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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111화 (111/309)

00111 5. 세 가지 이야기 =========================

“으아... 죽겠다...”

다음 날. 우리는 전날 밤의 폭음 때문에 영 컨디션이 좋지 않은 채로 마차를 출발시킬 준비를 했다. 눈이 좀 부어 있고, 잠을 설친 듯 세수를 했음에도 얼굴이 푸석해 보이는 에빌로 누나가 마법을 외워 줄을 풀어내었고, 독주를 늦게까지 취하도록 마셔서 눈이 퀭한 나와 아저씨가 줄과 천을 정리하고 마차를 정비하는 동안, 역시 눈이 퀭한 형이 우리와는 달리 밤새 잘 쉰 것 같은 말 두 마리를 끌고 왔다. 아무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말에게 마구를 씌우고, 마차를 매고, 말을 몰아 길을 나섰다.

마차인데다가 길이 흔들리지 않아, 속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멀미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우리 남자 셋은 숙취 때문에 괴로워서 가만히 앉거나 누워 있었다. 아저씨가 마부석에 앉아 고삐를 잡았고, 형은 아예 마차 지붕에 올라가 “죽겠다!”고 외치며 등을 대고 드러누웠다. 나는 마차 입구 근처에 앉았다.

누나는 마차 안쪽 자리에 다리를 뻗고 앉았다. 누나의 표정은 알아볼 수 없었다.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말을 붙이기 약간 꺼려졌고, 누나도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얼마쯤, 아무도 아무 말 없이 한참 앞으로 갔을까. 이미 뒤쪽 창으로 역참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고, 저 멀리 보이는 푸른 산맥이 이제 조금씩 알아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한참동안 들끓는 속을 진정시키느라 애쓰고 있는데, 누나가 불쑥 말했다.

“기리인.”

“네, 누나.”

“미안해.”

“미안해하지 마세요.”

나는 누나를 보며 말했다. 누나는 멍하니, 내 쪽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오히려 제가 미안해야죠. 누나의 친구들 일이라고 들었는데도 그냥 거리낌없이 무신경하게 말해버린 제 잘못이에요.”

“아냐, 너는 그냥 할 말 한 건데 뭐. 내가 미안해.”

“아뇨, 제가...”

그러다가, 누나와 나는 서로를 보며 픽 하고 웃었다.

“그냥 서로 미안한 걸로 하고 잊을까요?”

“그럴까?”

우리는 후후후, 하고 웃었다. 누나의 얼굴에 있었던 우울한 표정이 약간은 사라진 것 같아서 나는 만족했다.

누나가 그 일을 완전히 잊었을 리 없다는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누나는 내가 그 사실을 안다는 걸 아는 것 같았다. 뭐랄까... 서로, 그 일이 우리 사이에 자꾸 우울하게 자리잡는 걸 막자, 웃으면서 잊어버리자, 하고 협정을 맺은 느낌. 누나는 짐짓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나저나, 어제는 일찍 들어가 버려서 못 물어봤는데, 어떻게 알았어? 너 보면 좀 신기해. 어떻게 그런 걸 바로바로 알아챌 수 있는 거야?”

뭐라고 대답할까. 나는, 어제 형이나 아저씨에게 말했던 대로,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그냥, 운이 좋은 거죠 뭐.”

“그런 말 하지 마라! 그게 운이면 우리 수사기사들은 다 죽어야 된다!”

천장에 누워있던 형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 말투가 마치 엄마한테 투정부리는 아이 같아서 우리 네 사람은 풉, 하고 웃었다. 웃음은 전염성이 있다. 별로 웃긴 말도 아닌데 후, 후훗, 하다가, 다들 하하하 호호호 하고 크게 웃어버렸다. 누나와 내 마음처럼, 형과 아저씨의 마음도 그런 거였을 거다. 어제 있었던 이야기들은 털어버리자는. 웃어버리고, 다시 즐겁게 여행하자는.

“야! 기리인! 너 어제 내가 한 얘기 안 잊었지?”

형이 갑자기 마차 위에서 부스럭거리며 움직이더니, 마차 지붕에 엎드려 머리만 마차 안으로 들이밀며 말했다. 저 10대 소년같은 행동이라니. 저 행동을 보고 누가 저 사람을 애 아빠, ‘수사 기사단의 제일 올곧은 검’, 로그푸스 변경백가의 넷째 도련님이라고 생각할까.

“어떤 얘기요?”

“마법 회복 안 되면 수사 기사단에 들어오라는 이야기.”

