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8 6. 나 좀 가만 내버려 둬요 =========================
디저트로는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북부에서야 얼음이 근처에 있으니 쉽게 맛볼 수 있는 것이지만 제도에서 이런 것을 맛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정말 맛있었다. 아마 초콜릿이 맛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내 커진 눈을 보며 선생님은 웃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맞춰볼까? 너 어떻게 제도에서 얼음을 구했는지 궁금해하고 있는거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선생님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 답도 이제는 알 수 있겠지?”
“네. 마법사들이 많으니, 빙계 마법으로 만들어내는 거겠죠. 그렇게 마법사가 많군요, 제도에는. 이런 것까지 할 수 있고. 놀랐어요.”
형은 우리 두 사람을 번갈아서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는 기리인 모스 같은 사람이 한 사람만 있을 줄 알았는데, 비슷한 사람이 한 사람 더 생기니까 대화 속도를 따라잡기가 쉽지가 않네.”
그러더니 형은 자기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기리인, 맛있었어?”
나는 대답없이 엄지손가락만 치켜세워보였다. 두 사람은 그걸 보고 잠시 웃었다. 내 표정이 되게 천진난만해보였나보다. 그런데 진짜로 맛있었다. 미틱 시에서 ‘머물다 가는 바람’에서 무고이스 아줌마가 해 줬던 스테이크는 고기가 신선해서 맛있었다면, 이 우르송 스테이크는... 요리 장인의 손길이 들어가 있었다. 겉은 정말 바삭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고 따뜻한 육즙이 풍부했다. 전혀 질기지 않고 약간 과장 보태서 녹아서 없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수플레! 마치 구름을 베어무는 것 같은 그 푹신푹신함, 거기에서 나는 고소하고 풍성한 치즈 향!
“역시 우르송이 안전한 선택이었네요.”
요안나 선생님의 말에 에아임 형도 빙긋 웃어보였다. 나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내가 좋아하고 신뢰하는 사람 두 사람이 서로 잘 지내는구나. 말도 잘 통하고. 게다가, 형은 유부남이라 안전... 아니, 이런 생각은 하지 말자.
“기리인, 왜 그래? 아이스크림 너무 먹어서 머리 아파? 왜 갑자기 머리를 흔들고..”
“아니,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런 우여곡절 끝에 식사를 마치고, (계산서를 두고 실갱이가 잠시 펼쳐졌지만 형이 결국 자기 집으로 계산서를 보내라고 했다.) 식당 앞에서 선생님은 나를 보았다.
“기리인, 얘기 듣자하니 며칠은 바쁠 모양이네?”
“네... 언제 시간이 날지도 정확히 모르겠어요.”
“그래...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으니까, 걱정할 건 없지.”
그러더니 선생님은 약간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혹시, 너, 대도서관이나 신전 쪽에 너 얘기 한 적 없지?”
“네, 어... 뭐라고 하던가요? 선생님이 처음에 편지 쓸 때 대도서관이나 대신전 협력도 요청할 거라고 하시지 않았어요?”
“그건 맞는데, 어젠가... 왜 니가, 편지로 제도에 왔다고 알렸잖아? 그래서 내가 지금 연구 감독을 받고 있는 교수님한테 가서 연구 대상이 제도에 왔다고 했더니, 안 그래도 그 친구 때문에 지금 대도서관이나 대신전에서 자꾸만 부탁과 압력이 들어온다고 투덜대시더라고. 그러면서 한시바삐 너를 데려와서 아카데미와 먼저 연구를 진행해야 할 거라고 막...”
“아...”
나는 형을 바라보았고, 형도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예측했던 대로 일이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요안나 씨. 자세한 사정은 기리인이 편지로 적어 보낼 예정입니다만, 간단히 말씀드리죠. 지금 기리인은 너무 주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내일 상 받는 것 때문에요?”
