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8 5. 세 가지 이야기 =========================
그 뒤로 우리는 별 말 없이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마차는 계속 앞으로 달려나갔다. 지평선 끄트머리로 이제 보이기 시작하는 푸른 산맥 너머로 해가 질 때쯤, 우리는 역참에 마차를 세울 수 있었다.
역참은 넓은 1층짜리 건물이었다. 마차를 세울 수 있는 넓은 공간과, 말들이 편히 쉴 수 있는 마굿간이 딸려 있었다. 역참 옆에는 자그마한, 2~30명 정도가 쉴 수 있을 병영이 하나 딸려 있었다.
“병영도 있네요?”
내 말에 마차를 보관소 쪽으로 끌고 가 세운 형이 대답해 주었다.
“응. 황도는 황도수비대가 관리한다는 건 알고 있지? 마차가 하루 정도 이동할 수 있는 거리마다 역참이 있어. 그리고 그 역참은 황도수비대가 순찰과 경비를 맡아. 그 경비와, 혹시 모를 역참 주변의 순찰을 위해 반 개 소대가 항시 주둔하고 있어.”
“아...”
나는 형과 아저씨를 도와 마차를 보관소 자리에 세웠다. 그 동안 에빌로 누나가 보관소를 관리하는 병사에게 가서 얇은 가죽을 누비어 이어붙인 것을 받아왔다. 형이 말 두 마리를 마굿간으로 데려가는 동안, 아저씨와 내가 그 천을 마차 위에 씌우고 줄로 바닥에 설치된 말뚝에 잘 묶었고, 그러자 누나가 가볍게 마법을 걸었다. 자신 이외에는 풀 수 없게끔 하는 마법이었다.
“이러면 굳이 무겁게 짐 내리지 않아도 도난을 걱정할 필요가 없지.”
에빌로 누나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걸 뚫으려면 땅을 파고 들어가야 할 텐데, 그 정도의 소란을 피우면 감시하는 병사에게 들통이 날 것이다. 그 동안, 마굿간을 지키는 병사에게 말을 인계하고 온 형은 “자, 가자! 씻고, 저녁 먹으면서, 술 한잔 해야지! 그만큼 피로 풀기에 좋은 게 없지!”라고 외쳤다.
수속을 하는 병사들이 형을 알아보아 우리는 여타의 수속 없이 빠르게 안으로 들어가는 좋은 대우를 받았다. 우리는 방에 들어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마법으로 데워지는 뜨거운 물이 콸콸 나오는 – 역참은 거리도 고려하지만 물이 잘 나오는 곳도 고려했다고 한다. - 욕탕에서 몸에 묻은 먼지를 떨어내고 따뜻한 물로 몸을 푹 풀었다. 이어, 역참의 맨 오른쪽에 있는 식당에 모였다.
“누나는...”
“기리인, 너도 알텐데?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 씻는 시간이 한참 더 걸린다는 거.”
알죠, 알아요. 역참 식당은 군대가 운영하는 식당답게, 요리가 다양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몇 가지 요리와 술을 팔고 있었다.
“독주를 마시면 내일 길에 좀 지장이 있을 수 있으니, 맥주만 마시는 걸로 하지.”
우리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고, 에아임 형은 카운터를 보던 종업원에게 걸어가 이것저것 주문을 했다.
식당 안에는 우리 말고도 몇몇 일행들이 앉아서 식사를 하거나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술집인데도 떠들썩한 술자리보다는 그저 조용한 웃음과 담소가 오가는 그런 분위기였다. 여기가 군이 운영하는 시설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다들 하루종일 별 변화없는 길에 지쳐서일까? 모르겠다. 확실한 건, 아까 톨라츠 아저씨의 긴 이야기를 들은 우리는 몸이 아니라 마음이 좀 지쳐 있었다는 거다.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났다. 가끔 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와서는 저녁에 먹었던 반찬을 안주삼아 술을 한두 잔 마시고는 하셨었다. 어머니는 매우 싫어하셨지만, 아버지는 꿋꿋이 그렇게 술잔을 기울이시곤 하셨다. 나는 이제야 아버지가 왜 그러셨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렇게라도 그 날 있었던 일들을 털어버리고 싶으셨던 거였구나.
