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124화 (124/309)

00124 6. 나 좀 가만 내버려 둬요 =========================

“자네...”

황제 폐하는 한참이나 말이 없으셨다.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살짝 고개를 들어 형을 돌아보았더니, 형도 마찬가지 표정이었다. 형 역시도 멍하니 나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나는 무릎을 계속 꿇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황제 폐하 앞에서 일어나라 하기 전에 일어나는 건 불경죄이니까. 뭐... 이미 불경죄는 지을 대로 지은 것 같지만.

“정말 열아홉 살이 맞는 건가...? 혹시 고대에 사라진 신의 현신이라도 된다거나...?”

그렇게 중얼거리던 황제 폐하는 나를 보더니, “일어서게.” 라고 하셨다. 나는 약간은 저린 다리를 부여잡고 천천히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그것도 추론인가...?”

“네, 폐하. 그저, 폐하께서 미천한 백성인 저에게 도움을 요청하시는 상황이 이상하다 생각하여...”

“거기에서 여기까지 짚어내었다 이건가... 대단하군. 이봐, 에아임.”

“네, 폐하.”

“볼수록 물건이군. 이 친구 한 자리 주고 싶은데.”

“소신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사옵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헛기침을 하시더니, 덥석, 내 손을 잡으셨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폐하...”

“간만에 속이 시원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던 것인데, 내가 얘기하기도 전에 모든 것을 알아채다니. 혼자서 하던 고민을 덜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는 곳에서 올 줄이야. 신이여, 감사합니다. 기리인, 고맙다. 정말 고마워.”

“화, 황공하옵니다, 폐하. 신민 된 자로서 당연한 도리를 다했을 따름이옵니다.”

“아니야, 아니야. 지난 한 달 동안 혼자 속만 끓었던 문제에 드디어 이렇게 의논할 수 있는 상대가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자네는 지금 이 황궁에 있는 모든 신료보다 큰 공을 세운 거야.”

잡은 내 손을 다독이는 황제 폐하 앞에서 나는 아까의 패기는 어디로 가고 몸둘 바를 몰라하고 있었다.

“과분한 칭찬이시옵니다, 폐하.”

“허허. 아까 나를 그렇게 몰아붙이던 청년은 어딜 갔나?”

웃으면서 그제야 내 손을 놓아주시는 폐하. 그러게요. 그 청년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나는 어색하게 머리만 긁을 뿐이었다. 황제 폐하는 바로 앉으며 말했다.

“기리인 군이 추론한 것이 모두 사실이야. 아들놈은 작년쯤부터 뫼르말 백작가의 여식에게 빠져버렸지.”

“뫼르말 백작가라면, 대륙 동해안을 따라 있는 독립 백작가이긴 하군요. 문제는 그 중에 남쪽에 있고, 나스프 남공작과의 연계가 없을 리 없다는 점이군요.”

“그래. 그거야. 어떤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뫼르말의 여식이 황태자를 단단히 홀려버린 것 같단 말일세. 황태자는 내 말을 잔소리로 치부할 뿐이고, 황후는 애초에 이 문제를 상의하기 적합한 사람이 아니고, 황궁 내에는 맘놓고 이야기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황후가 궁내부를 나스프 공작의 사람들 위주로 채운 마당에 황태자비까지 그 쪽의 사람이 들어오면 정계는 남부 출신들이 장악하게 될 게 뻔한데, 아들놈은 눈이 멀어서...”

황제 폐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셨다. 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그럼 살해 협박은...”

“아.”

황제 폐하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서랍 앞으로 가 서랍을 열고는, 안에서 편지 봉투 하나를 꺼냈다.

“이 투서가 어느 날 황궁으로 배달되었네. 융파트 공작의 이름으로 배달되었지만, 당연히 그거야 믿을 수 없는 노릇이지. 다행히 병자와 동침하지도, 독극물에 담그지도 않은 보통의 서신이었어. 열어봐도 좋네.”

그러면서 그 서신을 형과 나에게 건네셨다. 우리 둘은 머리를 맞대고 그 서신을 펼쳐보았다. 온갖 종류의 책에서 오려낸 글자들이 덕지덕지 붙어 조합되어 있는, 삐뚤빼뚤하여 오히려 생경한 느낌마저 주고 있는 그런 서신이었다.

