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123화 (123/309)

00123 6. 나 좀 가만 내버려 둬요 =========================

“우선 폐하께서는 ‘믿을만한 정보원’에 목말라하시고 있으십니다.”

“그렇게 생각한 근거는?”

“폐하께 제가 달리 도움이 될 것이 없기 때문이옵니다, 폐하.”

어느새 황제 폐하는 아까의 푹 파묻힌 자세에서 등을 일으켜 바로 앉아 있었다.

“설명하라.”

말투마저도 온전히, 어전에서 대신들에게 명을 내리는 말투로 돌아갔다. 헹. 누가 쫄아줄 줄 알고. 누가 봐도 나보고 쫄아라는 의도가 명확한데 말야. 이 정도에 넘어가면 의지력 101이 아깝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협상이라는 건 밀고 당기기를 잘 해야 한다고. 협상을 해 본 경험은 없지만, 아카데미를 다니는 동안 수많은 여자들을 만나며 그녀들의 밀당을 깨고 내가 그녀들을 밀고 당기며 안달나게 해 본 경험은 차고 넘친다. 어떻게든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일단은 폐하를 밀어내어 보자.

“폐하께 이 미천한 백성이 어떤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겠사옵니까? 저는 이제 갓 성인이 된, 아무런 경력도 공훈도 작위도 없는 일개 평민일 뿐이옵니다. 정치를 아는 것도 아니고, 이전처럼 마법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옵니다. 이 미천한 백성에게 있는 재주라고는 그저 혀가 약간 매끄럽다는 점과 머리가 조금 빨리 돌아가는 점, 그리고 약간의 활재주 뿐이옵니다. 어찌 그런 재주가 지금처럼 많은 고민을 안고 계시는 황제 폐하께 도움이 되겠사옵니까?”

“그런데? 그대는 아직 그것이 내가 ‘정보원’을 갈구한다는 것과 어찌 연결되는지 말하지 않았다.”

압박이 되지 않는다. 편하게 말할 수 있다.

“네, 폐하. 아까 폐하께서는 에아임 경에게 ‘어차피 사교계에 선보일 작정이었다’, ‘그 점이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점이다’라고 말씀하셨사옵니다. 말씀드렸듯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이 미천한 백성을 사용하고자 하신다면, 제가 이제 막 제도에 올라왔으며, 그러기에 폐하와의 연결점이 없다는 점, 그러기에 폐하와 대립하는 어떤 세력들이라도 저를 폐하의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보셨을 거라고 생각하였사옵니다.”

폐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옳게 보았다.”

좋아. 이제는 폐하를 당길 때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저는 여기서 한 단계 더 생각해 보았사옵니다. 폐하께서 저같은 미천한 백성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저를 사교계에 보내는 것이 원래 폐하께서 바라시는 것이라면... 그리고 ‘황궁에 믿을 사람이 없다’면, 그리고 저를 폐하와 연결지을 사람이 없다면... 폐하께서는 방심하고 기대하지 않을 사람들로부터 정보를 듣는 것을 저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저라는 사람에게까지 그런 것을 기대하실 정도라면, 황제 폐하께서 신뢰하실 수 있는 정보원이 없으시다는... 결론을 얻었사옵니다.”

긴 말을 마치고 내가 한숨을 내쉬자, 폐하는 잠시 그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형을 곁눈질하자 형은 약간 당황한 눈빛으로 나와 황제 폐하를 번갈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 정도에 당황하면 ‘깊은 인상을 주라’는 퀘스트를 어떻게 깨라는 말인가.

황제 폐하는 소파의 팔걸이를 꽉 움켜쥐었다.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될 정도로 팔걸이를 움켜쥔 황제 폐하는, 잠시 후 말을 이었다.

“아까 우선, 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하옵니다, 폐하.”

“다음을 말하라.”

