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3 6. 나 좀 가만 내버려 둬요 =========================
“앉게.”
황제 폐하의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황제 폐하는 테이블을 둘러보다가, 내 쪽을 보고는, 아주 짧게 눈짓했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대답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폐하는 테이블을 마저 둘러보더니 말했다.
“융파트와, 케비주가 없군?”
케비주... 아. 늘 대공님 대공님 하면서 불러서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구나. 케비주라는 건 우리 북대공가의 성이다. 원래는 하페르 황가의 왕자였기 때문에 하페르라는 성이었으나, 북대공가를 열며 그는 자신의 별명을 대공가의 가문명이자 자신의 성으로 붙여버렸다. 그나저나 폐하께서 대공가나 공작가를 저렇게 부르는 걸 보면 저 두 가문은 가주가 참석하지 않은 모양이다.
“폐하, 융파트와 케비주는 각자 맡은 일이 있어 아침 어전 회의 이후 잠시 사무실에서 사무를 보고 있는 중입니다. 곧 올 것으로 아뢰옵니다.”
저 멀리 앉아있던, 궁내부 장관 프그단 경이 말하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며 “케비주 대공가의 외르트 케비주 경, 그리고 융파트 공작가의 파라 융파트 경 입장합니다.” 라는 시종의 말이 들려왔다. 두 사람이 입장하여, 외르트 경은 군례를, 그리고 파라 경은 허리숙여 인사를 했다. 황제 폐하가 “가서들 앉게.” 하고 말하자, 두 사람은 고개를 숙여보인 후 우리와는 먼 쪽에 가서 앉았다. 으음. 저기 앉으면 말 소리는 안 들리겠다.
“재상은 오늘도 점심은 거르는가?”
“점심을 먹으면 머리가 맑지 않다는데 어쩌겠어요.”
처음으로 들은 황후 전하의 목소리는, 다소 차가운 느낌을 주었다. 나는 새삼, 내 건너편 한 칸 떨어진 곳에 앉은 나스프 공작을 바라보았다. 이 분이 황후 전하의... 음, 나이를 고려하면 적어도 남매 정도는 되겠구나. 오라버니 정도이겠지. 내 자리에서는 황후 전하의 모습이 정확히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남매지간이라면 많이 닮았겠지.
나는 눈을 살짝 돌려, 나스프 공작 옆에 앉은 황태자 저하를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만약 황후 전하가 나스프 공작의 동생이라면, 황태자 저하는 나스프 공작을 외삼촌으로 두고 있는 셈이다... 그러고 보니 나스프 공작의 입매가 약간 닮은 듯도 하다. 물론 어제 뵌 황제 폐하를 더 닮아 있지만 말이다.
‘정보 확인.’
<이름 : 아제트 하페르**
나이 : 26
HP : 2930/2930
힘 : 76
민첩 : 78
지력 : 95
마나친화력 : 81
매력 : 83
지구력 : 69
특수 : 카리스마 88, 철혈 85
스킬 : 분석 Lv. 1>
<* 중요! 이티클레 대륙의 운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 인물입니다. 이 인물에 대한 간섭 시 유의하기 바랍니다.>
<** 중요! 메인 퀘스트의 중요 인물입니다.>
<제국의 황태자이며 차기 황위 계승자입니다. 본인이 추진하고 있는 계획에 차질이 생겨 현재 고민중입니다.>
응? 나는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이 위화감을 어떨 때 느끼는지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뭔가를 눈치챘을 때, 내 무의식이 뭔가를 잡아냈을 때, 하지만 그걸 아직 내 머리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잡아내지 못 했을 때 느낀다. 아... 뭘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알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아악. 놓쳤다. 젠장.
요리가 날라져오기 시작했다. 의외로 요리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오찬 요리이다보니 아무리 황궁이라 해도 소박하게 식사하는 모양이다. 전채로 공들여 예쁘게 담은 샐러드와 수프가 날라져왔다.
“들지.”
황제 폐하의 한 마디에 모두가 식사를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테이블에서 지켜야 하는 매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대개 보니 이런 자리에서 대표적으로 망신당하는 게 그런 거던데... 어쩐다. 하고 아래를 보니 어차피 선택지가 없었다. 스푼과 포크가 하나씩밖에 없었던 거다. 형의 먹는 모습을 곁눈질하니 그냥 후루룩 소리만 안 내는 정도에서 열심히 먹고 있었다. 나는 포크를 집어들어 샐러드를 한 점 입 안에 넣었다. 분명 최고의 요리 장인의 솜씨가 발휘된 엄청 맛있는 요리들일텐데, 왜일까, 너무 긴장해서일까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저 젊은 기사가, 오늘 아침에 명예 기사직을 서임받은 사람인가요?”