“무슨 생각 하니?”
씻고 와서인지 얼굴이 평소보다 약간 더 혈색이 도는 것 같은 에빌로 누나가 내 옆에 와서 앉으며 물었다. 그러더니, 자신의 머리가 잘 마르지 않은 것을 알아챘는지, 조용히 마법을 외워 자신의 머리 주변에 바람을 불게 해 머리카락에 묻은 물방울을 모두 날려버렸다. 오. 저런 이용법이 있구나. 부럽다.
“그냥, 배고프다는 생각?”
누나는 내 말에 자신도 가볍게 웃었다.
“그래, 배고프긴 하네. 주문은?”
“내가 하고 왔어.”
그때 테이블에 돌아온 에아임 형이 말했고,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종업원이 커다란 쇠 맥주잔 네 개를 들고 왔다. 하얀 과자 같은 것이 담긴 그릇을 함께 내려놓은 그는 고개를 숙인 후 물러갔다. 우리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잔을 들고 잔을 부딪힌 후, 맥주를 들이켰다. 크으! 시원하다!
“어떻게 이렇게 시원하죠?”
“저기 봐.”
에빌로 누나가 카운터 안쪽을 가리켰다. 커다란 금속 배럴이 몇 개 있었다. 그 배럴에는 미미한 파란 색 빛을 뿌리는 금속판이 달려 있었다. 아...
“마력석을 이용해서? 너무 호화스러운 것 아닌가요?”
“그만큼 제도에 가까워졌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톨라츠 아저씨는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시더니 말했다.
“기리인 군이 제도에서의 삶을 보게 되면 놀랄 때가 많을 겁니다. 제국의 부와 기술이 몰리는 곳이다보니 신기한 것이 많이 나오지요. 기리인 군의 활도 그 일례가 되겠군요.”
아. 그렇지. 내 활은 제도의 장인이 만든 것이었지. 무슨 말인지 납득했다. 누나는 한 모금 마시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기리인, 술을 잘 마시네?”
“아... 예전부터 약간씩 마시기는 했죠. 마법을 잃은 후 몸이 건강해진 후에는 술이 확 늘었고요.”
“기리인, 혹시 괜찮다면 마법을 어떻게 잃었는지 얘기해줄 수 있어?”
누나가 물었다. 음... 얘기해줘도 괜찮겠지. 형이나 누나, 아저씨하고 그런 얘기 못 할 사이도 아니고.
“졸업식 날이었어요. 그 때 뗏목들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북부에는 대수림이 있어서 목재가 풍부해요. 그래서 집들이 대부분 목조에요. 그리고 북부의 겨울은 눈이 많이 오지만 동시에 매우 건조하거든요. 그랬는데 마법 아카데미 졸업생하고 기사 아카데미 졸업생하고 일부가 싸우다가 불을 낸 거에요. 순식간에 바람을 타고 불은 거주구역의 반 이상을 태웠지요. 가만히 있었으면 거주구역 전체를 태울 수 있을 정도로 큰 화재였어요.”
다들 아무 말 없이 나를 보고 있다.
“저도 그 때 어느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불이 난 것을 보았어요. 마치 전설 속의 샐러맨더가 내려온 것 같은 큰 화재였어요. 갑자기 부모님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제 능력 이상의 마법을 써 버렸어요.”
“무슨 마법이었는데?”
“날씨 변화, 고급.”
누나는 입을 쩍 벌렸다.
“8서클?! 그럼 너 원래 6서클까지 사용이 가능했다는 거잖아?”
마법 이름만 듣고는 그게 뭔지 몰랐던 형과 아저씨는 ‘8서클’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형과 아저씨의 경악을 합쳐도 누나의 경악의 반도 안 될 것 같다. 평소에 늘 조용조용한 누나가 놀라니까 훨씬 크게 놀라는 것 같다.
“세상에...”
“에빌로 당신이 이렇게 놀라는 건 몇 년만에 처음인 것 같네.”
