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5 5. 세 가지 이야기 =========================
‘띠링!’
<냉철이 발동합니다. 상황에 대해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해 볼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아슬아슬한 상황입니다. 본인 스스로 냉정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헐... 냉철이 아슬아슬하다고. 하긴, 그럴만한 상황이다. 한 달은 고사하고, 어제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찾아가서 ‘너 내일 이럴 거다’고 하면 믿을까? 전혀 안 믿을 것 같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냥 유망한 마법사 지망생일 뿐이었다. 곧 제도의 그랜드 아카데미에 입학하기로 한 것이 그냥 특별한 정도인, 특별해질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그러기에는 많은 세월이 있어야 할 사람. 하지만 그 사이에, 마법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고 나서, 내 인생은 대격변을 겪었다.
어느새 나는, 제국의 유력 가문의 일원과 호형호제하는 사람, 제국 수사기사단이라는 황제 폐하 직속 기관에서 (좋은 의미라지만) 주목하는 사람, 평민들 중에 평생 몇 명이나 그리 할 수 있을지 의문인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어전에서 상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동시에, 제도의 그랜드 아카데미, 제국 학술계의 중심인 제도 대도서관, 제국의 국교인 트리클 교의 대신전에서 내 몸에 일어난 특별한 현상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갓 성년이 된 내가 저런 사실들을 냉철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게 웃긴 일이겠지. 가슴이 막 뛰려는 걸 나는 간신히, 심호흡을 크게 하며 진정시켰다.
“형.”
“응.”
“저 위험한 건가요?”
형은 잠시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푸핫 하고 웃었다.
“위험하냐고? 위험할수도 있지! 그럼! 하하하!”
황당한 소리 한다는 투로 한참 웃던 형은, 문득 내 표정을 보고, 약간 웃음을 거두고는 내 머리를 슥슥 헤집었다.
“미안, 기리인. 네 말을 비웃은 건 아니다. 그저... 너를 보면, 그저께 어저께 우리 이야기를 듣고 정답을 슥슥 맞추고, 권력자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던 모습 때문인지, 자꾸만 니가 이제 막 성인이 된 사람이라는 걸 잊어버리게 돼. 미안하다.”
‘냉철’ 때문일까. 삐져야 정상일 것 같은데, 삐질 마음도 있었는데, 나는 한숨을 짧게 쉬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형은 웃으며 다시 부연했다.
“위험하냐는 게 어떤 위험을 묻는 것인지에 따라서 다르겠지? 하지만 니가 말하는 위험이 우리 수사기사들처럼 진짜 생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는가, 라는 걸 묻는다면 그건 아닐거다. 너와 얽힌 단체들이 서로 대립하는 부분이 없지 않긴 해도, 너를 죽여서까지 데려갈 사람들은 아니니까. ...설마 이 형이 그럴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형의 이런 점이 참 좋다. 분위기가 심각해지려 할 때 농담을 던져 긴장을 풀어주는, 상대를 배려하는 모습. 배우고 싶다.
“위험성이라면... 그건 있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는 못할 가능성이 있지. 예를 들면, 너의 거취나 연구 방향을 두고 대도서관과 아카데미가 알력다툼을 벌일 가능성 같은 거 말이다. 그러면 너는 어느 쪽 편도 들지 못하고 가운데에서 끼이겠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나는 형에게 되물었다.
“즉, 제가 너무 여러 곳과 얽혀있는데 비해서 제가 힘이 없기 때문에, 그 얽힌 곳들간의 힘싸움의 전리품처럼 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죠?”
“역시 척하면 척이구나.”
우리의 대화는 급사가 요리를 날라와서 잠시 끊겼다. 나는 요리의 종류가 어제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을 깨닫고, 역시 군에서 운영하는 시설이구나, 융통성 같은 거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급사가 고개를 숙여보인 후 자리로 돌아가자, 형은 물었다.
“기리인, 그럼 넌 어떻게 해야 할 것 같냐?”
“음...”
나는 깊이 생각에 잠겼다. 내가 생각에 잠기는 동안 형, 아저씨, 누나는 가만히, 포크도 들지 않은 채 나를 기다려주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고개를 들고 말하기 시작했다.
“우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모든 집단이 이성을 발휘해 저를 이성적으로 대해 주기를 바라는 수가 있죠. 아카데미도, 대도서관도, 대신전도, 그리고 선생님까지도, 자신들의 목적이 아닌 순수한 학문을 위해, 그리고 가능하다면 저의 회복을 위해 힘써 줬으면 하는... 하지만 이게 될 거라고 믿으면 저는 바보겠네요.”
여전히, 다들 내 말을 기다려주고 있다. 이 단순한 배려에 나는 약간 목이 메이는 느낌이 들어 짐짓 헛기침을 하고는 다음 말을 꺼냈다.
“두 번째로, 어느 한 쪽과 전면적으로 협력하는 수가 있죠. 예를 들면 완전히 아카데미 소속으로 들어가서, ‘제 몸 상태의 연구는 아카데미에서만 진행할 것이고, 그 성과는 아카데미와만 공유할 것입니다. 또, 이후에 아카데미가 다른 집단과 대립하게 될 경우 저는 아카데미의 편에 설 것입니다’라고 선언하는 방식이 되겠네요.”
