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122화 (122/309)

00122 6. 나 좀 가만 내버려 둬요 =========================

“네에?”

우리 둘의 합창. 황제 폐하 앞에서 무례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 따위는 모두 잊어버렸다. 제국의, 만인지상에 계신, 황제 폐하께서! 대체, 일반인에 불과한 나를 왜? ...가만 있어봐. 아까 ‘좋군’이라고 하셨던 게 이거 때문인가? 자신의 목적에 써먹기 좋을 것 같다는?

“폐하, 송구하오나, 기리인이 능력이 뛰어나다 한들 그는 갓 성인이 된 자에 불과하며 더더구나 아직 아무런 직책도 관직도 없는 자이옵니다. 그가 어찌...”

에아임 형이 무례를 무릅쓰고 끼어들었으나, 폐하는 기분나쁘지는 않지만 단호한 얼굴로 손을 들어올렸다.

“그만, 에아임 경. 누가 도움이 되고 도움이 안 되고는 내가 결정하네.”

“전하...”

“에아임 경. 자네는 기리인 군의 후견인이 되겠다고 했었지?”

“황공하오나, 소신은 얼마 전 기리인 군과 의형제를 맺었사옵니다.”

처음으로 황제 폐하의 눈이 크게 커졌다.

“오? 그랬군. 에아임 경이 그만큼이나 기리인 군을 아끼는 줄은 내 몰랐군.”

형은 폐하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황제 폐하께서는 턱을 쓰다듬다가 말씀하셨다.

“어쨌든, 에아임 경은, 기리인 군의 후원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어떻게 드러낼 작정이었는가?”

“......”

“방법이야 뻔하지 않는가? 기리인 군을 사교계에 선보일 작정이 아니었던가? 그러면서 이 친구가 사실은 제 후견인입니다 이런 방법이었겠지? 그게 가장 정통적인 방법이니까.”

“...옳게 보셨사옵니다, 폐하.”

“그래. 기리인 군이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점이 바로 그 점이라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형을 돌아보았다. 형도 똑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형도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황제 폐하는 우리 두 사람을 보며 큭 하고 웃다가, 다시 벨을 들어 울렸다. 곧 프그단 경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폐하, 무슨 일이시옵니까?”

“방 주변에서 사람들을 물려라.”

“하오나, 폐하.”

“긴히 이 두 사람과 할 이야기가 있다. 자네도 물러나 있게.”

“...알겠사옵니다, 폐하.”

프그단 경이 나가자, 황제 폐하는 후우,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 등받이에 다소 방약무인하게 기댔다.

“보는 눈 듣는 귀가 없으니 좀 편하게 말하지. 이봐, 에아임.”

“네, 삼촌.”

삼촌?!

“그래, 좋구만. 옛날에 자네가 자네 아들만했을 때 삼촌 삼촌 하면서 쫄쫄 따라다니던 기억이 나는데, 벌써 애 아버지가 되다니. 이제는 맘편히 이렇게 앉아보는 게 얼마인지 도저히 모르겠구만.”

맘 편히 앉지도 못하시나...? 황제라는 것도 참 하기 힘든 거구나... 하긴 남의 눈 의식하며 해야 하는 일은 언제나 힘들겠지...

“기리인 군.”

“예, 폐하.”

“나는 제국의 황제다. 내가 부러운가?”

“송구하오나, 폐하를 경외하기는 하오나 부럽다고 생각하지는 않사옵니다.”

형은 ‘얘가 미쳤나’ 하는 눈길로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는 왠지, 황제 폐하가 내 저 대답을 바라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하는 흥미롭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인가?”

“송구하오나, 지금 폐하께서 눈과 귀를 의식하고 계신다는 말씀을 하셔서 그리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못 하고, 하고 싶은 행동을 못 하시는 모습을 보니, 황제 폐하께서 지고 계신 제국이라는 부담감이 어마어마하다는 생각이 들었사옵니다.”

