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7 6. 나 좀 가만 내버려 둬요 =========================
“안식년을 맞으셨다고요?”
“네, 제도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북부 아카데미의 교사로 바로 취직해서, 이제 5년이 지났거든요.”
“이 조합이 제일 나은 거 같지 않아요? 완전히 검은색보다는...”
“이러면 하얀 셔츠를 입혀야 하나?”
“그랬군요. 연구 주제는... 기리인에 대한 것이라고 하셨죠?”
“네, 혹시 에아임 씨는 우리 기리인의 몸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세요?”
“셔츠를 미리 가봉해보자. 거기 내가 아까 자르던 거 가져와봐.”
“아얏!”
“이봐요, 기리인 씨. 어깨 좀 더 펴세요. 남자가 핀에 좀 찔릴 수도 있지...”
“확실히 전례가 없는 일이죠. 연구도 어렵겠지만, 요안나 씨가 원래 하려던 주제를 포기하게 되는 것 아닌가요?”
“실은 그래요. 하지만 어찌 보면, 대륙 마법계에 단 한 번도 없었던 현상을, 선점해서 연구하는 거잖아요? 게다가 대상이 다른 사람이 아니고 제 애제자이기도 하고요.”
“어깨! 어깨!”
“됐다. 어디 보자...”
“기리인을 댁에서 지내게 해 주셨다고요...”
“형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다행히 저희 집에 손님용 독채가 하나 있어서, 그걸 내 주었습니다.”
“사실 저도 걱정이 많았거든요. 제도의 방 값이 만만치 않으니까... 저도 지금 좁은 방에서 혼자 지내는 중이라, 방에 들일 수도 없고...”
“어머나... 역시 옷 태가... 이봐요, 에아임 씨, 그리고 여자분. 이리 와서 봐요.”
“이야, 기리인. 역시 얼굴이 받쳐주니까 핀으로 집은 셔츠만 입고도 분위기가 살아나는구나.”
“어머... 기리인, 멋지다. 맨날 로브만 입은 모습 보다가 이런 차림은 처음 보네? 그런데 예복이 왜 필요한 거야?”
“사실은 선생님, 내일... 아얏!”
“아, 진짜, 몸 움직이면 옷핀에 찔리잖아요!”
“기리인, 더 움직이다가는 혼나겠다. 내가 대신 설명드릴게. 기리인은 내일 어전에 출두해야 합니다.”
“네? 뭐... 무슨 잘못이라도...?”
“네? 하하. 아뇨, 아뇨. 만약 기리인이 잘못을 했다면 그리 갈 이유가 없고, 그 전에 수사기사인 제가 그를 데려가야겠지요. 기리인은 상을 받으러 가는 겁니다.”
“상이라고 하셨어요? 황제 폐하께서 주재하시는 어전에? 상을?”
“자, 그럼 셔츠는 됐고... 옷핀자리 조심해. 분필로 표시해두고.”
“그 다음에는... 망토. 그래, 망토를 맞춰보자. 여보, 저 안에 망토용 검은 천 좀.”
“황실기사단 거 말인가요? 어머나... 이렇게 젊은 사람이?”
“황실 기사단이라고요? 우리 기리인이요? 기사요? 그러고 보니까... 기리인, 너 몸이 그동안 엄청 좋아졌네? 정말 그 길로 나가는 거니?”
“그건 아니구요...”
“명예 기사직을 서임받게 되었습니다.”
“명예 기사직이요? 황실 기사단의? 그럼... 기리인 ‘경’이 되는 거에요?”
“황실 기사단 예식 망토가... 왼쪽 어깨죠? 길이는 무릎까지고?”
“오른쪽 어깨에 죔쇠, 어, 일단 대보기만 하자. 갑옷을 입고 입어야 하는 경우도 있어서, 죔쇠를 딱 맞게 하면 안 돼. 끈이 있어야 해.”
“기리인 ‘경’이라니... 세상에, 대체 어떤 일을 했길래? 기리인, 너 무슨 짓을 하면서 내려온거니?”
“그게요... 으윽!”