아 저 분이 또 저러시네. 술이 덜 깨셨나.

“형... 그건 술자리의 농담이었잖아요.”

“아닌데? 농담 아냐, 임마. 농담이었으면 지금 얘기 안하지.”

아무 말 없이 마부석에 앉아있던 톨라츠 아저씨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기리인 군, 에아임 씨의 말은 농담이 아닙니다. 저도 에아임 씨와 같이 생각합니다.”

“네에?”

이제 나는 드디어 본격적으로 놀라버렸다. 제국 수사기사라니. 제국 수사기사라니!

제국에서 무예를 닦아서 출세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진로는 여러 길이 있지만, 만약 기사를 노릴 정도로 전투력이 좋은 사람들이라면 기사단에 입단하는 것이 제 1의 선택지이다. 오직 무를 숭상하는 사람들에게야, 제국 2대 기사단인 제도의 황실 기사단과 북부군의 핵심인 르플레스탁 기사단, 그리고 앞의 두 개보다는 약간 떨어지지만 그래도 유명한 융파트의 님크 기사단과 나스프 공작령의 에아뉘 기사단이 있다.

하지만 만약, 전투를 위한 기사단에서 군대와 관련된 길로만 가서 장군으로 끝마치고 싶지 않고, 제국에서 행정적인 일을 맡아보거나, 관리로 출세하는 길을 함께 노려보고 싶다면, 그리고 자신에게 무력 뿐만 아니라 머리도 있다면 – 그때는 제국 수사기사단을 노려볼 만하다.

제국 수사기사단. 지와 용, 문과 무를 겸비한, 제국 내에서 거르고 걸러진 진짜 인재들만이 간다는 곳. 전체 규모도 천 명 정도밖에 안 되고, 전투력은 더더욱 별 것 없는, 기사들보다 사제나 마법사, 행정요원 같은 사람들이 더 많은, 그래서 ‘기사단이라고 불리면 안 되는 것 아니냐’는 말이 가끔씩 나오는, 희한한 조직. 하지만 그 전력으로도 이들은 온갖 모험담과 전설을 만들어낸 바 있다. 온갖 사건을 해결하고, 불의에 맞서며, 곤경에 처한 이들을 구하고, 악당들을 때려잡는 제국 수사기사. 모든 제국 소년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동경의 대상. 그런 조직에 내가 들어가라고?

“제발 농담이라고 말해주세요.”

나는 웃으며 넘기려고 했지만, 에빌로 누나마저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기리인, 나도 두 분의 말씀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누나까지 왜들 이러세요. 저는 싸움도 잘 못하고...”

“배우면 돼.”

어느새 훌쩍 뛰어내려 아저씨 옆에 앉은 형이, 아예 마부석의 등받이를 안은 채 뒤로 앉아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칼 쓰는 법 가르쳐 주기로 했었지. 오늘 저녁에 역참에서 보자. 어제 그렇게 마셨으니 오늘은 술 못 마실 테니까. 오늘부터 배우고, 제도에 가서도 계속 배우면 돼.”

형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하나도 없이 ‘나 진지하다’라고 써붙인 것만 같았다.

“아니... 아직 나이도 어리고...”

“일 배우는 동안 자연스럽게 적절한 나이가 될 거다.”

“형 저번에 제 얼굴이 너무 눈에 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거야 웃자고 하는 소리지. 얼굴은 변장하거나 가리면 된다.”

나는 입을 헤 벌린 것도 모른 채 형과 아저씨와 누나를 번갈아 보았다. ‘농담이 아니’라는 말이 거짓말이 아닌 듯, 아저씨와 누나의 표정 역시도 아주 진지해 보였다. 사람을 잘 봐주는 건 고맙지만 너무 높게 봐주면 오히려 당황하게 만든다. 내가? 수사기사단에?

“좀 진지하게 물어볼게요. 대체 저한테서 뭘 보고요? 아저씨나 누나 얘기 듣고 답 잘 맞춰서요?”

형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리인. 수사기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 것 같니?”

나는 ‘모르겠다’는 뜻을 담아 고개를 저었다. 형은 손을 휘저으며 적극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무력? 아냐. 물론 수사기사단에 강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 건 사실이다. 범죄자들과 싸우다보면 때로는 위기상황이 찾아올 때도 많고, 범죄자를 쫓아서 두들겨 잡아야 할 때도 많이 있어. 하지만 무력이 특출나지 못한, 그냥 보통 사람보다 약간 나은 정도인 선배 기사님들도 많이 계셨다. 그 분들도 성공적인 수사 기사로서의 경력을 보내셨다.”

