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6 6. 나 좀 가만 내버려 둬요 =========================
“와...”
제도에 와서 몇 번이나 놀라는지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제도의 상점가는 북부 대요새의 상점가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나름 미틱 시와 레카 시라는 교역도시 두 군데의 상점가를 보고 오는 길인데도, 그것들과도 차원이 달랐다.
적어도 5층 이상의 높은 건물들이 가로세로로 격자처럼 배열된 길을 따라 쭉 늘어서 있었다. ‘장인들이 모인 거리’라는 말 답게 이곳은 옷을 만드는 장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러다보니 가게마다 전문 분야가 나뉘는 모양이었다. 모험복, 군복, 학생복, 평상복, 여성용 드레스... 그리고 수선전문 가게도 있고, 이런 가게들에 물건을 대주는 실, 옷감 등의 도매상도 있는 모양이었다.
형은 내 손을 잡아끌고는 약간 떨어진 곳에 있던 ‘그누스 맞춤예복’이라는 가게로 들어갔다. 3층짜리 건물의 1층으로 들어서자, 마력석 등으로 밝혀졌음에도 어째 약간 어두워 보이는 가게가 나타났다. 얼굴이 각지게 생긴, 머리숱이 많은 아저씨가 웃통을 벗은 채 러닝셔츠 차림으로, 안경을 쓴 채 줄자를 들고 천 위에 엎드려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세... 어라, 에아임?”
“반가워요, 그누스 아저씨.”
“이야, 몇 년만인가요 이게? 반갑군요. 옷 맞추러 왔나요?”
“네. 하지만 제가 아니고 이 친구요.”
그누스라는 분은 나를 돌아보았다.
“흐음... 체격도 탄탄하고, 옷빨 살겠네. 무엇보다 얼굴이 잘 생겨서 옷이 얼굴빨을 받겠는걸? 그래, 어떤 옷이 필요하죠? 우리 가게는 예복 전문인데?”
“네. 내일 아침에 어전 회의에 나가야 해요.”
“이 친구가?”
“네. 황제 폐하께서 검은 망토가 필요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누스의 안색이 변했다. 휘유~ 하고 휘파람을 한 번 불어제낀 그누스는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에아임, 이 친구, 아무리 봐도 스물 남짓인 거 같은데, 맞아요?”
“맞습니다. 올해 갓 성인이 된 친구입니다.”
“그런 친구가 어전에서 기사 서임을 받는다고? 와... 거물이네?”
“내일 아침에 꼭 필요합니다. 부탁드립니다.”
“걱정 말아요. 마침 지금 다른 일이 없으니까. 어이! 다 나와봐!”
그누스 씨가 부르자, 각종 천이 걸려있던 가게 뒷문이 열리며 중년의 여성분 한 분과 그누스씨와 닮은 여자 두 명이 얼굴을 내밀었다. 아내와 딸인가.
“오늘 밤까지 여기 이 잘생긴 청년이 입을 예복을 만들어야 해. 황실에 들어가야 하니까, 다른 일 모두 멈추고 이것부터 하자고.”
“알겠어요. 마침 잘 됐네. 한가할 때인데. 저기, 이름이?”
“기리인 모스라고 합니다.”
“그래요, 기리인 씨. 벗어요.”
“네에?”
“몸의 길이를 재야 할 거 아녜요. 속옷만 남기고 겉옷은 벗으라구요. 뭐해요, 남자잖아요. 속옷바람이 뭐가 부끄럽다고.”
으아. 중년 아줌마들은 이래서 너무 무서워. 나는 조금만 지체했다가는 그 아줌마에게 옷이 벗겨지는 치욕스러운 경험을 하게 될 것 같아서 얼른 스스로 옷을 벗었다. 딸들이 우와~ 하고 짧게 환성을 터트리고, 한쪽에서 옷감을 뒤적거리던 그누스 씨도 이쪽을 건너다보고는 말했다.
“허이구, 저 친구, 벗겨놓으니 더 보기 좋은데?”
농담은 참으시죠...