“아 진짜, 목에 천 두르고 있는데 움직이면 어떻게 해요! 목 졸리잖아요! 가만히 좀 있어요!”
“혹시 지금 시간이 있으신지?”
“점심 식사 때문에 그러시죠? 약속은 없어요. 사실 지금도 연구실에 나가야 하지만, 연구 대상을 만난 거니까 오후까지는 괜찮을 거 같아요.”
“그럼 기리인 가봉이 곧 끝날 거 같으니, 식사를 같이 하시면 어떨까요? 기리인도 그걸 원할 것 같은데요. 그렇지, 기리인? 내 말 맞으면 눈 두 번 깜빡여 봐.”
깜빡, 깜빡.
“그래. 어디를 갈까... 요안나 씨는 제도 경험이 있으시죠? 혹시 가시고 싶은 식당이 있습니까?”
“제가 지금 먹고 싶은 것은 없지만, 기리인에게 맛보여 주고 싶은 건 있어요. 우르송에 가 보신 적 있으신가요?”
“우르송! 좋지요. 우르송의 스테이크와 야채 수플레는 제도에서 꼭 먹어봐야 할 음식이죠.”
“자, 됐다. 망토는 이렇게 만들어 질 겁니다. 여기에 장식만 좀 하구요.”
“캬... 멋지네. 기리인, 어때?”
“불편해요...”
“원래 예복이 그런 거야. 아, 그누스 아저씨. 이 친구 내일 오후에는 황실 티파티에 참석해야 해요. 그리고 내일이나 모레쯤부터 사교계에 다녀야 할 것 같고요.”
“허어... 간만에 제도 사교계에 신성이 출현하겠군요.”
“그래서, 티파티에 입을 수 있는 준예복 한 벌하고, 무도회용 예복 한 벌 추가로 맞춰 주세요. 그건 제가 내죠.”
“알았어요. 예복 한 벌하고 준예복 한 벌은 지금부터 작업해서 오늘 밤에 가져다 드리죠. 에아임 씨 댁으로 배달해 드리면 되죠? 그리고 무도회용 예복은 하루 정도 늦어도 상관없고?”
“네. 잘 좀 부탁드립니다.”
“아이구, 뭐 얼굴이 워낙 먹어주니 옷이 오히려 얼굴 때문에 살아나겠는걸요 뭐. 이런 사람들한테는 너무 화려한 옷 입히면 안 돼요. 오히려 얼굴을 살려주게끔 플레인한 옷을 입어야지.”
“자, 핀 빼고,,, 집게 빼고... 됐어요, 기리인 씨. 이제 옷 입어요.”
“선생님, 고개 좀 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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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노스씨네 가게에서 너무 정신을 빼서였을까. 잠시 내 정신이 어디를 탈출했다가 온 모양이었다. 냉철이고 의지력이고, 저런 상황에서는 별 소용이 없었다.
‘띠링!’
<냉철이나 의지력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의 저항력이 약한 겁니다.>
됐거든요. 어쨌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우리는 어느 식당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아까 형과 선생님이 말했던 우르송이라는 가게인가 보다. 형이 주문을 하자, 웨이터가 우리의 테이블에 유리잔을 내려놓은 후 물을 따라주었다. 물을 한 모금 마시니 정신이 좀 돌아오는 것 같다.
“후아...”
“지치냐?”
“몸이 아니고 마음이요. 너무 비현실적인 경험을 해서...”
“혹시나 해서 얘기하지만 아침에 있었던 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그 얘기를 선생님 앞에서 할까봐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설마 그럴 리가.
“이제 좀 조용해졌으니, 물어보자. 기리인, 그간 어떤 일이 있었던 거니?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몸이 약했던 마법사 지망생이 황실기사단 명예기사 서임 예정자가 된 거야? 에아임 씨는 또 어떻게 만났고?”
“아, 그게요... 얘기하자면 길어요.”
“그래서, 얘기 안 해주게?”
짐짓, 살짝 삐진 기색을 보이는 요안나 선생님. 아아. 심장이 두근거린다.
“아뇨 아뇨, 얘기할게요. 선생님이 떠나신 뒤에 어떤 일이 있었냐 하면요...”
