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1 6. 나 좀 가만 내버려 둬요 =========================
서재 안은 황궁 안의 다른 모든 방들처럼 호화스러웠다. 천장에는 샹들리에, 책장은 벽지와 잘 어울리는 색의 나무인데 하나하나 모두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책장에는 고급스러운 양장의 책들과 새로 제본한 것 같은 책들, 그리고 종이뭉치들이 뒤죽박죽으로 꽂혀 있었다. 방의 주인이 직접 보는 책들인가보다. 바닥에 깔린 카펫마저도 ‘나 고급이요’라고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책상 역시도 책장과 같은 나무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두껍고 넓은 책상 위에는 온갖 서류들과 책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그리고 책상 뒤에서 서류를 보던 남자가 있었다. 황가의 특징인 검은색 머리에 흰 색의 새치가 몇 가닥 섞여 있었다. 콧수염과 턱수염에는 아직 흰 가닥이 없었다. 그리 크지 않은 체격의, 나이는 대략 40대 중반? 이 방 안에 있을 분이라면 단 한 분 밖에 없다. 형과 나는 즉각 무릎을 꿇었다.
“수사기사 에아임 로그푸스가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미천한 백성이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평민은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는 이상 황제 폐하 앞에서 이름을 말할 수 없다. 그저 백성의 한 명일 뿐이니까.
“일어서게.”
나는 대공 전하를 뵐 때보다 더 긴장하여, 일어나서 고개를 약간 숙여 황제 폐하를 직접 보지 않는 시선 각도를 유지했다.
“오랜만이군, 에아임.”
“격조하였사옵니다, 황제 폐하.”
“이런 자리에서까지 그렇게 딱딱하게 굴 건가? 좀 편히 하게.”
“그리 하겠습니다.”
곁눈질해 본 형은 고개를 들고, 몸의 힘을 약간 풀었다.
“보고서는 잘 읽어봤네. 수고 많았어.”
“아닙니다, 폐하. 모두가 황제 폐하의 큰 은덕 때문입니다.”
“그런 공치사는 됐고. 이 쪽이...?”
“네, 폐하. 제가 이번 여행길에 만나, 후견인이 되어주기로 한 기리인 모스라는 청년입니다.”
“고개를 들어라.”
“네, 폐하.”
나는 고개를 들었다. 잔뜩 긴장하여 바라본 황제 폐하의 얼굴은...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생각했다.
‘정보 확인.’
<이름 : 라고 하페르*
나이 : 48
HP : 2150
힘 : 80
민첩 : 75
지력 : 88
마나친화력 : 65
매력 : 85
지구력 : 72
특수 : 카리스마 91, 철혈 89
스킬 :
<* 중요! 이티클레 대륙의 운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 인물입니다. 이 인물에 대한 간섭 시 유의하기 바랍니다.>
<현재 이티클레 대륙의 제국의 황제입니다. 최근 후계자인 황태자와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후계자... 문제라. 마흔여덟이면... 대략 황태자가 스물에서 서른 사이이시겠구나. 알력이 있는 건가. 내가 관심을 가질 문제는 아니다. 혹시라도 황제 폐하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없게끔, 이름은 잊어버리자. 폐하께서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나를 보시다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좋군.”
“네?”
형이 단문으로 반문했다. 원래면 경을 칠 일이지만 친분이 있긴 있는 듯 황제 폐하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좋다고. 아주 잘 생겼고, 눈빛도 살아있어. 게다가 에아임 자네가 말한 대로라면 머리도 정말 좋다지 않은가. 여러모로 좋군.”
저 ‘좋다’는 말이 좀 마음에 걸리는 건 나 뿐인가. ‘좋은 재목’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냥 ‘좋다’는 건, 자신의 어느 목적에 좋다는 말 아닌가? 폐하는 잠시 나를 좀 더 바라보시다가, “거기 앉지.” 하며 옆쪽을 가리켰다. 옆쪽에는 푹신한 소파와 탁자가 있었다. 폐하께서 주장석에 앉으신 후 우리는 나란히 옆자리에 앉았다.
폐하께서 탁자 위의 종을 집어들어 가볍게 흔들자, 문이 열리고, 프그단 경이 은색의(아니, 진짜 은인가?) 카트를 하나 밀면서 들어왔다. 카트 위에는 은쟁반이 놓여 있었고, 은쟁반 위에는 도자기로 만든 주전자와 찻잔이 놓여 있었다. 프그단 경은 찻잔을 탁자에 놓고, 차를 찻잔마다 따라준 후,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들지.”
나는 형이 하는 대로, 차를 두어 모금 마시고, 함께 나온 쿠키를 하나 입에 넣었다. 차는 과일로 우려낸 차인지 정말 향긋했지만, 동시에 정말 뜨거웠다. 쿠키는 황궁의 요리사가 만들었다는 것을 자랑하기라도 하듯 정말 맛있었다. 편한 자리라면 더 달라고 하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지금은 여기서 폐하께 결례를 안 저지르고 나가기만 하면 다행인 자리니까 그런 생각은 집어치우자.
“기리인 군.”
“하명하소서, 폐하.”
“에아임 군의 보고서를 읽어보고 흥미가 있어서 불렀네.”
“황공하옵니다, 폐하.”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 기사단의 보고서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직접 물어보고 싶어서 오라 했네. 많이 놀랐지?”
“아닙니다, 폐하.”
황제 폐하께서는 껄껄 웃으며 말씀하셨다.
