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112화 (112/309)

00112 5. 세 가지 이야기 =========================

‘띠링!’

<고급 언변의 하부 기능인 ‘유도’가 발동합니다. 당신은 대화 상대에게서 이야기를 끌어내거나, 그 이야기를 토대로 당신이 원하는 쪽으로 협상을 전개하거나 할 수 있습니다. 유도의 스킬레벨은 현재 Lv. 1이며, 고급 언변 스탯 92의 보정을 받습니다.>

“형. 말씀은 정말 감사해요.”

“말씀은... 이라.”

“저를 높게 봐 주신 것도 대단히 감사하고요.”

“어째 지금 와이프한테 차일 때 분위기가 나는데.”

형은 하하 웃었다. 형이 부담스럽지 않게 분위기를 만들어준 덕에 말하기 한결 수월해졌다.

“만약에 형이, 그리고 아저씨가, 누나가 저를 그 정도로 믿어주신다면 저도 거기에 부합하게끔 살아보고 싶어요. 하지만 저는 약속이 있어요. 그 약속을 먼저 지키고, 1년만 노력해 볼게요. 만약 그 후에 일이 잘 되지 않으면 그 때 부탁드려도 될까요?”

형은 피식 웃었다.

“이 놈 보게. 제국 수사기사단을 기댈 언덕 정도로 만들어 버렸네?”

“죄송해요, 형.”

형은 웃으며 농담이라고 말한 후,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꼭 네가 마법사로서의 자신을 회복한다 아니다를 떠나서, 기리인 너에게 있어서 그 노력을 해 보는 것 자체가 너에게 필요한 일인 거 같다. 나에게 그 권유를 해 주셨던 스승님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었지.”

음. 형이 처음부터 수사기사가 되려고 하던 건 아니었나보네?

“형, 형이 수사기사가 되기 전에는 뭐 하셨어요?”

“나? 날라리였지.”

“네에?”

나 뿐만 아니라, 아저씨와 누나도 처음 듣는 얘기인 듯, 흥미있다는 얼굴로 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차. <유도>가 아직 활성화 중이었구나... 에, 뭐 어때. 켜 놓는게 재미있을 거 같으니 일단 시작된 건 더 두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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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문에 대해서는 알지? 황제를 지키는 첫 번째이자 마지막 방패, 로그푸스 변경백가. 평상시에는, 르플레스탁의 동면으로 인해 넘어오는 백색 산맥의 몬스터로부터 푸른 산맥 너머의 제국과 제도를 지키고, 유사시에 제도에 칼을 들이대는 적에게 방패가 되어 막아서는 가문이지.

솔직히 내가 황제면 되게 불안할 거 같아. 안 그래? 로그푸스 가문이 아무리 대대로 제국에 충성을 다해 왔다지만, 제도에는 경비대와 치안대, 그리고 실질적 무력은 별 볼일 없는 수사기사단 말고는 없잖아. 실제 병력은 바깥에 있고, 로그푸스 가에서 관리하잖아. 혹시 로그푸스 가문이 역심을 품으면, 한 방에 털리는 거잖아? 물론 제국 400년 역사동안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지만, 가능성이 있다ᅟᅳᆫ 게 더 중요한 거잖아. 그렇지?

그래서 역대 황제 폐하들은 몇 가지의 안전장치를 두었어. 뭐... 아이들은 제도에 와 있어야 한다거나, 황제 폐하와 로그푸스 가문의 수장이 함께 자라는 경우가 많아서 친구처럼 지낸다거나... 나 같으면, 황실 기사단을 지휘하게 될 로그푸스 가문으로부터 지휘권을 뺏는 노력도 할 거 같은데, 알지? 머리가 둘이면 절대로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거. 그걸 참아오신 역대 황제 폐하들은 정말 대단하신거야. 괜히 치르낙 대왕의 후손이 아니라니까.

그리고, 유독 우리 가문이 정의와 충성을 강조하는 가풍이 된 것도 그 안전장치 중 하나일 거야.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그러다보니, 우리 가문은 좀, 사람들이 그래. 꽉 막히거나 한 건 아닌데, 불의를 참지 못하지. 황제 폐하께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충성하고.

그리고 나는 어릴 적부터 왠지는 몰라도 그러고 싶지 않더라고. 아니, 사람이, 욕구가 있는 게 정상이잖아. 맛있는 걸 보면 먹고 싶고, 예쁜 여자를 보면 말 걸고 싶고, 자고 싶은 게 정상 아냐? 귀족가의 명예와 체면이라는 건 당연히 지키지. 하지만 나는 첫째도 아니고, 넷째 아들이잖아. 어차피 유산도 못 물려받는다고. 그럼 좀 자유스럽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게 내버려둬도 되는 거 아냐? 그치?

