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4 5. 세 가지 이야기 =========================
“기리인, 이리 나와봐.”
한참 마차를 몰던 형이 나를 불렀다.
“네, 형.... 우와...!”
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를 보며 씩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눈 앞의 광경을 바라보기 바빴다.
점심을 달리는 동안 역참에서 싸 온 도시락으로 대충 때우고 나서 오후쯤, 우리는 드디어 푸른 산맥이 단순한 선이 아니라 확실한 중량감과 높이감을 갖는 지점까지 왔다. 그리고 나는 말로만 듣던 광경을 처음 보게 되어 입이 쩍 벌어져 있었다.
“우와...”
“오늘 저기 지나는 건 무리일 거야. 오늘 역참에서 자고, 내일 점심때쯤 저기를 지날거다. 그때 한번 봐. 지금보다 더 말이 안 되는 광경을 볼 수 있을 거다.”
어떻게? 지금보다 더 대단하다는 거지?
치르낙 대왕의 업적은 많고도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언어도단적인 업적을 꼽으라면 역시 드래곤 르플레스탁과 협정을 체결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대왕은 푸른 산맥 서쪽을 통일한 후, 동쪽과 서쪽이 푸른 산맥과 르플레스탁의 레어로 막혀 소통하지 못하는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모르지, 대륙 동쪽까지 차지하고 싶었는지 어떤지.
결국 그는 홀홀단신으로 르플레스탁의 레어를 찾아가, 온갖 시련을 뚫고 르플레스탁을 만나는데 성공했다. 그의 간곡한 설득에 르플레스탁은 치르낙 대왕의 세 가지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 세 가지 부탁이라는 것은, 푸른 산맥을 뚫어주고, 그의 레어에 소장되어 있던 마법 물품들을 주고, 레어를 백색 산맥으로 옮겼다.
“와...”
그게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광경이다. 산맥이라는 건 마치 선이 이어지듯 쭉 이어지는 것이 정상 아닌가? 그런 산맥이, 황도의 넓이만큼, 마차 서너 대의 넓이만큼, 사라져 있었다. 예를 들어 (물론 파낼 수도 없었겠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해 저 산맥을 파냈다면, 적어도 사람의 손길이 닿았다는 느낌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황도 양옆의 산맥 부분이 걸어올라갈 수 있게끔 경사가 져 있다거나.
하지만 저 광경은 정말이지 뭐라 말이 안 나오는 광경이었다. 산맥이, 아무런 앞날을 모르고 바다를 향해 달려나가다가, 언어도단적인 힘을 만나, 사라졌다가... 얼마 떨어진 곳에서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면, 저 산맥 잘린 선이 확 보이거든? 진짜, 나 이 황도를 스무 번은 지나다녔을 건데, 볼때마다 신기해.”
“동감입니다, 에아임 씨.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광경이죠. 기리인 군에게도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기리인, 감상이 어때?”
“아...”
내 멍한 감상을 들은 형과 아저씨와 누나는 키득대며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저 광경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두고 싶었다.
“기리인, 이리 와서 앉아봐.”
형이 마부석을 비워줬다. 나는 형이 앉았던 자리로 갔다.
“별로 할 거 없어. 꺾을 필요도 없고, 말들의 속도를 올릴 필요도 내릴 필요도 없다. 중간에 쉴 때는 우리가 해 주면 되니까. 만에 하나, 비상상황이 생기면, 왼쪽에 있는 이 막대를 강하게 잡아당겨라. 그러면 마차 바퀴가 멈출 거다.”
형은 마차 안으로 들어가서, 발을 쭉 뻗고 앉았다. 나는 형의 배려를 감사히 받아들였다. 형은 자신도 쉴 겸, 내가 저 푸른 산맥의 광경을 조금이라도 더 볼 수 있도록 앞자리에 앉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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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내내 나는 마부석에 앉아 푸른 산맥이 점점 커지며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산맥이 커질수록, 르플레스탁이 잘라낸 부분이 점점 커졌다. 질릴만도 한데, 나는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두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푸른 산맥 너머로 넘어갈 때까지 나는 멍하니 앞을 향해 달렸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두 번째 역참에 도착할 때는 이미 해가 진 후였다. 형이 나에게서 마차를 넘겨받아, 어제처럼 마차를 보관소로 끌고 갔다. 내려서 어제처럼 마차를 세우려던 나는 얼굴이 따갑다는 걸 느꼈다.
