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8 6. 나 좀 가만 내버려 둬요 =========================
“아빠, 나 빵 좀 더 줘.”
“어, 그래. 뢰다, 잘 먹네? 맛있니?”
“응! 맛있어!”
“기리인, 더 줄까?”
“그럼 한 그릇만 더...”
테밀 누나는 웃으며 옆의 스튜 단지에서 크게 한 국자 퍼서 내가 내민 접시에 부어주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맛있었다. 토마토의 새콤달콤한 맛이 푹 우려낸 고기의 구수한 맛과 너무도 잘 어우러진다. 여기에...
“누나, 이 매콤한 향은 뭐에요?”
“아? 아, 그거. 후추를 약간 넣었어.”
“후추요? 와, 그 비싼걸...”
테밀 누나는 씩 웃었다.
“기리인이 제도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는구나? 제도는 북쪽에 비해 가까운데다가 직접 배로 남대륙하고 교류하니까 북쪽보다 많이 싸. 낭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 정도는 그냥 넣을만 해.”
“누나?”
“내가 그렇게 부르라고 했어요.”
형은 잠시 우리 둘을 번갈아 보다가, 멍하니 말했다.
“역시, 마성의 남자라니까... 아얏!”
등짝 한가운데 맹렬한 누나의 후려치기를 받은 형은 잠시 몸을 비틀며 괴로워했다.
“엄마, 아빠 왜 때려?”
“응, 아빠가 바보같은 말을 해서 엄마가 혼내준거야.”
나는 좀 곤란하게 하하하 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아픔이 사라진 듯 스튜를 두세 숟가락 퍼먹던 형이 말했다.
“기리인, 앞으로 어떻게 될지 말해줄게.”
“네, 형.”
“일단 내일은 기사단 본부에 갈 거야. 가서, 단장님께 인사도 드리고, 내가 보낸 보고서에 미진한 점이 있는지 구두로 보고하는 시간을 가질 거다. 그리고 내가 상신한 너의 포상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도 알아볼 거고.”
“네...”
“여보,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화요일이에요.”
“그러면 모레 아침이 정기적으로 열리는 어전 회의겠군. 기리인, 잘 하면 내일 아침에 황궁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다. 내일 오후에는 형이랑 옷 맞추러 가자. 예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좋은 옷은 입고 가야지.”
헐......
“야, 표정 풀어. 황제 폐하도 다 사람이야. 안 잡아먹어.”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는 말을 위로랍시고 하던 형은, 이어 나를 체하게 하기로 결심한 듯 줄줄이 말을 잇기 시작했다.
“목요일 어전 회의니까 추밀원, 재상부, 상공부, 농업부, 대장군부, 그리고... 어 그래, 황후 전하와 궁내부도 참석하겠네. 야, 우리 기리인 출세했네?”
“형... 제발...”
“음음. 미안. 어쨌든, 별다른 일이 없으면 거기 갈 거야. 너야 뭐 거기 앉아있을 건 아니고 그 앞에서 무릎꿇고 상만 받고 나랑 같이 나오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 실례같은 거 할 틈도 없을거야.”
그런다고 긴장이 안 되면 그게 사람이에요?
“여보, 그리고 이번주 금요일이 무도회가 열리는 날이에요.”
“어? 그런가? 이번 달... 진짜네?”
“무도회요?”
“어, 두 달에 한 번 꼴로 황실이나 추밀원의 대귀족가에서 돌아가면서 주최하는 대규모 무도회야. 사실 춤은 구실이고 모여서 친목도 다지고 젊은 선남선녀들 자연스럽게 모임도 갖게 해 주고 그러는 자리야.”
아... 나는 불현듯 리미를 떠올렸다. 그래. 리미는 그것 때문에 지금도 연습하고 있겠지. 리미는 잘 지내려나. 잠시 다른 생각을 하던 나는, 형의 눈길 때문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형의 눈길은 짓궂기 짝이 없었다.
“기리인, 뭘 남 일 보듯이 그러고 있냐?”
“네?”
“너도 갈 거야.”
“에엑?!”