...어흠. 어흠. 너무 흥분했군. 어쨌든 어릴 적부터 나는 형들보다는 좀 날라리였어. 무술연습을 하거나 대련을 하는 것은 빼먹지 않았고, 기초 학교의 수업도 다 성실히 들었어. 혼나는게 무섭기도 했지만, 우리 가문 사람들은 일단 시킨 일은 잘 하거든. 천성인가봐.

하지만 숙제 같은 건 맨날 안해가서 혼 많이 났지. 집에서까지 공부하긴 싫었거든. 놀기도 많이 놀았는데, 책도 많이 봤어. 우리 아버지, 어, 그래. 변경백님 말이야. 울 아버지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을 많이 가지고 계셨거든. 그 소설 읽으며 밤늦게까지 안 자고 있다가 유모한테 걸려서 혼나기도 하고 그랬어. ...어? 야한 책이었냐고? 으흠, 으흠.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음. 음.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지? 불량하지는 않았어. 아마 내가 불량한 친구들 만나면서 삐딱하게 굴었으면 아마 우리 아버지한테 내쫓김 당했을 거야.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붕 떠있었지. 어... 아버지나 형들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어. 하지만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뭘 해야 할지는 몰랐지.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잖아? 그런데 나한테는 당장 현실적인 문제였던 거야. 가문이라는 배경이 곧 의미 없어질 때가 오니까. 기리인, 이상한 표정으로 보지 마라. 귀족가의 상속 안 되는 아들들 신세가 다들 그래.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나 형들하고 나이 차이가 좀 있는 편이거든. 우리 아버지가 워낙 결혼을 빨리 하셔서, 셋째 형하고 나하고는 여섯 살 차이가 나. 그 사이에 누나 한 명이 있고. 다들 뭐하시냐고? 첫째 형님은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기 위한 준비를 하고 계시고, 둘째 형님은 황실 기사단에 들어가셨지. 셋째 형님은 제도에 있는 어느 상단에 들어가셔서 일 배우시다가 독립하셔서 지금은 제도에서 포목 도매상을 하고 계셔. 솔직히 말해 우리 중에 제일 잘 나가시는 것 같다. 누님? 당연히 시집가셨지.

아. 이 이야기 하려던 게 아닌데. 형들이랑 나이차이가 나서, 형들은 이미 학교와 기사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견습 기사나 하급 기사로 활동하고 있었어. 나는 그 때 기사 아카데미 1년차였지. 어릴 적부터 워낙 열심히 단련해 둔 데다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체력이 있다 보니까 그 토나오고 힘들다는 기사 아카데미 1년차도 할 만 했어.

그런데 집에 아무도 없는 건 진짜 못 견디겠더라. 간만에 얻은 쉬는 날인데 말야. 친구들하고 놀까 하다가, 친구들은 다들 지쳐서 쓰러져 잠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났어. 부르면 깨서 나오겠지만, 썩 달가워하지만은 않겠다 싶었지. 그래서 나는 투덜거리면서, 책 한 권을 가방에 넣고 산책을 나섰지. 산책하면서 책이나 보다가 들어와서 자야겠다 싶었거든.

발길 가는 대로 걷다가 보니까 마침 어느 노천 카페가 있는거야. 앞마당에 대여섯 개의 테이블을 내놓은 카페였어. 커피 말고도 다른 걸 파는 게 있으니까, 잘 됐다, 여기 앉아서 잠깐 시간이나 보내자, 싶었지. 내가 코코아 시키니까 점원 누나가 놀라더라. 기리인, 왜? 아, 커피 때문에 그래? 어. 자라는 아이들은 커피를 안 먹는 게 좋아. 우리 마누라가 그러더라.

어쨌든. 코코아를 시키고 앉아있는데, 옆 테이블에 앉은 머리와 수염에 새치가 희끗희끗 섞여서 반백인 멋지게 나이든 신사분 한 분이 눈에 들어오더라. 신사다운 행동거지와 옷차림이었지만, 몸에 있는 근육이나 손의 굳은살은 이 분이 검을 많이 단련한 사람이라는 걸 말해줬지. 그런데 그 분 앞에는 젊은 아가씨 두 사람이 앉아있었지. 아가씨들은 두 사람 다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어. 손에는 하얀 모자를 꼭 쥐고 있었지. 얼굴은 그냥저냥 생겼고, 한 명은 키가 크고 한 명은 키가 작더라.

기묘한 조합이잖아? 책을 보고 있는 척 했지만, 내 귀는 그 사람들 대화 쪽으로 저절로 기울여지더라.

‘흐음... 그럼 컵에 담아두었던 초콜릿에...’

‘네, 누군가 소금과 올리브 오일을 왕창 부은 후에 휘휘 저어버린 거에요.’

‘어허... 그러면 완전히 맛이 가 버리는 거 아닌가?’

