인지 눈치채기 시작한 느낌이었다. 나는 괜히 침을 한 번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시치르 양이 크람 씨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 겁니다. 술을 마시지 않은 건 아이가 걱정되어서 그런 것일테고, 배를 가렸던 건 본능적으로 아이를 보호하려는 엄마의 마음...이라고 생각해 봤어요.”
“그럼, 시치르 양이 마치 아저씨에게 관심있었다는 것처럼 굴었던 건...?”
“시치르 양이 한 번 아저씨의 팔을 만졌다가, 곧바로 아저씨를 내보냈다고 했죠? 제 생각에는 그건 크람 아저씨가 사실은 깨어 있다는 걸 알아서였을 거에요. 좀 구역질나는 얘기지만, 아저씨는 아마 일부러 취한 척 해서 아마 톨라츠 아저씨를 돌려보내고 둘이 같이 자려는 생각이 아니었을까요? 업혀오는 동안, 아마 크람 아저씨와 시치르 양의 눈이 마주쳤다거나 한 게 아닐까요?”
“그런데?”
영 얘기할수록 입맛이 더럽다.
“여기서부터는 제 추측이에요. 어쨌든 크람 씨는 시치르 양의 아버지잖아요. 만약 시치르 양이 임신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딸을 사생아의 아버지로 만들었고, 그리고 그 사생아의 아버지가 자신인데 어디 가서 얘기도 못하는 거잖아요. 만약 시치르 씨가 임신했다는 이야기를 하면, 오히려 죄책감이 생겨서 그제라도 남편감을 찾아주려는 시도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건 시치르 양이 제일 원하지 않는 결과였던 거죠.”
형과 누나는 떫은 감을 씹은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치르 양은 그래서 먼저 선수를 친 거에요. 톨라츠 아저씨에게 관심이 생긴 척해서 크람 씨의 질투를 불러일으킨 거죠. 그 목적에 성공했다는 걸 알았기에 – 아마 방문 틈으로 크람 씨가 두 사람을 보고 있다는 걸 확인했겠죠 – 곧바로 태도를 바꾸어 아저씨를 내보낸 거구요. 진짜로 아저씨가 오해하는 사태가 벌어지면 곤란하니까.”
“그럼 그 다음날, 팔씨름을 하자고 했던 건...”
“시치르 양의 질투 유발 작전이 대성공을 거둔 거죠. 자신이 딸과 떨어지는 것을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된 거죠. 그래서 ‘너한테 뺏길 줄 알아?’ 하면서 대결을 신청한 거고요. 지고 나서 상심한 틈을 시치르 양이 잘 공략해서 더 자신에게서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 같은데요.”
“그래서 어떻게 됐을 것 같나요?”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았던 아저씨가 말을 꺼냈다. 나는 다시 아저씨의 눈을 바라보았다. ‘정말 말해도 괜찮겠냐’는 의미를 담아 아저씨를 바라보자, 아저씨는 괜찮다는 듯 약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입맛을 한 번 다신 후 말했다.
“아저씨가 떠난 이후 시치르 양의 배가 점점 불러왔겠죠.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두 사람은 아저씨에게 책임을 덮어씌우기로 했을 겁니다. 그게 가장 간단한 해결책이었을 테니까요. 이미 떠난 후이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은... 글쎄요. 예를 들어 너무 대놓고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히 관계를 이어오다가 들키면 마을에서 쫓겨나겠지만, 그런 것만 아니라면 완전히 납득하지 못해도 대충 넘어가 주지 않을까요. 어쨌든 ‘좁은 마을’이잖아요.”
아저씨는 여전히 덤덤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친 걸음이다 싶어서 나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톨라츠 아저씨가 사제라는 걸 알고 있는 주임사제님은... 아저씨가 신께 맹세한 바를 어기지 않았다는 걸 아실 테니, 별다른 질책이나 사후보고 같은 걸 하지 않고 눈감아주기로 하셨을 거구요. 어쨌든, 주임사제님도 그 마을의 일원일 테니까요.”
“떠나기로 한 날, 밤에... 크람 씨의 집에 찾아갔습니다.”
내 말을 받아 아저씨가 말했다. 형과 누나가 아저씨를 마차 안에서 내다보는 가운데, 아저씨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그래도 몇 달간 가르쳐 주고 먹여 주고 재워 준 사람들인데, 떠나기 전에 인사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현관에서 나를 맞이한 시치르 양이 헛구역질을 하더군요. 기리인 군이 내 말만 듣고 알아챈 것을 저는 그제야 알았습니다. 모든 것을요. 시치르 양의 안색이 확 변하더군요. 제가 알아챘다는 것을 안 것이죠.”
“그래서?”