<황제 폐하 전상서.

근래 황태자와 뫼르말 백작의 여식의 국혼이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였소. 이는 제국의 정계에 폭거로 작용하리라 믿소. 이에 본 단체는 이 국혼의 추진이 중단되지 않을 경우 황태자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경고를 하고자 하오.>

“단체의 이름이 없군요? 마법적인 조사는 하셨습니까?”

“하긴 했지. 당연히 결과는 안 나왔고.”

폐하는 아까 앉았던 소파 자리에 주저앉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갑자기 몇 년은 더 늙어보이시는 것만 같았다.

“이보게, 기리인 군.”

“네, 폐하. 하명하소서.”

“자네가 이 정도로 날카로운 통찰력을 발휘했으니, 내 자네에게 터놓고 이야기하지. 도와주게. 나는 지금 달리 부탁할 사람이 없어.”

아아... 피할 수가 없다. 나는 그저 조용히, 형의 집에서 지내며, 선생님을 만나서, 내 몸에 일어난 이상현상을 연구하고, 다시 마법을 되찾을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을 따름인데. ‘황제 폐하의 부탁’이라니. 이걸 거절할 수 있는 이가 대륙에 몇이나 될까.

“하명하소서.”

“하명이 아니라 부탁이야. 들어주게. 지금 내 앞에 자네가 나타났다는 건 자네가 천칭의 트리클께서 나와 우리 황가를 위해 예비한 인물이라는 뜻임에 틀림없네.”

아, 폐하. 그건 너무 과하십니다.

“부탁이라 하심은...”

“에아임.”

“네, 삼촌.”

“아까도 말했지만, 자네도 기리인을 사교계에 소개시키고, 자네가 후견인이라는 점을 알리려고 했었지?”

“그렇사옵니다. 아울러 소신의 의형제라는 사실도 밝히면 기리인이 혹 알력다툼에서 희생되는 일이 줄어들까 하여.”

“그걸 좀 더 큰 규모로 해 주지.”

“네?”

황제 폐하는 나를 보며, 가볍게 웃으셨다. 아. 이 분 어릴 적에는 에아임 형 만큼이나 장난기가 많았겠다. 근엄한 표정 속에 숨은 저 장난기어린 미소.

“사교계의 신성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거야.”

“폐, 폐하...”

“우선 내일 아침 어전 회의에 두 사람 모두 참석하게. 원칙적으로는 기리인 군의 공훈은 대놓고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북부와 중부의 대립이 있었다는 것을 대놓고 말하는 꼴이니까. 하지만 포상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결코 없는 공훈이지. 자네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푸른 산맥 서쪽은 북부, 중부, 남부, 동부가 아수라장이 되어 전쟁이 시작되었을 걸세. 그 점만으로도 나는 자네에게 감사해야 하겠지. 에아임.”

“네.”

“오늘 집에 가기 전에, 이 친구에게 예복을 맞춰주게.”

“예복이라 하심은...”

“검은색의 망토가 필요할 것이야.”

형은 두 눈을 부릅떴다. 검은 색의 망토? 그게 뭐길래?

“정식 서임은 아니겠지요?”

“암. 명예 서임이지. 그래도, 후견인이 자네라는 사실을 좀 더 널리 알릴 수 있겠지.”

“확실히 그러하군요. 여러 번거로운 일도 줄일 수 있고, 신분도 상승하는 결과이니까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보고 있는 나를 향해 형이 설명했다.

“검은색의 망토는 황실 친위기사단의 상징이다. 황제 폐하께서는 너에게 명예 기사의 위(位)를 서임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네에?!”

그야말로 경악해버렸다. 내가? 기리인 모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몸이 병약해 한두 달에 한 번씩 앓아누웠던 내가? 황실 친위기사단의 명예 기사라고? 기사?!