“그 전부터요. 미틱 시, 그리고 레카 시에서 너무 큰 공을 세웠죠. 북대공, 중부 공작, 수사 기사단이 주목하는 인물이 된 겁니다. 그리고, 요안나 씨가 편지로 보고했던 그랜드 아카데미, 그리고 아카데미의 협조 요청에 의해 사태를 알게 된 대신전과 대도서관 측 – 아마, 자체 정보망을 통해서 기리인의 특이 체질에 대해 알았겠지요. 이들도 기리인을 서로 끌어가려고 난리를 치고 있을 겁니다. 요안나 씨도 아까 얘기하셨잖아요. 아카데미 쪽에 대신전이나 대도서관에서 압력이 들어오고 있다고.”
선생님은 약간 긴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제가 기리인을 의동생 삼고 후견인이 되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기리인 스스로 지위가 생기니까, 아카데미든 어디든 기리인의 의사에 반해 기리인을 마음대로 하기는 어렵겠지요.”
“아...! 더 이상 폰이 아닌 퀸이 되는 거군요.”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선생님은 형과 같은 비유를 썼다. 우리가 풉, 하자 선생님은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갸웃 했다.
“알겠어요. 일단 며칠간은 기리인과 연구하기는 힘들겠군요.”
선생님이 약간 안타깝다는 말투로 말했다. 형은 볼을 긁으며 말했다.
“황궁에 들어가거나 사교계 자리에 나서는 시간에 함께 하시기는 힘들겠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함께 연구하실 수 있게끔 도와드리겠습니다. 저희 집, 기리인이 머무는 별채에 원하실 때 찾아오셔도 무방합니다. 기리인이 그랜드 아카데미로 가야 할 때도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요안나 선생님은 환한 표정이 되었다.
“에아임 씨, 초면에 이런 말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정말 좋은 분이시군요. 우리 기리인에게 이런 좋은 분을 만나게 해 주신 신께 감사드릴 일이네요.”
“과찬이십니다. 할 수 있는 걸 하는 건데요.”
다행히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겸양에 겸양을 더해 끝없이 이어지게끔 하지는 않았다. 선생님은 저 멀리 있는 시계탑을 보더니, “어머, 이제 들어가야겠다.”고 말하고는 우리 쪽을 향했다.
“에아임 씨, 만나서 반가웠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아닙니다, 요안나 씨. 저도 반가웠습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형과 악수를 나눈 선생님은 내 쪽으로 다가왔다.
“기리인, 너무 조급해하지 마, 알았지? 시간은 많이 있으니까. 서두르다가 일을 그르치지 말렴. 우리 기리인은 잘 할 수 있을 거야.”
“네, 선생님. 제가 자세한 설명 적어서 편지 보낼게요.”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선생님은 나를 한번 꼭 안아준 후, 손을 흔들며 뒤돌아서 아카데미 쪽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선생님이 내 몸에 묻혀놓은 향에 푹 취해 잠시 어찔해하고 있었다.
“흐음...”
형이 나를 보며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이야, 우리 기리인, 닳고 닳은 여심의 마스터인 줄만 알았더니, 순정이 남아있었네?”
“왁!”
“하하하. 어유, 그런데 향수는 아닌 거 같고, 독특한 향이 나는 사람이네...”
형은 아까 선생님과 맞잡았던 손을 코 가까이 가져가 냄새 맡아보고 있었다.
“그렇죠? 저도 지금 머리가 띵할 정도네요.”
“그러게. 희한하네...”
그러다가, 형은 아차, 하고는 나를 보며 말했다.
“야, 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바쁘다.”
“네? 왜요? 오후에는 별 일 없을...”
“별 일이 없긴 왜 별 일이 없어. 너 사교계 데뷔해야지. 에티켓 공부 안 할거냐? 춤은 또 어쩌려고?”
“에엑?! 춤이요? 형 그런 얘기는 안 했잖아요?”