“너무 긴장하지 말게. 이건 학교의 시험이 아니니까. 그보다... 그래, 소설가에게 소설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가 궁금한 것을 물어보러 왔다고 생각하면 좋겠군. 편하게 대답해주게.”
그때, 형이 탁자 아래로 오른손을 뻗어 내 왼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 손길, 안심하라는 듯, 내가 있다는 듯한 손길.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폐하께서도 저리 말씀하시고, 형도 있다. 시스템, 너도 좀 도와줘.
‘띠링!’
<냉철이 발동합니다. 고급 언변이 발동합니다.>
“우선...”
폐하는 어느새 가져온 서류를 뒤적이다가, 어느 부분을 보고 말씀하셨다.
“자네가 북대공의 수하와 에아임 군 사이에서 갈등을 주재하려고 했던 일 말인데.”
“네, 폐하.”
“원래 좀 겁이 없는 편인가?”
위협으로 들릴 수도 있는 말이지만 황제 폐하의 어투는 자신이 말한 대로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어투였다. 그래서 나도 약간은 편하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사옵니다, 폐하. 황송하옵게도 이 미천한 백성은...”
“혀 꼬이겠네. 그냥 저라고 하게.”
“황공하옵니다, 폐하. 저는 겁이 많아 이것저것 따지는 것도 많사옵니다.”
“그래? 그런데 그 자리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나설 생각을 했나?”
“그것은...”
퀘스트 때문, 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 애초에 그 퀘스트 보상 때문에 나선 것도 아니었고 말이야.
“폐하, 저는 북부 영지 출신입니다. 게다가 저는 북대공의 지원을 받아 제도까지 올 수 있게 되었으며, 공에 대한 포상 명목으로 북대공에게서 금전 지원도 받았습니다.”
“무슨 공을 세웠나?”
“어, 그것이...”
결국 나는 거슬러 올라가, 나의 올해의 일대기를 전부 폐하께 말씀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마법사였고, 북부의 대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무리하게 날씨 변화 마법을 펼쳤고, 회로에 과부하가 걸려 마법을 쓰지 못하는 몸이 되었고, 마침 학교에서 나를 지도해 주셨던 은사님이 안식년이라 내 몸에 나타난 특이한 마법적 현상에 대해 연구해보고 해결책을 같이 찾아보자고 하셨고, 그래서 제도로 내려오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에아임 형을 만났다...는 긴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미 폐하와 에아임 형의 찻잔은 비어 있었다.
“허어... 자네는 이 몇 달 동안 보통 사람이 평생 걸쳐서 하기도 힘든 진귀한 경험을 몰아서 했구먼?”
“네, 폐하.”
그리고 지금 이 시간이 그 믿기 힘든 경험의 최고점인 것 같고요.
“으음... 그래, 원래 얘기로 돌아가서. 자네는 북대공에게 은혜를 입은 몸이지. 그런데 왜 북대공을 전폭적으로 돕지 않았지?”
“세 가지 이유가 있었사옵니다, 폐하.”
“세 가지 이유라?”
“네, 폐하. 첫째로는, 만약 제가 그리하였다면 북대공이 보낸 사람들에게 에아임 경과 그 수하가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옵니다. 아무리 에아임 경의 무력이 출중하다 하나, 수에는 이기지 못할 것이니까 말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파견하신 관료가 죽는 것을 그냥 지켜볼 수도 없었거니와, 저는 에아임 경이라는 사람이 당시에도 친근하게 느껴져...”
“호, 그래. 두 번째 이유는?”
“만약 북대공이 에아임 경 일행을 살인멸구한다면, 저라고 그 대상에 들어가지 않겠는가 하는 걱정에서였습니다.”
“합당한 추측이로군. 마지막 이유는?”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셔 목을 축인 후 입을 열었다.
“시바낙은 마약이고, 더군다나 채취가 극히 어렵습니다. 제가 본 광경은, 시바낙을 채취하는 사람들을 마치 노예처럼 함부로 굴리는 광경이었습니다. 제가 북대공의 편을 들면 그런 노예 농업이 계속되는 꼴이 됩니다. 양심상 그런 광경을 두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황제 폐하는 다른 말 없이 빙긋이 미소짓고 있었다.
“그럼 북대공의 반대편에 서지 않은 이유는 뭐지?”
“제 고향이고, 저를 잘 대해주신 북대공 전하에게 빚을 진 것도 있거니와... 에아임 경이 말해준 내용을 볼 때, 이번 시바낙 건을 막는다 해도 언젠가는 다른 뭔가로 북부가 이익을 취하려 하거나 영향력을 넓히려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럴 거라면 방법이 있는 지금 중간에 개입해서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폐하.”
폐하께서는, 놀랍게도, 박수를 몇 번 치셨다.
“대단해. 도저히 이제 성인이 막 된 열아홉의 청년에게서 나올 수 있는 식견이 아니군. 그 식견을 삿되이 쓰지도 않고 말이야.”
“황공하옵니다, 폐하.”
황제 폐하는 자신의 두 무릎에 손을 얹고, 몸을 우리 쪽으로 기울이며,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말인데, 기리인 군. 나를 좀 도와줄 수 있겠는가?”
============================ 작품 후기 ============================
자, 무슨 일일까요?
연참을 했는데 왜 조회수가 더 줄었을까요? ㅠㅠㅠㅠㅠㅠ
그래도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ㅠㅠ
체크필통 님 // 구르면서 기뻐하고 기뻐하며 구르는 혼연일체의 경지에... (뭐래니) 감사합니다!
상식뽀각 님 //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astarea 님 // 언제나 감사합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아직 맞을 데가 너무 많이 남았...ㅋㅋ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