“황실 친위기사단의 단장은 전통적으로 로그푸스 변경백가의 가주가 겸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변경백가의 아들들은 모두 친위기사단에서 검술을 수련하고, 나처럼 수사기사단에 들어가더라도 친위기사단에서 무예를 수련하고 명예 기사직을 받았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그러니 너에게 명예 기사직이 주어진다는 건, 그리고 그 수여식에 내가 참석한다는 건, 크고 작은 귀족가에게 ‘내가 너를 친동생처럼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가장 화려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다.”

형의 설명. 납득은 된다. 납득은 되는데... 내가 기사라니.

“걱정하지 마라. 명예 기사는 그냥 명예직일 뿐이야. 기사단에 복무하지 않아도 된다. 설령 네가 나중에 마법을 되찾아 마법사가 되더라도 아무 문제 없을 거야. 5대 마탑이나 그랜드 아카데미의 마법사들 가운데도 명예 기사 직위를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요...

“아. 기리인. 그거 아냐?”

갑자기 형의 말투가 장난스러워졌다.

“뭐, 뭐요?”

“각 영지의 기사단과는 달리 황실 기사단의 기사는 한 등급 올려 쳐 준다. 그러니까, 황실 기사단 기사는 ‘경(sir)’이라는 경칭이 붙게 되지.”

“네에?”

“너도 이제 기리인 경이라고 불릴 거라고.”

대체 일이 어디까지 가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제도에서의 삶이 결코 평안하거나 조용하거나, 내가 원하는 연구만 하거나, 선생님과 조용히 지내거나 하는 건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니... 저...”

“걱정하지 말게, 기리인 경. 내 보장하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훨씬 유익할 걸세, 기사 직은.”

아아... 그게 아니고 너무 비현실적이란 말씀이죠... 제가 오늘 형네 집에 가서 뢰다와 누나에게 말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아침에는 평민이었는데 작위를 얻어 돌아왔다고. 이게 무슨 비현실적인 말이냐고요. 물론 이런 말을 황제 폐하의 앞에서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아까 기리인 경, 자네가 말했었지? 활을 좀 쏜다고?”

“아아... 미천한 재주일 따름입니다.”

“자네에게 물어봐야 겸양의 말만 할 테고. 에아임, 이 친구 활은 어떤가?”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겁니다.”

“형...!”

“그거 잘 됐군. 내일 오후에는 티타임을 겸해 황실 궁도장에서 여흥을 갖도록 하겠다. 기리인 경은 내일 황궁에 출두할 때 활과 화살을 가지고 오도록.”

아아... 황명이다. 거부할 수 없는 황명이다.

“분부대로 하겠사옵니다, 폐하.”

황제 폐하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러더니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되면... 기리인 경은 정말 화제의 중심이 되는 인물이 되는 거지. 원래는 마법사였고,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마법을 버렸고, 마법을 찾고자 하는 일념으로 몸을 단련하고 활을 연습하여 제도로 내려왔고, 제국의 명문가의 아들이자 2급 수사기사와 형제의 연을 맺는가 하면, 평민 신분으로 귀족간의 갈등을 중재하고 마약류의 정화에 크게 기여하는 공을 세우고, 또 자유무역도시 레카의 남북간의 대립이 내분으로 터지지 않게끔 기여하고... 그래서 제도로 와서는 하루아침에 하급이나마 귀족이 되고. 어떤 인물인가 봤더니 자주 보기 힘든 훤칠한 미남이란 말이지. 레이디들에게 인기가 없으면 이상하겠지. 안 그런가, 에아임?”

“맞습니다, 삼촌. 개인적으로 이 친구를 사교계에 데뷔시켰을 때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하아...

============================ 작품 후기 ============================

밤에 한 편 더 올리겠습니다.

챕터 제목이 많은 것을 말해주는 챕터가 아닌가 합니다.

연참 말고, 어떻게 하면 인기도를 더 끌어올릴 수 있을까요?

혹 좋은 방법 있으시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읽어주시고 선추코쿠 주시는 독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글쟁이의 힘의 원천입니다.

eastarea 님 // 그럼요. 치정, 모략, 정쟁이죠. 감사합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네. 이미 황궁에서 두 사람을 불렀을 때부터 이 결말이 예정되어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굴러라 기리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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