“그럼 친화력일까? 어느 사람에게나 말을 붙일 수 있고, 어느 사람에게서나 정보를 잘 끌어낼 수 있는? 있으면 좋겠지. 하지만 그것도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야. 그것이 없어도 수사는 가능할 때가 많다.”

“그럼 상식과 경험일까? 물론 그것도 중요한 요소지. 사회에 대해서 알아야지만 그 어두운 면이 어떻게 생기고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 알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중요한 것은 아냐. 그건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쌓을 수 있다. 그러면서 나이도 먹을 테고 말야.”

하나하나 말할 때마다 아저씨와 누나의 고개가 끄덕끄덕했다. 아 이 분들이 부담스럽게 왜 이래.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통찰력(洞察力, insight)이다.”

“통찰력이요?”

“통찰력이 뭐인 것 같니? 숨겨진 사실을 바로 알아채는 것? 그런 것이 아냐.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통찰력이라는 건 큰 일과 사소한 일, 숨겨진 것들을 모두 아울러 생각해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연결고리를 생각하는 거다. 그런 넓은 시야와 깊이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집중력, 그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한 것이 통찰력이야. 그리고 너를 만난 이후, 너는 그 통찰력을 충분히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내가 감탄할 정도로. 나만이 아니야. 톨라츠, 에빌로. 동감하지?”

두 사람이 마치 실에 같이 묶인 것처럼 같은 박자로 머리를 끄덕였다. 아, 진짜! 나는 여기서 더 나갔다가는 코가 꿰인 채 빠져나가지 못할 거 같은 생각이 들어서 항변에 나섰다.

“제가 아저씨나 누나의 이야기를 듣고 맞춘 건 우연이에요. 그냥 운 좋게 맞췄을 뿐이라고요. 제가 운이 좋아서 형이나 아저씨, 누나를 만나서 같이 내려가는 것도 있고, 한두 가지 사건에서 중요한 일을 한 것도 맞아요. 하지만 그건 어쩌다 운좋게 맞은 것에 불과하다고요. 순수한 제 능력이 아니고요. 어쩌다 갖다붙여서 된 거라니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너를 이제 한 달 정도 봤는데, 너 정도 되는 통찰력이 ‘갖다 붙여서’라는 말로 퉁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하냐.”

아, 진짜 미치겠네. 나는 앞으로 갈 수도 뒤로 빠질 수도 없는 상황에 빠진 것을 깨달았다. 여기서 내가, 저 분들의 신뢰를 깎기 위해 일부러 바보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저 분들은 분명 내가 부담스러운 제의를 거절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다는 걸 알아챌 분들이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계속 다른 사람에 앞서 알아채면, ‘마법을 회복하지 못하면’이라는 전제 자체를 무시해 버리고 바로 제국 수사기사단으로 낚아채 버릴지도 모른다. 아아. 어쩌나.

‘띠링!’

<제국 수사기사로 전직하시겠습니까?>

<현재의 당신의 스킬이나 스탯이라면 상당히 높은 확률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사기사가 되어, 이후 제국 관료사회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을 겁니다.>

<또한 전투 등을 훈련하면 스탯의 추가상승도 노려볼 수 있습니다.>

시스템. 잠시 처음 얘기로 돌아가볼게. 그 ‘퀘스트’ 말야. 메인 퀘스트를 깨려면 나는 요안나 선생님을 만나야 하는 거잖아.

<잊지 않았군요. 고맙습니다.>

고맙긴. 그럼 저 제의를 아직 받아들이면 안 되는 거잖아. 하지만 바로 거절할 수도 없고.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유도를 활성화할까요?>

그래, 부탁해.

============================ 작품 후기 ============================

기리인, 코 꿰일 위기를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

읽어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숫자가 하나 하나 올라갈 때마다 보며 글쓰는 보람을 느끼며 흐뭇하게 생각합니다.

그러고보니 조만간 조회수 5만과 선작 1천이 되겠네요... 처음에 500 10 이럴때 그만둘까 말까 했을때가 엊그제같은데. 모두 여러분 덕입니다.

내일 점심 연재는 좀 어렵거나 늦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eastarea 님 // 저런 방법을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이 정상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살인사건 자료를 찾아볼 때마다 막 토나올 거 같...

화이트프레페 님 // 오류 지적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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