“아야야야야....”
“기리인, 왜 그래?”
“얼굴이 아파요...”
“으이그. 하루종일 밖에서 햇살 받아서 탔구만. 빨개진 거 봐라.”
“아, 따가워요... 살살 만지세요...”
“차라리 잘 됐어. 얘 데리고 제도 가면 특히 여자들이 얘만 쳐다보느라고 정신없을 텐데, 이렇게 약간 태워서 스스로 그 매력을 줄여줬으니, 기특하기도 하지.”
“아! 웃기지 말아요! 웃으니까 아프단 말이에요!”
형과 아저씨는 킬킬대며 웃었다. 이 양반들이 진짜. 마차의 포장 위에 둘러진 줄에 어제처럼 마법을 걸고 온 에빌로 누나가 그 광경을 보더니 나에게 다가왔다.
“치유 마법 걸어줄게.”
“자, 잠깐만요!”
내가 말릴 틈도 없이 누나는 치유마법을 읊기 시작했다. 누나의 빛나는 손이 내 얼굴에 가까이 왔다가... 빛이 사그라들었다.
“어?”
누나의 당황한 목소리.
“이거 왜 이래?”
“에빌로, 왜 그래?”
“마법이... 안 걸렸어요.”
“응?”
“하아...”
나는 한숨을 쉬었다. 누나는 알 줄 알았는데.
“누나, 첫 날인가... 저한테 수면 마법 쓴 적 있지 않아요? 그 때 알아채지 않으셨어요?”
“아... 아니, 수면 마법은 걸고 나서 뒤 안 봐도 되니까... 저런 줄 몰랐는데...”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형과 아저씨를 향해 나는 말했다.
“들어가서, 저녁 먹으면서 얘기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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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
세 사람은 모두 믿을 수 없다는 식으로 입을 쩍 벌렸다.
“자, 잠깐만.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야? 에빌로가 너한테 마법을 쓰면...”
“예를 들어, 수면 마법이나 치유 마법 같은 대상 지정 마법을 쓰면?”
“안 먹어요. 아예. 누나 아까 보셨죠? 제 몸 주변에 마법이 사라지는 공간이 생긴 것처럼, 제 몸 가까이 오니까 마법 자체가 사라져요.”
“그럼... 그런 대상 지정 마법 말고, 맞춰야 하는 비지정 마법, 예를 들어, 화염구를 날리면?”
“시험해보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누나가 마법으로 만든 물을 제가 마실 수 있었잖아요?”
누나는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에빌로, 자기만 알지 말고 우리한테도 설명을 좀 해 줘.”
“어... 기리인의 몸 주변에는 일종의 마법 무효화 장(field)이 설치되어 있어요. 하지만 이 장은 그 안에서 마나를 움직이는 것을 막을 뿐, 이미 마나가 움직여져 발생한 자연 현상까지 막아주지는 못해요. 예를 들어...”
누나는 갑자기 손을 움직이며 마법을 걸었다.
“물체 창조.”
콩.
“아얏!”
내 머리 위에 아기 주먹만한 돌멩이가 생겨, 내 머리 위로 툭 떨어졌다.
“아야....”
“보셨듯이, 물체 창조로 생긴 돌멩이가 기리인 몸에 그대로 맞았죠. 이런 정도라면, 화염구 마법을 쓰면 그 마법 자체가 기리인에게 가 닿지는 못하더라도 기리인의 몸에 화상이 생기거나 옷이 불타는 피해는 있을 거에요. 음... 물리적인 힘을 쓰는 마법들, 예를 들면 아까 같은 물체 창조 마법이나 ‘보이지 않는 손’ 마법, 바람 마법 같은 건 효과가 있을 거고, 대상에 목표를 정해서 쏘아야 하는 전격계 마법들은 기리인에게 효과가 없겠네요.”