나는 가타부타를 말하지 않은 황제 폐하에게 고개를 숙여보인 후, 말을 이었다. 어차피, 내친 걸음이다. 이미 이 방에 끌려들어온 시점에 나에게는 다른 여지가 없다. 폐하를 격동시키고 분노시키더라도, 저 ‘퀘스트’의 문구 대로, 일단은 내가 만만치 않은, 장기말로는 아까운, 믿고 맡길 수 있는 부하라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 말할 내용은 매우 대담하고 또 황제를 분노시키기 딱 좋은 내용이다. 나는 일어나, 옆으로 나가, 무릎을 꿇었다.

“무슨 의미인가.”

“용서하소서, 폐하. 어느 명령도 따를 수 없어 이렇게 무릎을 꿇었나이다.”

언변. 언변.

“무슨 말인가. 어느 명령이라니.”

“폐하의 ‘말하라’는 명령을 듣지 않으면 황명에 불복종하는 죄를 짓게 될 것이옵니다. 그러나 폐하,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씀드리게 되면 필경 황실모독죄를 짓게 될 것이옵니다.”

“뭐라?”

“용서하소서, 폐하.”

“참으로 당돌하군...”

황제 폐하는 숨을 짧게 내쉰 후 말했다.

“허나 들어보지 않을 수 없게 말하는군. 말하라. 반역을 말하지 않는 이상 황실 모독죄로 처벌하지 않을 것이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무릎을 꿇고 있어서 형의 표정을 더 못 올려다보는 게 아쉽다. 나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채 말했다.

“폐하께서는 가장 중요한 변수를, 마치 배제하신 듯 말하지 아니하셨사옵니다.”

“가장 중요한 변수라 함은?”

“황태자 저하이옵니다, 폐하.”

황태자가 태어났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탄생일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었지만, 황태자 책봉일이 제국 전역에 임시 공휴일로 지정되어, 학교를 안 가고 놀았던 기억이 있으니까. 그게 대충 8~9년 전이다. 그 때 황태자 폐하가 열다섯인가 열여섯인가 그랬으니까 지금은 대략 스물셋에서 스물다섯. 성인이 된 지도 오래이고, 통치 수업도 어지간히 다 받아서 이제 실무를 보고 계실 나이이겠지.

“황태자를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역시, 언급 자체를 불쾌해하시는군.

“정치를 모르는 미천한 백성이오나, 어디까지나 저의 미천한 추론이옵니다. 황태자 저하가 정치세력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말씀하시기로 작금의 황후 전하는 나스프 공작가에서 왔다고 말씀하셨었지요.”

“계속 말하라.”

“그렇다면 만약, 황태자 전하께서 나스프 공작가로 대표되는 세력과 친하다면, 황제 폐하께서 고심하시면서 유지해 오신 세력간의 균형은 진작에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황태자 전하는 적어도 중립, 혹은 다른 세력에 기울어져 있다...고 보았습니다.”

살짝 고개를 들어보니 폐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계셨다. 나는 약간 안도하며 말을 이었다.

“한데 이 상황에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온지?”

“무슨 뜻인가.”

“황태자 저하와의 관계에 변화가 있진 않으시옵니까?”

빙고! 황제 폐하는 입을 꽉 다물었다. 인정하기 싫은 사실, 말하고 싶지 않은 사실 앞에 입을 다무는 전형적인 반응. 이를 꽉 깨무는지 양 턱 옆의 살이 볼록하게 올라왔다.

“불쾌하셨다면 용서하소서. 허나, 적어도 10년 이상 고착화된 조직들 간의 세력 균형에 변화가 있을 정도의 충격은 그런 것밖에 떠오르지 않사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황제 폐하께서 정보를 알고 싶어하나, 알만한 곳이 없어 저라는 미천한 백성에게도 묻고자 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사옵니다. 그래서 말씀이온데, 황제 폐하. 혹시 황태자 저하께서 결혼 문제와 관련하여 고집을 부리고 계신 것은 아니온지요? 어느 한 세력 쪽으로 균형추를 기울게 할 수 있는 상대와 결혼하겠다고 고집하고, 그로 인해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저하 사이가 틀어졌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누구에게 들었는가.”