“두분이 잘 몰라서 저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모르시는 거에요. 기리인이 마법을 잃지 않고 계속 정진했다면, 역사상 최초로 서른 이전에 대마법사가 탄생했을 수도 있다고요.”
아저씨와 형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약간은 씁쓸하게 웃으며 술잔을 기울인 후 말했다.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인데요 뭐.”
그러자 세 사람의 얼굴이 갑자기 너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그런 걸 원한 건 아닌데.
“그렇게 안 보셔도 돼요. 지금 제도에 가는 게 해결책을 찾아보러 가는 거니까요.”
“아...”
형은 한참 ‘안 됐다’는 표정을 짓더니, 손을 뻗어 내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말했다.
“잘 됐으면 좋겠다, 기리인. 너의 활도 대단한 재능이지만 서른 이전에 대마법사라는 역사에 없던 재능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 우리 집에 얼마든지 있어도 되니까, 다닐 데 다 다녀보면서 해결책을 찾아봐라.”
“고마워요 형.”
형은 다시 한 번 내 머리를 쓰다듬은 후 술잔을 기울였다. 나도 한 모금. 크으. 시원하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차피 1년 안에 승부를 봐야 해요.”
“응? 1년? 왜?”
“마법 아카데미 다닐 때 선생님이 안식년으로 제도의 그랜드 아카데미에 와서 연구하고 계세요. 그 분과 함께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던 거거든요. 안식년이 끝나면 그 분은 돌아가셔야 하니까...”
“흐음...”
그런데 에빌로 누나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뭐지? 내가 뭐 말 실수를 한 건가?
“누나, 왜요? 뭐 기분 나쁜 일이 있어요?”
“응? 아, 아니...”
우리 셋이 누나를 바라보자, 누나는 짧게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머리를 가볍게 흔들고는 말했다.
“안식년 하면... 안식년에 들어간다고 좋아하던 친구가 생각나서...”
“친구요?”
“응, 친구. 나 제도 아카데미에서 공부했었거든.”
누나가 말하는 제도 아카데미는 제국 각지의 아카데미를 졸업한 사람들이 오는 그랜드 아카데미가 아니라, 제도에서 태어난 아이들 중 마법사의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가는 중등 교육기관인 아카데미를 말하는 거다. 누나는 제도에서 태어났었구나.
---
나 아카데미 다닐 때, 세 명의 친구가 있었어요. 아카데미 첫 날에 만났는데, 우연히 근처 자리에 앉게 되어서 친해지게 됐어요. 운이 좋아서인지 졸업할 때까지 계속 같은 반에 있었지요. 응? 아, 기리인 너는 한 반 밖에 없었어? 하긴 그렇겠다. 사람 수가 많지 않으니까. 우리는 반이 여덟 개 있었어. 아무래도 제도에는 사람이 많잖니.
어쨌든, 나중에 생각하면 우리 셋이 그렇게 다른 데 친구가 되었다는 게 참 신기해요. 기리인은 아직 나를 잘 모르겠지만, 에아임 씨와 톨라츠 씨는 내가 무슨 말 하는 지 알겠죠? 나는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고, 별다른 취미생활을 하지도 않잖아요. 하지만 나머지 두 친구는 나와 달라도 너무나 달랐거든요.
============================ 작품 후기 ============================
에빌로 편(?), 시작합니다.
읽어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숫자가 하나 하나 올라갈 때마다 보며 글쓰는 보람을 느끼며 흐뭇하게 생각합니다.
『용천검』™님 후원쿠폰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조금 더 직접적인 묘사를 하려다가 일부러 톤을 다운시켰는데도 역시 티가 나는군요 ㅎㅎ; 리플 감사합니다.
melontea 님 // 네, 후기에 적은 대로 에빌로 편과 에아임 편은 꼭 쓰고 넘어갈 겁니다. 감사합니다.
|라랄라랄라| 님(47편) // 비소(As)를 생각하고 썼습니다. 황화비소가 함유된 석웅황이란 광물은 불그죽죽한 색깔을 띠고 있거든요. 물론 쓸 때는 이걸 불에 태워서 하얀 가루를 얻어서 쓰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