“아...”
“에빌로 양. 우리는 그렇게 말해도 이게 어떤 상황인지 모릅니다. 대단한 건가요?”
에빌로 누나는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대단하냐고요? 전대미문의 사건이에요. 대륙 마법계에 이런 사건은 제가 알기로 한 번도 없을 거에요. 있을 수 없는 일이 생긴 거라고요.”
“그래서...”
나는 아까, 이런 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 가져왔던 편지 한 통을 꺼냈다.
“제 담당 선생님이 제도의 그랜드 아카데미에 편지를 보냈고, 답신을 받으셨어요. 이게 그 편지에요. 혹시 모르니 제가 가지고 있다가 보여주라고 하셨어요.”
형은 편지를 받아들었고, 아저씨와 누나는 그 편지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마치 우스운 연극의 한 장면 같아서 나는 속으로 웃었다.
“...그러나, 본 아카데미는 요안나 님이 첨부한 기리인 군의 증상에 대한 보고서를 검토하여, 그의 증세가 일반적인 문헌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증상이라는 요안나 님의 결론에 동의하였습니다. 이에 본 아카데미는 제도 대도서관 및 제도의 트리클 신전과 협의하여, <기리인 군의 증상에 대해 조사해 보고 가능한 치유방법이 있는지>를 안식년 연구 주제로 삼기로 한 당신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지원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제도 대도서관?!”
“제도의 신전이면, 디트리클 시의 대신전?!”
차례대로 형, 누나, 아저씨가 큰 소리로 물어왔다. 지금까지 내가 어떤 어려운 문제를 맞췄을 때도 저 정도의 반응은 아니었는데...
“어... 네, 저야 모르지만...”
“이 친구 이거, 자신이 얽힌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는구만.”
형은 편지를 잘 접어 돌려주면서 말했다.
“잘 봐라, 기리인. 너는 이번 여정을 통해, 나, 그러니까 로그푸스 변경백가의 아들이자, 제국 수사기사단의 2급 수사기사와 친분을 맺게 됐다. 그리고 공을 세워, 그 공훈이 제국 수사기사단과, 황제 폐하에게 이미 보고되었고, 별다른 일이 없는 이상 어전에서 포상이 있을 예정이다.”
으아, 부담스러워.
“그 뿐만이 아니다. 수사기사로서 나는 너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보고서를 썼다. 그 보고서에는 너라는 사람의 성향과 재능에 대해 서술되어 있으며, 네가 수사기사가 되면 아주 좋을 거라는 얘기도 썼다.”
“에엑?”
“미안하다, 기리인. 하지만 이건 기리인 모스라는 사람의 형 이전에, 제국을 위해 일하는 공복으로서의 의무이다. 너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던 점 미안하게 생각한다.”
형은 고개를 숙여보였다. 아아. 저러면 화도 못 내잖아요.
“그런데 오늘 너는, 너와 관련하여 그랜드 아카데미에 연결점이 있고, 그 뿐만 아니라 그토록 움직이기 힘들다는 제도 대도서관과, 트리클의 날 미사드리는 것 이외에는 연결되기 힘든 디트리클 시의 대신전과 연결점이 있다는 말을 했다.”
“네에...”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쉽게 말해 너의 주변에 지금 제국에서 힘깨나 쓰는 집단의 절반 이상이 얽혀 있다는 거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일요일이 한번 끼면 연재 주기를 정상으로 돌려놓는데 참 시간이 걸리네요.
오늘 자정에는 꼭 정상연재 하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시는 많은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주시는 하나하나마다 저는 큰 힘을 얻습니다.
카이레스베르고 님 후원쿠폰 10장 감사합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브륀하르트 님 // 잘 봐주셨다니 감사합니다. ^^
melontea 님 // 재미있다니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
eastarea 님 //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