‘네... 시험삼아서 소금 들어간 초콜릿을 찍어 먹어봤는데... 너무 짜서 구역질이 막... 게다가 기름층이 둥둥 떠다니는데 이걸 완전히 걷어낼 수도 없고...’

그 신사분은 팔짱을 꼈어.

‘전부터도 자네들을 노리고 해꼬지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면서? 그런데 이번에는 너무 방심한 결과 아닌가?’

두 사람은 고개를 푹 숙였어. 그러더니, 두 사람 중 키가 작은 쪽이 고개를 들고 말했어.

‘비운 시간은 30초도 안 돼요! 잠시 옆 방에 있는 오븐에 가서 구워진 케이크빵을 가져오는 사이에...’

‘이미 일은 벌어졌다, 이 말이지.’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어.

‘그런데 누가 했는지 모르겠다는 말이지.’

‘네... 그게, 누구나 다 저희 작업대에 와서 저희를 망치려면 망칠 수는 있었어요. 하지만 저희가 바로 저희 초콜릿에 누군가 장난을 쳤다는 걸 알고, 선생님께 말씀드리자 선생님은 모든 동작을 멈추게 하셨죠. 그리고는 모두들 손을 들게 한 다음, 각 작업대를 돌아다니면서 초콜릿을 섞는데 사용한 도구가 있는지 확인하셨어요. 작업대에는 물이 없고, 도구를 씻으려면 교실 옆 쪽에 있는 개수대로 가야 하는데다가, 시간이 30초밖에 없었기 때문에 우리를 해꼬지한 도구를 숨기지는 못했을 거에요.’

흐음, 하면서 그 분은 고개를 숙였어. 그러더니 말씀하셨지.

‘뭔가 긴 막대 같은 걸로 컵 안에 넣어서 휘저었겠군?’

‘네.’

‘그리고 그 긴 막대 같은 걸 도저히 못 찾고 있다는 말이지.’

잠시 생각에 잠긴 그 분은 말씀하셨지.

‘다른 친구들은 어떤 요리를 선보이기로 했니?’

‘어... 에이미랑 푸키가 저희처럼 초코크림 케이크를 굽기로 했었고... 누아이랑 마에르가 스파게티를 삶아서 미트소스 스파게티를 낸다고 했었고... 그리고 이노스하고 에텔레드는...’

‘걔네들도 스파게티야. 그런데 걔네들은 반죽을 직접 한다고 했었잖아. 누아이네는 만들어진 건면(乾麪)을 사 왔고.’

‘그럼 대답은 나온 거 같은데? 누가 너희들 요리를 해꼬지하고도 걸리지 않았는지.’

‘네에?’

그 신사분은 내 쪽을 장난스럽게 바라보셨어. 처음부터 내가 엿듣고 있다는 걸 아셨나봐. 그러더니, 그 사람들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는 뭐라뭐라 속삭이셨어. 그녀들이 ‘아하!’하고 외치더니, ‘이년들을...’하고 키 큰 여자가 뛰쳐나갔고, 키 작은 여자는 잠시 당황하다가, 그 신사분에게 고개숙여 인사한 후, ‘같이 가!’ 하면서 뒤따라 나갔어.

‘이봐.’

잠시 뛰어가던 그녀들을 바라보던 그 신사분이 말씀하셨어.

‘네, 네?’

‘계속 듣고 있었지?’

‘어, 죄, 죄송합니다, 엿들으려던 것이 아니라...’

‘흐음... 남들 앞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한 우리의 잘못도 있으니 이야기하지 않겠네. 단 하나의 조건을 만족한다면 말이야.’

‘그... 그게 뭔가요...?’

당황하는 나에게 그 분은 말씀하셨지.

‘누가 그랬는지 맞춰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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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은 우리를 돌아보며 웃었다. 특히 내 쪽을.

“자, 기리인. 이것도 맞출 수 있을까? 이 신사분이 내 스승님이셨다. 참고로 나는 바로 맞췄다. 너는 맞출 수 있을까?”

============================ 작품 후기 ============================

아. 졸리네요.

미리미리 많이 안 써뒀더니 지금 졸려서 죽겠는데도 막 쓰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이번 트릭은 <커피점 탈레랑의 사건수첩> 2권에서 따왔습니다.

생각보다 간단한 트릭입니다.

제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고 가시는 여러분들, 정말 고맙습니다. 숫자 1 올라갈 때마다 정말 큰 보람을 느낍니다.

브륀하르트 님 // 언젠가는 시켜보고 싶은 생각도 있긴 합니다 확실히. ㅎㅎ

화이트프레페 님 // 그럼요. 메인 퀘스트 깨러 가야죠.

melontea 님 // 마음에 드신다니 저도 정말 기쁩니다 ㅎㅎ

eastarea 님 // 그러게요. 아무래도 먼치킨 아닌 먼치킨으로 만들다보니...

해양 남 // 메인퀘 잊지 않고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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