“듣지 못했사옵니다. 미천한 백성은 어제 제도에 들어와, 에아임 경의 집에 투숙하였고, 오늘 아침 그와 함께 제국 수사기사단 본부에 갔다가 바로 황궁에 들어왔사옵니다.”

“그럼 어떻게 황태자와 결혼 문제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가.”

“폐하께서 사교계를 언급하셨기 때문이옵니다. 사교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소문이라면 남녀간의 가십이겠지요. 그와 관련된 헛소문들도 돌 것이고요. 사교계의 가십 중에 혹 황태자의 상대에 대해, 혹은 그 배후에 대해 도는 소문이 있는지 알고 싶으신 것이라 생각하였사옵니다.”

“허어...”

황제 폐하는 길게 한숨을 내뿜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이보게, 에아임.”

“네, 삼촌.”

“자네 참 대단한 물건을 주워왔군그래.”

“황공하옵니다.”

좋아. 이 정도면 꽤 인상을 준 것 같은데... 어라? 퀘스트 완료가 안 뜬다? 아직도 남아있는 사실이 있다는 것인가? 그러면 대체 뭘까. 황태자와 황제를 갈라놓으려는 세력이 있다. 그 상황을 알아챈 것만으로는 황제 폐하에게 큰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다. 그것은... 그보다 더 깊은 상황이 있다는... 그래. 내가 ‘무서운 상상’이라고 한 거 말이지... 그게 진짜인 건가?

“폐하.”

“아직 더 이야기할 것이 있는겐가? 말해보게.”

“송구하오나... 이조차도 폐하의 진정한 관심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드옵니다.”

“그렇다면?”

“폐하와 황태자 저하의 분열을 획책한 세력이 있다, 그 세력은 그를 통해 이득을 얻으려 한다... 하지만 폐하, 처음 얘기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한 세력이 유달리 강해지게 되면 다른 모든 세력들이 일치단결하게 됩니다. 그러나 황태자 저하의 움직임은 이 ‘유달리 강해지는’이라는 수식어만으로도 모자랄 것입니다. 머나먼 미래의 일이오나 황제 폐하께서 붕어하셨을 경우 황태자 저하의 최측근이 될 수 있을 것이니까요.”

“그래. 그렇지. 열아홉 살 짜리도 아는 것을...”

“그 일이 실제로 벌어진 후에는 되돌릴 수 없을 것이옵니다. 그러니 그 전에 행동에 나서야겠다고 생각한 세력이 있겠지요. 어느 세력인지까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행동이라 함은?”

황제 폐하는 나를 시험하듯 물었다. 나는 말라가는 입안을 느끼며, 말했다.

“황태자 저하에 대한 살해 협박장 같은 것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까?”

흠칫. 황제 폐하는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 당신의 그 반응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지. 그리고,

‘띠링!’

<서브 퀘스트 완료 – 황제의 인정 #1>

<과감한 추론이 다행히 적중해 황제를 크게 놀라게 했습니다.>

<축하합니다. 황제를 화나게 하지 않으면서 황제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데 성공했습니다.>

<황제가 당신을 크게 신뢰하기 시작합니다.>

<잠시 후 이어질 연계 퀘스트를 기다리세요.>

그럼 그렇지.

============================ 작품 후기 ============================

넓게 보면 이것도 추리의 영역이죠.

다아시 경 시리즈가 말년에는 첩보원 물로 변신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후에 한 편 더 쓸 수 있다면 자정 연재전에 한 편 더 올리려고 노력해보겠습니다.

읽어주시고 선추코쿠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응원이 제게 정말로 큰 힘이 됩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사실 기리인의 무력도 꽤 강한 편입니다. 게다가 이제 점점 더 강해질 테지요. 단지 아직까지 그걸 쓸 상황이 나오지 않아서... 나중에는 지겹게 전투할 때도 오지 않을까요? 감사합니다!

eastarea 님 // 그러게요 게임 플레이하는 사람 머리 쥐어뜯고 있을것 같아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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