옆에서 어른들이 얘기하거나 말거나 빵을 스튜에 찍어 열심히 먹고 있던 뢰다가 깜짝 놀랐다. 나는 얼른 뢰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안~”하고 뢰다를 안심시킨 후, 형에게 따지듯 물었다.
“무도회요? 춤도 출 줄 모르는데?”
“걱정마. 안 춰도 되니까.”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고...!”
“왜 굳이 가야 하냐 이 말이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형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너의 후견인이 되었다는 걸 가장 쉽게 알릴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그런 자리에 같이 나타나서 소문을 퍼트리는 거겠죠. 이런 일은 어디 공고문 붙이고 할 일이 아니니까.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라. 제도의 사교계는 레카 시의 그것처럼 지저분하지 않아. 그리고, 너같은 외모와 화술의 소유자가 나타나면 오히려 사교계의 인기 스타가 될 수도 있을 거다. 인기있는 사람은 약간의 결례를 해도 사람들이 보아넘겨 줄 거야.”
요만큼도 위로가 되지 않는걸요...
“그렇게 해서, 내가 너의 후견인이자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됐다는 게 널리 소문이 퍼지게 되면, 아카데미나 대신전, 대도서관 쪽에서 알아서 접촉해 올 거다. 그렇게 해야. 니가 무슨 실험대상 동물 취급을 받지 않고 공동연구를 할 수 있을 거야.”
지극히 논리적인 해결책이다. 형의 말은 타당하다. 지금 내 상황에 알맞은 해결책일 거다... 그래도 무도회라니. 배가 꼬이는 기분이다. 결국 나는 식욕이 없어져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이는, 밥이라도 다 먹고 얘기할 것이지. 저 봐요.”
찰싹! 형의 반 팔 셔츠 위를 차지게 후려갈긴 누나가 나를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아하하. 웃자. 웃어.
“기리인,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를 그런 데 왜 데려간다고 생각하냐. 뭔가 네가 실수를 하거나 해도, 내가 그 뒤처리를 도와줄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어려운 자리는 형이랑 같이 갈 거야. 알았지?”
“...네.”
나는 옆에 놓인 물잔을 한 모금 마시려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말했다.
“저, 선생님한테 저 왔다고 연락을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선생님? 어떤 선생님... 아. 요안나 이스카라는 그 선생님?”
“네. 제도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었는데, 제가 형 집에 머물고 있다는 걸 알려드려야 할 것 같은데...”
“편지를 써서 오레즈에게 맡기렴. 오레즈가 편지를 대신 부쳐 줄 거야.”
“아... 어디 있는지 정확하게 모르는데 그래도 돼요?”
누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응. 제도의 우편 배달부들은 세금 징수원을 겸하고 있거든. 사실 그 쪽이 더 주업무지만, 아무튼. 그래서 어디든 갈 수 있고 찾아낼 수 있을 거야. 대충 어디 있는지는 알지?”
“네, 그랜드 아카데미에서 안식년을...”
“그럼 그렇게 보내면 돼. 그랜드 아카데미에서 알아서 찾아줄 거야.”
그렇게 말하던 누나는, 내 옆을 보더니, 푸훗 하고 웃었다. 옆을 보자 뢰다가 빵을 입에 한 조각 문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빠랑 같이 저녁 먹는다고 낮에부터 신나서 뛰어다니더니.”
웃으면서 그렇게 말한 누나는, 뢰다에게 다가가 냅킨으로 뢰다의 입가를 닦은 후, 뢰다를 흔들었다.
“자, 뢰다야. 얼른 양치질하고 가서 자자.”
“우웅... 졸려...”
“자, 자기 발로 가야지?”
“우웅...”
“내가 할 게.”
형이 다가와 뢰다를 번쩍 안아들었다. 뢰다는 반쯤 졸린 눈으로도 형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형은 그렇게 뢰다를 안아든 채 욕실로 향했다.
“보기 좋네요.”
내 말에 누나는 잔잔하게 웃었다.
“아빠가 1년에 저렇게 몇 번씩 길게 집을 비우니까... 뢰다가 아빠를 많이 보고 싶어해. 그만큼 저이도 집에 있을 때는 아들바보 노릇을 많이 해 주고.”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겪어온 형을 보면 형이 저렇게 가정적인 사람이라는 게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하네요.”