나는 그간 있었던 일을 죽 얘기해 드렸다. 바크 선생님과 토나오도록 훈련한 이야기, 활을 추천받아 활을 연습한 이야기, 갑자기 몸이 건강해지기 시작한 이야기, 활솜씨를 바크 선생님에게 인정받은 이야기, 선생님에게 장인이 만든 활을 선물받은 이야기, 마나를 이용한 활쏘기 방법을 익힌 이야기...
“뭐?”
“나중에 보여드릴게요. 저도 우연히 터득하게 되었어요. 마치 마나로 길을 만들듯 화살을... 왜 그러세요?”
선생님은 커다란 종소리가 머리 속에서 뎅- 하고 울린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어, 아냐, 아냐. 그런 게 가능하다니까 놀래서 그래. 나중에 연구할 때 시험해보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시바낙, 북대공, 배, 에아임 형 일행, 전투, 미틱 시, 우연히 발견한 아르토 누나, 치유의 손, 상공담당관의 사망, 치유의 손의 비밀을 밝혀내고, 북부와 중부간의 대립을 중재하고...
“세상에...”
“운이 좋았죠.”
“그걸 운이라고 부르면 안 될 거 같은데? 기리인, 그간 선생님하고 했던 맞추기 훈련이 많이 도움이 된 거 같네?”
그러고 보니 그렇다. 늘 선생님과 문제를 내고 ‘추론하기’ 연습을 했던 게 실제 사건에서 도움이 많이 되었던 거 같다.
“‘추론하기’요? 그런 걸 자주 연습하셨던 겁니까? 어쩐지... 기리인의 추리 능력이 웬만한 수사기사들보다 나은 데는 이유가 있었군요.”
“어머, 그랬나요? 저야 연습 상대가 되어준 거일 뿐이죠. 기리인이 머리가 좋으니까 가능한 일이었겠죠. 그런데 어땠길래 수사기사단보다 낫다는 얘기를 하시는 건가요?”
그러자 형은 신나서 우리가 마차를 타고 오면서 있었던 일 얘기를 해 주었다. 아저씨의 이야기, 누나의 이야기, 형의 이야기를 듣고 앉은 자리에서 진상을 맞췄던 이야기를 해 주자 선생님은 새삼 감탄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쑥쓰러워져 머리만 긁었다.
“역시... 그런 공훈을 세웠으니 어전에서 포상을 받을만 하구나... 기리인, 대단한데? 괜히 나까지 뿌듯해지는걸?”
선생님은 흐뭇한 표정으로 생긋 웃었다. 나는 마주 웃었다. 선생님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다른 포상들보다 훨씬 기분이 좋았다. 그러는 동안 형은 내 얼굴을 보고는 묘한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수플레 나왔습니다.”
조그만 접시에 폭신폭신해 보이는 부풀어 있는 요리가 나왔다. 형은 스푼을 들며 말했다.
“자, 식사가 나왔으니까, 말은 줄이고 요리에 집중해볼까요?”
============================ 작품 후기 ============================
약간 늦었네요. 그래도 12시에 한 편 완성해서 올릴 수 있어 다행입니다.
오늘 자정에도 두 편 올릴 수 있게끔 노력하겠습니다.
두 편으로 모자라면 세 편을 올려야할텐데 그건 될지 어떨지...
읽어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시는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주시는 관심이 제게는 큰 힘이 됩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저 정도의 임무가 떨어질 예정이었으니 저 정도의 포상이 나오는 법이지요 ㅎㅎ 어... 뭐, 기리인이 소설 시간으로 1년 이상 보내게 되면 연하 히로인도 나오겠네요. 감사합니다!
얼룩야옹이 님 //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체크필통 님 // 구를수록 경험치를 먹는 거죠. 아 물론... 좀 험하게 구를지도... 일단 챕터 제목 자체가...ㅎㅎ;; 감사합니다!
eastarea 님 // 레벨 요소를 처음 기획 단계에서는 넣었다가 뺐어요. 역시 성장은 구르면서 해야 제맛이죠... 그리고 아마 다른 여자였으면 구분 못했을지도? ㅎ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