곧 그들은 내 몸을 줄자로 친친 감아버릴 기세로 내 온 몸의 수치를 재기 시작했다. 한 딸이 자그마한 노트를 들고 옆에서 불러주는 수치를 기록하고, 다른 딸이 엄마를 도와 줄자 끝을 다른 곳에 대어준다거나 하면, 엄마가 내 몸에 줄자를 대고 수치를 기록하는 식이었다. 오른팔, 왼팔, 어깨너비, 가슴둘레, 배둘레, 엉덩이 둘레, 팔꿈치에서 손목까지의 거리, 손의 크기, 다리의 길이... 심지어는 재는 걸 구실삼아 내 물건도 툭툭 쳤다.
“으어!”
“아아, 움직이지 말아요. 닳는 것도 아니고 왜 그래 남자가? 거기 길이도 재야 해요 원래대로면. 그걸 안 하는 걸 다행으로 알아요.”
아닌게 아니라 진짜 그래야 할 판이었다. 목 둘레와 머리둘레까지 재어본 그들은, 이어 그누스 씨가 가져온 온갖 천을 내 몸에 대보기 시작했다.
“이 친구 머리 색깔이랑 어울리려면 이 색깔이 좋지 않나?”
“그것도 그런데, 그거보다는 약간 톤이 어두워야...”
“그 천은 예복 만들어놓으면 생각보다 별로 안 예뻐서...”
나를 마치 조각상의 모델이 된 것처럼 방 한가운데 세워둔 그들은 계속 천을 대어보며 이런저런 논의를 하고 있었다. 지루해진 나는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옷감들 사이로, 환기를 위해 만들어진 창문이 하나 있었다. 그 창 바깥으로는 이 가게와 비슷한 가게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창 밖으로, 갑자기,
내가 아는 사람이 지나갔다.
누구지.
아는 사람인데.
머리에 앞서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두근. 두근. 두근.
누구지. 누구...!
“잠시만요!”
옷을 입을 틈도 없다. 놓칠지도 모른다. 나는 그노스 씨와 부인 사이로 빠져나왔다.
“이봐, 어디 가!”
“잠시만요! 금방, 금방 올게요!”
한 쪽 벽에 걸려있던, 이런 상황에서 걸치라고 만들어진 것 같은 가운에 가까운 로브를 대충 끼워입으며 나는 가게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아까 그 창문이 있던 위치로 갔다. 어디, 어디지? 어디로...! 아, 저기 있다. 스무 걸음쯤 앞에.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보통의 키. 길쭉길쭉한 팔다리. 로브로도 다 가려지지 않는 탄탄하고 풍성한 몸매. 금발의, 뒤로 묶어 말꼬리처럼 찰랑거리는 생머리.
그리고, 지나간 길을 표시해주듯, 진하게 남은, 그 향기.
“선생님!”
나는 앞을 향해 외친다.
골목길에 있던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내 목소리에 나를 돌아본다. 그리고,
저 앞에 있던 금발의 포니테일이 움직인다. 뒤를 돌아본다. 아아. 익숙한 얼굴. 그 큰 눈이, 선한 눈매가 격한 놀라움으로 더 이상 크게 떠질 수 없을 정도로 떠져 있다.
“기리인...?”
“선생님!”
더 이상 주체할 수 없는 마음에 나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스무 걸음이 한 달음인양 나는 앞으로 달려가, 선생님을 꼭 끌어안았다.
“선생님!”
“기리인!”
아아. 선생님이 나를 마주안아온다. 그 날, 마지막 날 입맞춤을 해 주며 용기를 불어넣어주던 날, 내 기억속에 잔뜩 남겨두고 간 그 진하디 진한 선생님의 향기. 그 향기가 다시 내 온 몸을 감싼다.
“편지는 받았는데... 어떻게 여기에...”
“선생님...”
“정말 왔구나... 기리인...”
선생님이 내 등을 토닥인다.
“고생 많았어. 힘들었지?”
“아니에요...”
선생님은 다 안다는 듯 내 등을 한 번 더 토닥여 주고는, 나를 놓았다. 어색할세라 내가 서둘러 선생님을 놓자, 선생님은 웃으며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내 옷차림을 보고 잠시 놀랐다.
“에? 왜 로브 차림이야?”