“그 경우의 문제는?”
“많죠. 다른 집단, 예를 들어 위에 든 예처럼 제가 행동할 경우, 대도서관이나 대신전과는 척을 지게 된다고 봐야겠죠. 또, 저는 본질적으로 그들의 소속이 아닌 부스러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언제든 쓰고 싶은 대로 쓰다가 버려버릴 수 있죠. 무엇보다... 저는 1년만 있을 사람이니까, 이 방법은 택하기 어려울 것 같네요.”
“와아...”
누나의 짧은 감탄.
“다른 방법이 있다면, 저들 집단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거죠. 하지만 그건 제가 능력이 있을 때나 가능한 거고, 저처럼 제도에 처음 발을 들이는 초심자가 제도의 미묘한 정치적 갈등을 줄다리기하며 싸움을 붙일 수 있을 리 없으니 그건 제외해야겠네요.”
아저씨 역시 감탄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기리인 군, 정말 열아홉 살 맞아요? 대체 그런 조직간의 알력다툼에 대한 고찰은 열아홉 살 짜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은데요.”
뭐...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잡히는 대로 읽다 보면 이런 쪽 소설책들도 많이 들어오게 마련이거든요. 그리고, 어릴적부터 그런 쪽의 시야가 트이게 되면, 아이들의 단순한 다툼도 그냥 다툼으로 보이지 않게 되죠.
형은 눈빛으로 다음 말을 재촉했다. 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세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아요.”
“형 앞에서 거짓말하면 혼난다.”
나는 형을 바라보았고, 형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요놈아. 거짓말 잡아내는 게 일인 제국 수사기사 앞에서 대놓고 거짓말을 해? 간도 크다. 얼른 네 번째 방법을 말해봐.”
그리고 형은, 나를 보며,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까 메였던 목이 더 꽉 메이는 것을 느꼈다. 황급히 탁자 위에 놓인 맥주잔을 두어 모금 들이킨 후 말했다.
“네 번째 방법은, 제 스스로가 저들에게 흔들리지 않을 만한 위치에 올라가는 거에요. 어전에서 포상을 얻거나, 뭔가 공훈을 세우거나 하는 식으로 이루어질까요... 방법까지는 모르겠네요. 제가 충분히 거물이 된다면, 수사기사단이든, 그랜드 아카데미든, 대신전이든 저들이 원하는 대로만은 할 수 없겠지요.”
“그런데?”
나는 약간 울컥해서 형을 바라보았다.
“형. 아시면서 물어보시는 거죠. 그게 저한테 가능할 리가 없잖아요. 황제폐하를 알현하고 어전에서 포상을 받는다 한들, 그건 저라는 상품의 이용가치를 올려주는 것일 뿐, 상품에 발을 달아주어 가고 싶은 대로 가게 해 주는 건 아니잖아요. 저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고요.”
“그래, 너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지.”
단정짓듯, 사실을 말하는 딱부러지는 말투. 나는 더 울컥해서 형을 바라보았다. 형은 담담히 내 눈길을 받아넘기며 말했다.
“기리인. 나는 너에게 빚진 마음이 있다. 결국 이번 사태는 내가 너의 지인이라는 사적인 입장보다 제국 수사기사단의 일원으로서 수사기사단을 위하는 공적인 입장을 더 우선시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도 하다. 적어도 내가 너에 대한 이야기를 수사기사단에 하지 않았다면, 너에게 가해지는 압력이 하나는 줄었을 테니까.”
나는 다시 치솟는 울화를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셔서 밀어내렸다. 후우. 어느새 잔은 2/3 넘게 비어 있었다. 형은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사보다 공을 우선시하라는 것은 우리 가문의 가훈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 나는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어도 지금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리인. 전에 한 번 말한 적이 있지? 로그푸스 가문의 가훈 중에는 은원을 잊지 말라는 가훈도 있다. 나는 그 가훈도 지킬 거다. 공적인 입장에서 나는 제국 수사기사단을 위해 판단했지만, 사적인 입장에서 나는 기리인 모스를 지키고 싶은 지인으로서 판단하고 행동할 거다. 그러니,”
형은 내 쪽으로 완전히 돌아앉아,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눈으로 나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도와달라고 해.”
울컥. 아까까지의 울컥이 화가 나서 그랬다면, 지금 것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였다. 나는 더 이상 냉철이고 언변이고 뭐고 따질 겨를 없이 물었다.
“왜요?”
“왜라니?”
“저는 그냥 우연히 길이 겹친 남일 뿐이잖아요. 형이 왜 이렇게 저를 도우시려고...”
형은 잠시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길에 분노는 없었지만, 엄한 빛은 충분히 들어있었다. 결국 내 말꼬리가 자연히 사그라들었고, 형은 잠시 그렇게 나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말했다.
“이놈아. 너를 돕고자 하는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말해서 마음을 다치게 하는 건 안 좋은 버릇이다. 고쳐라.”
“죄송해요...”
“너를 왜 돕냐고?”