매끄러운 언변. 내 생각대로, 폐하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기리인 군 말이 맞아. 항상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의식해야 하는 삶이란 피곤하기 짝이 없는 법이지. 그리고 그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네.”

그러더니 폐하께서는 에아임 형을 바라보았다.

“이보게, 에아임.”

“네, 삼촌.”

“내가 믿을만한 사람이 이 황궁에 몇이나 될 것 같은가?”

이런 질문에 누가 제대로 답변할 수 있을까. 제국의 권력자들을 대상으로 한 험담인데 말이다. 형은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묵묵히 황제 폐하를 바라볼 뿐이었다. 폐하는 소파에 푹 파묻힌 자세로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치르낙 대왕께서 대륙을 정복하셨던 방식이 주로 외교와 협상이었다 보니, 아무리 황제라 한들 자기 마음대로 모든 것을 할 수가 없는 것이 제국의 황제다. 에아임 자네는 알겠지. 황제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군대가 얼마나 적은지. 그걸 우리 선조들께서는 공작, 후작들이나 그 후계자를 제도에 인질로 잡아놓거나, 각 지역간의 싸움을 붙이거나 하는 식으로 해결하셨다. 나도 그렇게 해 왔고.”

황제 폐하의 말 속에서는 깊은 피로감이 묻어나왔다.

“나누어서 지배하라.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지. 한데 그런 세월이 오래 되다보니 나뉜 세력들이 서로간의 연합을 모색하고 있어. 그 경향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네. 아버님께서 추밀원의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시고 나스프 가문의 딸을 황태자비로 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좋은 예지. 지금의 황후 말일세.”

나는 형을 바라보았고, 형은 약간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이 맞다는 것을 확인해주려는 뜻이겠지.

“이미 궁내부는 나스프 공작에게 장악당한 지 오래라네. 기리인 군. 내가 눈과 귀를 조심하는 이유도 그래서이지. 궁내부만이겠는가? 에아임. 재상의 딸과 융파트 공작의 맏아들의 결혼이 추진되고 있는 건 아는가? 그나마 다행히 중부와 남부가 서로 견제하고 있으니 망정이지. 뿐만 아냐. 대신전, 그랜드 아카데미, 대도서관 사이의 대립은 유명하지. 에아임 자네도 알고 있는 것 아니었나? 그들 사이에서 기리인이 고난을 겪을까봐 후견인이 되려고 자초한 것 아니었어?”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는 소파에 푹 파묻힌 자세 그대로 허공에 한숨을 내뿜었다. 그리고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뭐지. 위화감이 느껴지는데. 생각해보자. 그러니까... 아. 내가 왜 위화감을 느꼈는지 알겠다. 그 때,

‘띠링!’

<서브 퀘스트 – 황제의 인정 #1>

<황제는 당신을 불러서,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황제의 부탁’이 사실은 명령이라는 점은 누가 봐도 명백할 것입니다. 이대로 당신이 이 명령이라는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게 된다면, 당신은 황제의 장기말이 될 뿐입니다.>

<해결책이 별로 없는 상황이지만, 당신의 언변, 의지력, 냉철과 지력의 조합은 이런 상황에서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황제에게 깊은 인상을 주십시오. 당신이 그냥 장기말로 두기에는 무서운 존재이며, 동시에 아까운 존재라는 것을 납득시키십시오. 그래서 황제가 당신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협력을 요청하게 하십시오.>

<난이도 : A>

<퀘스트 보상 : 황제 폐하가 당신을 신뢰하게 됩니다. 에아임 로그푸스의 당신에 대한 신뢰가 급격히 증가하게 됩니다. 연계 퀘스트로 이어집니다.>

간만에 보는 퀘스트창이다. 난이도가 A라... 어렵겠구나... 하지만, 이미 ‘황제 폐하와의 조용한 만남’이라는 외통수에 빠져버린 이상, 이런 곡예 말고는 방법이 없다. 내가 느낀 위화감을 토대로 이야기를 끌어나가면 될 것 같기도 하다... 좋아.

“폐하.”

“응?”