“아... 예복 맞추러 왔다가, 선생님이 창문 밖으로 지나가길래 황급히 뛰어오느라... 선생님은 여기 웬일이세요?”
“저기 너머가 그랜드 아카데미거든.”
선생님은 가던 방향쪽을 가리켰다. 그러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고, 너 옷 맞추던 가게로 다시 가자.”
“네. 소개해 드릴 분이 한 분 계세요. 제 친형 같은 분이에요.”
“친형? 너 외동아들이었잖아. 아니, 친형 같은 분이라고? 이상한 사람하고 얽힌 거 아니지?”
하이고, 누가 선생님 아니랄까봐.
“좋은 분이에요. 일단 가시죠.”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까 내가 나간 자세 그대로 서 있던 네 사람은 나를 보고 뭐라 말하려다, 내 등 뒤에 서 있는 선생님을 발견하고는 눈이 커졌다.
“이야, 이거, 이런 미인은 또 처음이네. 어쩐지 저 친구가 뛰쳐나가더라니.”
“어머, 세상에, 저 피부 좀 봐. 어쩜 저렇게 잡티 하나 없지?”
“저 길이에 저 가슴이나 골반은 반칙 아닌가...?”
가만히 놔두면 끝없이 품평해 댈 것 같아서, 나는 한 쪽 테이블에 앉아 나는 모른다는 자세로 차를 마시고 있다가, 내가 웬 여성을 데리고 들어오자 놀라 일어선 에아임 형 쪽으로 선생님을 끌고 갔다. 예법대로, 아무리 귀족이라도, 레이디에게 남자의 소개를 먼저.
“선생님, 소개할게요. 이 분은 에아임 로그푸스 씨. 제국 2급 수사기사이시고, 저와는 의형제를 맺기로 하신 분이세요. 지금 저는 제도에서 이 분 댁에 묵고 있어요. 형, 이 분은 요안나 이스카 씨에요. 제 마법 선생님이시고, 그때 제가 보여드렸던 편지의 주인공이시죠.”
“아...! 이 분이... 처음 뵙겠습니다. 에아임 로그푸스라고 합니다.”
“요안나 이스카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두 사람은 가볍게 손을 맞잡고 악수를 했다.
“기리인이 선생님 얘기를 몇 번 하던데, 이야,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군요.”
“초면에 과찬이세요, 에아임 씨. 그보다 감사드리고 싶군요. 우리 기리인의 여행길을 잘 돌봐주시고 의형제가 되어 제도에서까지 보호해 주신다고 하시니, 제자를 둔 스승으로서 정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아닙니다. 선생님이 이 친구를 아끼시듯 저도 기리인이라는 동생을 아끼기 때문에 그리 할 뿐입니다.”
그 때, 그누스 씨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려왔다.
“이봐, 기리인 군?”
“네, 네?”
“오늘 밤늦게, 아니면 밤을 새워서 내일 새벽에라도 이 옷을 완성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당신이 거기 서 있으면 작업이 진행이 안 되겠죠?”
“네...”
상황을 본 에아임 형이 피식 웃으며, “이 쪽으로 오시죠.” 하고 요안나 선생님을 자신이 앉아 있던 테이블로 데려가 차를 따라주는 동안, 그누스 씨는 나를 질질 끌고 가서, “벗어요!”라고 말하며 내가 입고 있던 로브를 거칠게 벗겨내었다. 으윽. 꺄악! 하고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다.
============================ 작품 후기 ============================
당분간 야간연재는 연참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집중하기 위해 빗소리 화이트 노이즈를 틀어놓으니 걱정보다는 잘 써지네요.
과연 이 페이스를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걱정입니다.;;
이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제 힘입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조언 정말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달려보겠습니다.
eastarea 님 // 조언 감사합니다. 비축분 쌓을 여력까지는 없지 싶고... 일단 열심히 써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sudhwucs 님 // 요안나가 재등장했는데... 연상녀라 별로 안 좋아들 하시려나요...? 걱정이... 조언 감사합니다.
급급여율령 님 // 어... 아쉽게도 저는 아는 작가가 딱히 없어서... 조언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