형은 탁자 위에 있는 잔을 들어 맥주를 꿀꺽꿀꺽 삼켰다. 아저씨와 누나는 숨죽인 채 우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잔을 다 비운 형이 탁자에 놋쇠잔을 텅 하고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는 말재주가 너처럼 좋지는 않으니 꾸미지 않고 말하겠다. 나는 네가 좋다. 막내로서만 자랐던 나는 너같은 동생이 있으면 정말 좋을 것 같다. 게다가 이번 여행을 통해 나는 너의 자질과 너의 끈기, 너의 선함을 보았다. 아끼는 동생을 곁에 두고, 형으로서 너를 지키고 보호하고 싶다. 이르게 신의 곁으로 가신 부모님의 역할을 약간이나마 해주고 싶다. 이 정도면 충분히 이유가 되겠냐?”
아아.
나는 어느새 내 볼을 타고 내려가는 굵은 눈물을 느끼며, 내 목을 꽉 틀어막은 덩어리 하나를 느끼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또 끄덕였다. 형은, 긴 말이 쑥스러웠던 듯,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내 머리만 쓰다듬었다.
그리고 나는 그 손길이 너무나도 좋았다.
“톨라츠.”
“네, 에아임 씨.”
“지금 맹세하고 싶은데.”
아저씨는 조용히, 특유의 그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일어났다. 아저씨의 큰 덩치가 일어나자 자연스럽게 위압감과 엄숙함, 진지함이 생겨났다.
“신의 종 앞에서 하는 맹세가 어떤 맹세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그 맹세는 두 사람 모두의 명시된 합의가 없으면 깰 수 없으며, 깨어진 맹세는 당신들의 천칭에 남아 당신의 성급함에 대한 단죄가 될 것입니다. 그래도 하겠습니까?”
형은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 역시도 형을 보며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톨라츠 아저씨는 우리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형은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우리 둘 사이에 세웠다. 그리고 나를 향해 눈짓했다. 나는 형의 눈짓대로 형의 손 위로 칼 손잡이를 잡았다. 형이 말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신의 종 톨라츠 미트리클과, 마법사 에빌로 레페프가 증인이 된 가운데, 이 사람 기리인 모스를 의형제로 삼아, 죽는 날까지 그와 의형제의 정리를 나누고자 한다. 나는 그의 의형이자 후견인이 되어 그를 지키고 보호하며 그를 위해 판단하고 행동할 것이다.”
나는 꽉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는 목과 입을 억지로 움직여 말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신의 종 톨라츠 미트리클과, 마법사 에빌로 레페프가 증인이 된 가운데... 이 사람, 에아임 로그푸스와 의형제의 연을 맺고, 죽는 날까지 그 정리를 나누고자 합니다. 나는 그의 의동생으로서, 그를 따르고, 그를 신뢰하며, 그를 자랑스럽게 할 것입니다.”
다시 내 눈에서 왈칵 눈물이 나왔다. 톨라츠 아저씨는 하늘을 보며 말했다.
“트리클 신이시여. 이 두 사람이 신의 종 앞에서 맹세하였습니다. 이들의 마음에 삿된 바가 없고 이들의 맹세에 진실함이 있사오니, 신께서 이들을 축복하시어 이 맹세를 지켜주시길.”
곧, 톨라츠 아저씨의 두 손이 하얗게 물들었다. 아저씨는 두 손을 우리들의 머리 위에 잠시 얹었고, 형과 나의 몸이 하얗게 빛났다가 다시 원상복귀되었다. 끝난 건가? 내가 약간 어리둥절해 형을 바라보자, 형은 조심스럽게 칼을 자신의 칼집에 집어넣더니, 웃으며 말했다.
“이리 와. 동생 생긴 김에 처음으로 한 번 안아보자.”
형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나는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형에게 안겨들었다. 왠지는 정확히 알수 없었지만 나는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형은 그런 나를 달래듯, 한참이나 나를 꼭 안아준 채 다독이고 있었다.
남자의 품도, 큰 위안이 될 때가 있다는 걸 알았다.
============================ 작품 후기 ============================
* 수정 * 이번 편으로 5챕터를 마무리합니다.
끊기 애매해서 쓴 대로 다 집어넣었더니 이렇게 됐네요.
음. 전개가 약간 뜬금없다고 보실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에아임이 기리인을 좋아하는 것이기도 하고(아 물론 ANG? 그런 거 아닙니다;;;)
기리인의 매력 100이 작용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deep dark 이런거 아닙;;;)
기리인은 부모님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음 붙일 곳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고,
에아임은 제도에서 기리인이 이리저리 휩쓸릴까봐 걱정되는 것이라고 보시면 되겠네요.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숫자가 1, 2 올라가는 것을 새로고침하며 볼 때마다 글 쓰는 의욕이 생깁니다.
상식뽀각 님 // 격려말씀 감사합니다!
eastarea 님 // 더 열심히 써서 개이득이 자주 일어나게끔 연참을 시도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사실 기리인 같은 사람이 대륙의 사건의 중심에 있으려면 어쩔 수 없긴 하죠 ㅎ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