“그 길로 주임사제님께 달려갔죠. 말했다시피, 그 때의 저는 아직 젊었으니까요. 막 잠자리에 들려던 주임사제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죠. 하지만 주임사제님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신의 천칭에 모든 것을 맡기자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하지만 그건 명백히 교리로서 금하고 있는 것이잖아.”
형의 지적에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임사제님도 그걸 모르셨을 리 없습니다. 그 말을 하는 것이 본인의 천칭 접시에 악업을 올려놓는 것이라는 걸 모르셨을 리 없지요. 기리인 군이 말했듯, ‘작은 사회’니까요. 주임사제님이 그 때 그 악업을 마을 전체에 밝히고 두 사람을 징치하려고 했다가는, 물론 두 사람을 마을로부터 쫓아낼 수는 있었겠지만, 이후 자신도 마을로부터 경원시당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
형과 누나는 저 이야기가 씁쓸하지만 사실이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경험이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까보다 더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별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 거겠지.
“나중에, 몇 년이 지난 후에, 주임사제님에게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기리인 군이 말한 대로 그 마을에서는 저를 크람 아저씨와 시치르 양의 아이의 아버지로 알고 있다고 하더군요. 주임사제님의 편지는 크람 아저씨의 임종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임종 자리를 지키는 사제님에게 크람 아저씨가 사제님이 이미 알고 계시던 것을 고백했다고 하더군요. 사제님은 저에게 용서를 구하시면서, 두 사람의 아이를 위해서는 마을 사람들이 공공연히 알게 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그러니 미안하지만 그 아이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은 마을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겠다고... 그렇게 쓰셨습니다. 그 마음을 이해했기에 저는 사제님께 그리 하시라고 답장을 보냈죠.”
우리 모두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덤덤한 듯 말했던 아저씨였지만, 이런 일을 말하면서 감정이 격해지지 않을 도리는 없겠지.
“어, 톨라츠, 미안. 내가 괜히 얘기를 꺼내서 아픈 얘기를...”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것도 한참 전의 일이니까요.”
한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쉰 아저씨는, 다시 그, 언제나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 표정으로 변했다. 하지만 뒤에서 보고 있는 누나와 형들과는 달리 나는 아저씨의 눈은 아직 슬픈 눈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신의 곁으로 가셔서 천칭을 재어 선행과 죄과에 맞는 대우를 받고 계시니 만나서 물어볼 수는 없겠지만, 꼭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딸과 서로 사랑하게 된 건지. 죄과라는 것을 알면서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인지 말이지요. 사제로서, 그리고 이단심문관이자 수사기사의 보조 사제로서 인간 세상의 어두운 면도 많이 보고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하지만, 가끔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건 정말 모를 때가 아직도 있네요. 사제라, 신에게 부름받는 날까지 모를 지도 모르겠군요...”
아저씨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긴 여운이 있는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저 멀리에 황도 여행객을 위해 황도수비대가 관리하는 여관 겸 역참이 아른아른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아까의 이야기를 생각했다. 형이,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던지, 장난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봐, 에빌로. 나 수사기사 때려칠까? 기리인이 훨씬 더 잘 맞추는 것 같은데?”
“그러게요. 분명 똑같이 얘기를 들었는데 왜 우리는 몰랐을까요? 부끄럽네요 정말.”
두 사람은 부끄러운 사람 치고는 얼굴에 웃음을 띠고 말하고 있었다. 무거워진 분위기를 어떻게든 밝게 해 보려는 이심전심이었겠지. 나는 그저 하하 웃으며 머리만 긁을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아까의 이야기에 대해, 딸과 서로 사랑하여 아이까지 낳은 아버지에 대해, 그리고 교리마저도 잠시 뒤로 미뤄두게 하는 좁은 사회에 대해 자꾸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 작품 후기 ============================
어우. 평소보다 많은데 해답편을 자를 수는 없으니 꽉꽉 눌러담습니다.
이 편의 추천수가 뚝 떨어진 걸 보니 이번 챕터의 구성에 대해 아주 후회하게 되네요 ㅠㅠ
급마무리가 답인가...
읽어주시고 선, 추, 코, 쿠 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조회수 1, 추천수 1, 코멘트 수 1이 올라갈 때마다 저는 글 쓰는 보람을 크게 느낍니다.
longway 님 // 암요. 홈즈는 사랑이죠. 개인적으로는 모리아티 교수랑 죽을 때까지만요. 되살아나서는 영 트릭 재탕 같아서...
화이트프레페 님 // 역시, 알기 쉬웠죠?
브륀하르트 님 // 감사합니다. 톨라츠 얘기하는데 2~3편 걸렸으니까, 에아임과 에빌로가 각각 하나씩 더 얘기하면 5~6편 안에서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더 타이트하게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