“송구하오나...”

“물어보게.”

형이 불안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물어볼 건 물어봐야겠다. 이건 무슨 깡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폐하가 나를 이용하려고 한다면, 거부는 못한다 해도 알고는 있어야지.

“식견이 모자란 미천한 백성의 발언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격식은 됐네.”

“폐하, 송구하오나 폐하께서 성혼하신 지 이미 한참 지나셨을 터입니다. 만약 황후 전하와 그 뒤에 있는 나스프 공작의 연합이 문제가 된다면, 이미 그 때부터 문제가 되었을 줄로 아뢰옵니다. 폐하께서는 혹 그간,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다른 세력들과의 대립을 유발시키시지 않으셨사옵니까? 예를 들면 융파트 공작이라거나, 대신전이라거나...”

“기리인, 너 말이...”

“그만. 에아임. 괜찮다.”

“하오나...”

“괜찮대두. 오히려 이 친구가 뭐라고 할지 궁금해지는구나. 계속 이야기해 보게, 기리인 군.”

“무례를 용서해주신 점 황공할 따름이옵니다. 폐하. 그 후로 20년이 넘게 지났다면, 황제 폐하께서 그간 각 세력간의 경쟁과 이합집산 구도를 통해 제국의 정계를 끌어오신 것이 아주 탁월한 성과를 내어오셨다고 사료되옵니다.”

약간의 아부. 폐하는 고개를 끄덕끄덕거려 긍정하셨다.

“한데 지금에 와서 그리 하지 못하는 이유가 생기신 것이온지요? 미천한 제가 알고 있기로는, 이런 구도에서 한 세력이 커지려 들면, 다른 세력들의 연합이 자연스럽게 생기기 때문에 그러기 쉽지 않다고 알고 있사옵니다. 폐하께서 저처럼 보잘것없는 미천한 백성을 불러 ‘믿을 자가 없다’는 말을 꺼내신다는 것은, 이 세력균형이 깨어질 변수, 즉 한 쪽으로 균형이 기울 변수가 생겼다는 뜻으로 해석되옵니다.”

폐하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계셨다. 무서워 죽을 것만 같았지만, ‘냉철’은 폐하가 화나지 않았다는 생각을 자꾸만 하게 했다. 기왕 내친 걸음이다.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리고 폐하께서 에아임 경에게 여쭈셨던 것, ‘황궁에 믿을만한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와 조합하면, 정말 무서운 상상을 하게 됩니다...”

“무서운 상상이라 함은?”

폐하의 눈이 이글이글거린다. 점점 위축되는 나 자신을 느낀다. 이것이 ‘카리스마’인가. 하지만 내 ‘냉철’은, 여전히, 폐하가 나에게 화나지는 않았다는 것을 느낀다. 냉정히 나 자신을 분석하며, 그리고 대륙 누구보다 뛰어날 의지력으로 나에게 가해져오는 압박을 이겨내며, 나는 언변을 동원해 혹시라도 폐하가 화낼만한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애쓰며 말을 이었다.

============================ 작품 후기 ============================

기리인이 생각하는 대로, 이미 이 시점에서 황제에게서 벗어나기 쉽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든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대화를 끌고 와야죠. 그러기 위해 무리수를 두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50 가까이 먹은데다 정치 현장에서 닳고 닳았을 황제에게 이런 식의 수작을 걸어볼 수 있는 19살이라니 존재 자체가 반칙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읽어주시는 여러분들께 그저 감사드립니다. 선추코쿠 주시는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주시는 하나하나가 저에게는 너무나 큰 힘이 됩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함정이 맞지요, 이미 말려든지 오래라 문제... 감사합니다!

eastarea 님 // 감사합니다. 이렇게 굴러야 다 경험치가 되는...

melontea 님 // 이런 와중에도 선생님과 꽁냥거릴 틈을 찾는게 진정한 나비의 자세... (뭐래니) 감사합니다!

체크필통 님 // 황제 :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기리인 : "들어올 때도 마음대로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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