“그치? 연애할 때는 좀 사람이 답답하다고 생각했는데, 결혼하고 나니까 오히려 그게 다 장점이 되더라.”
나는 연애할 때 얘기를 물어보려...다가, 참았다. 지금 내가 그걸 물어보면 아마 한참 이야기가 이어질 테고, 그러면 두 분이 보내야 할 오붓한 시간을 내가 방해하는 꼴이 되고도 남겠지. 그런 눈치없는 행동을 할 수야 없지. 뢰다를 양치질시킨 형이 이미 잠들어버린 뢰다를 데리고 2층의 방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를 기다려, 나는 말했다.
“형, 미안해요. 오늘 너무 졸려서 먼저 들어가 봐도 될까요?”
“어, 그래, 내일도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먼저 자렴.”
“누나, 맛있게 잘 먹었어요. 정말 맛있었어요. 먼저 잘게요.”
“그래. 잘 자렴, 기리인.”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옆에서 아무 말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던 오레즈 할아버지에게 촛대를 받아들었다.
“기리인 님은 눈치가 좋으시군요.”
“네?”
“일부러 자리를 피해드린 것 아닌가요?”
나는 그저 빙긋 웃었다. 그걸 보고 오레즈 할아버지도 빙긋 웃었다. 어느새 별채에 도착한 나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식사는 저 본관에서 같이 하시게 될 겁니다. 아침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아이고, 그냥 제가 갈게요. 아침에 바쁘실텐데. 할아버지도 얼른 쉬러 가세요.”
“좋은 밤 되세요, 기리인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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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방 안에 들어와 대충 씻고 양치질을 한 다음, 침대에 누웠다. 내 가슴은 약간 두근거리고 있었다. 왜일까. 앞으로 펼쳐질 복잡하고 곤란하기 짝이 없는 일정들 때문일까? 아니. 그건 아니다. 형이 함께 해 준다고 했으니 형을 믿을 뿐이다. 그것 때문에 두근거리는 것이 아니다.
선생님. 요안나 선생님을, 마지막에 선생님의 진한 향기가 함께 한 깊은 입맞춤만을 남기고 먼저 떠난 선생님을 이제 곧 만날 수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을 자각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 제도라는 수십만이 사는 공간, 이 넓디 넓은 공간에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두근거리는데, 만나면 이거 훨씬 심해질텐데 어쩌나 싶다.
이봐, 시스템.
‘띠링!’
<오랜만입니다.>
미안, 그 동안 별 일이 없어서 못 불렀네.
<별 일이 있어야만 부르는 겁니까?>
삐졌어?
<삐졌다고 하지 마십시오.>
삐졌네... 미안. 앞으로는 자주 부를게.
<됐습니다. 궁금한 게 있습니까?>
어... 내 가슴 두근거리는 거 말야. 이런 거에는 냉철이 적용 안돼?
<됩니다.>
그러면...
<하지만 권장하지 않습니다. 남녀간의 관계에 냉철을 적용시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계산적으로 대하게 되고... 금세 질려 버리겠지...
<그렇습니다. 그러니 그 두근거림도 관계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설렘도, 아픔도, 분노도, 슬픔도 모두 당신의 감정을 성장시키는 경험이 될 것입니다. 감정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응, 그럴게 시스템. 고마워. 이제 잘게.
<언제든 불러주시길.>
나는 넓은 침대의 한가운데 드러누웠다. 낯선 천장이지만, 곧 익숙해지겠지. 피곤했는지, 나는 언제 그랬는지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 작품 후기 ============================
이게 그렇습니다.
잔잔한 부분이 나오고 관계를 설명하는 부분이 있어야만,
그 후에 꽝! 하고 몰아치는 부분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지금 기리인이 잔잔한 애정과 두근거림을 느낀다면, 이후에 무섭게 굴리기 위함일지도요.
(씨익)
취향타는 글 읽어주시는 여러분들께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이 주시는 하나 하나가 저를 일으켜세웁니다.
상식뽀각 님 // 재밌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체크필통 님 // 글쎄요? 마법사가 되어도 구를 수 있겠죠? ㅎ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