“니가 이럴 게 뻔하니까 일부러 안 했지 임마. 얼른 가자. 시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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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윽!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시간 없으니 얼른 바로 일어나세요. 자, 둘, 셋. 주고, 둘, 셋. 놓고, 둘, 셋. 좋아요, 둘, 셋, 다시 잡아서, 하나, 둘, 셋.”
형의 집 본채 지하에는 형이 연습하는 연무장이 있었다. 한쪽 벽면에는 자세를 점검하기 위한 거울이 길게 매달려 있었다. 꽤 공간이 널찍하고, 바닥도 튼튼해 보였다. 지하인데도 환기가 잘 되어 있는지 퀴퀴한 냄새가 나지 않았고, 오레즈 할아버지와 에노 할머니가 청소를 잘 하셔서인지 먼지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 공간에서 나는 지금 땀을 흘리고 있었다. 힘들어서 흘리는 땀이 반, 그리고 민망하고 당황하고 미안해서 흘리는 땀이 반이었다. 내 앞에서 내 허리를 감고 있는, 나보다 서너 살 많은 것 같은 여자분의 발을 밟은 것만 해도 이미 열 번이 넘었다. 다행히 이런 경험이 많은지 그 분은 약간 얼굴을 찡그리기는 해도 뭐라 타박하지는 않았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다시 처음으로, 하나, 둘 셋. 좋아요. 그만.”
‘그만’ 소리가 나자마자 나는 길게 한숨을 내뿜었다. 내 앞의 여자분이 쿡쿡거리거나 말거나, 나는 그 분과 맞잡은 왼손을 놓고, 허리에 감았던 오른손을 떼고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상하게, 힘이 든다.
“잘 하고 있어요. 하루만에 이 정도 따라오는 것도 대단한 거에요.”
그리고 옆에서 박수를 치며, 내 동작을 보며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던, ‘강사님’이 헉헉거리던 나에게 물잔을 내밀었다.
“후아-.”
물잔을 비우자, 강사님이 웃으며 말했다.
“사실 이런 경우가 흔하지는 않거든요. 대개 어른이 왈츠를 배우는 경우는 상인들의 경우가 많지요. 귀족들과 거래를 트기 위해 사교계에 오는 경우인데, 그렇게 오는 상인들은 대부분 기리인 씨보다 나이가 스무 살은 많아요. 그리고 귀족가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대개 어릴 적부터 왈츠를 배우는 경우가 많으니까 말이에요.”
“그렇군요...”
“그래서, 기리인 씨처럼 젊으면서 금방금방 배우는 사람한테 춤을 가르치는 건, 나한테도 이 아이한테도 정말 오랜만이에요.”
나는 내 파트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후훗 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미안해요, 많이 아프죠? 발을 아까 몇 번이나 밟아서...”
“아니에요. 이 정도는 자주 있는 일인걸요. 기리인 씨 정도면 세게 밟는 것도 아니구요. 아저씨들이 비틀대다가 세게 꽉 밟아서 사제님 찾아가야 했던 적도 몇 번 있었는걸요. 괜찮아요.”
웃으면서,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내 파트너. 나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강사님이 박수를 세 번 쳤다.
“자! 잊기 전에, 다시 한 번 해 볼까요? 기리인 씨, 왈츠의 기본 동작이 몇 개라고 했죠?”
“열두 개, 총 서른 여섯 박자로 움직입니다.”
“좋아요. 자, 준비하시고. 기리인 씨, 손을 좀 더 밀착해서 대세요. 왈츠는 대화에요. 남녀간 친밀함과 애정이 오가는 대화라구요. 그렇게까지 격식을 차려버리면 여자분이 가까이 오기 힘들잖아요? 그렇죠. 좀 더 바짝 끌어안고. 좋아요, 준비. 하나, 둘, 셋.”
아아, 리미. 네가 얼마나 큰 고난을 겪고 있는 건줄 알겠어 이제...
============================ 작품 후기 ============================
곧 다음 편이 이어집니다.
항상 읽어주시고, 선/추/코/쿠 해주시는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저의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