황후 전하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내 쪽으로 쏠렸다. 나는 황급히 씹던 것을 꿀꺽 삼키고, 포크를 내려놓고 정자세로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황후 전하.”
“어머나, 아직 앳된 청년이네. 경은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올해 성인이 되었사옵니다, 전하.”
“어머나, 그럼 우리 아를리보다도 어린 건가? 폐하, 간만에 등장한 청년 영웅 아닌가요? 게다가 잘 생기기까지 했군요. 간만에 사교계가 달아오르겠는데요?”
저 분은 왜 또 저러시나. ‘정보 확인’.
<이름 : 레루르 하페르 (결혼 전 이름 : 레루르 나스프)
나이 : 42
HP : 1600/1600
힘 : 66
민첩 : 68
지력 : 86
마나친화력 : 65
매력 : 83
지구력 : 74
특수 : 사교 94, 장악 B+
스킬 : >
<라고 하페르 황제의 황후입니다. 혼전에는 나스프 가문의 사람이었습니다. 웨빌 나스프의 동생이기도 합니다. 프그단 경을 통해 궁내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습니다.>
흐음. 즉, 이 분은 황가보다는 나스프 가문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까? 아직 섣부른 추측이지만, 황제 폐하가 궁내부 조직을 믿지 못한다면 그렇게 봐야겠지? 그렇다면, 황후 전하가 만약 나에게 어떤 ‘기술’을 걸어온다면, 그건 나스프 가문의 입장을 말해주는 거라고 추측해도 섣부른 추측은 아니겠지?
“그 뿐이겠소. 주변에 모두 결혼한 사람들 밖에 없었는데, 저 친구가 있으니 황태자가 사교계에 갔을 때 말벗이라도 되어 주면 좀 덜 쓸쓸하지 않겠소?”
황제 폐하의 한 마디는 순간 테이블에 있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황제 폐하는 그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려하게 스푼을 놀릴 따름이었다. 아아. 폐하. 너무 나가셨어요. 오히려 저를 경계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거 같은데요. 제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줄어들잖아요...
모두가 황제 폐하를 바라볼 때 나는 황태자 저하를 바라보았다. 황태자 저하 역시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기한 것을 바라보는 호기심? 아버지는 왜 저렇게까지 말하시나 하는 의문? 그런 것이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다행히 ‘벼락출세한 자’에 대한 경멸 같은 건 없어 보였다. 물론 지금은 드러내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나중에 얘기해 볼 틈이 있겠지.
“그건 그렇고, 재무장관.”
“예, 폐하.”
나와는 제일 먼 쪽의 자리에 앉아 있던 분이 말했다. 내 자리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분이었다.
“올해의 세수 보고서는 아직인가?”
“곧 완성되옵니다, 폐하.”
“식사를 마치거든, 재상에게 올해의 징수 계획에 대해 보고서를 올리도록 말해 주게.”
“그리하겠사옵니다, 폐하.”
“폐하, 세금과 관련하여 소신 청이 하나 있사옵니다.”
나스프 공작이 손을 들며 말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황제 폐하가 입을 열었다.
“말해보시오, 공작.”
“황공하옵니다, 폐하. 실은 신이 아닌, 신의 영지와 거래하는 제 주변 독립 백작령들의 탄원이옵니다, 폐하.”
순간 폐하의 표정이 팍 일그러졌다.
“그들의 탄원을 어찌 공작이 대신 말씀하시오? 마땅히 그들이 어전에 출두하여 직접 말해야 하는 것 아니겠소?”
“하오나 폐하. 그들의 문제는 곧 소신의 영지의 문제이기도 하옵니다. 그 독립 백작령들은 소신의 영지와의 무역이 없으면 자급자족이 어려운 영지들이기 때문이옵니다.”
황제 폐하는 이제 고개를 돌려 나스프 공작을 똑바로 바라보고 계셨다. 아니, 노려본다는 말이 맞겠구나. 음. 어제 형은 제국 동부에 분포한 독립 귀족들이 어느 정도는 남부의 나스프 공작령이나 중부의 융파트 공작령에 예속되어 있다고 말해 줬지. 하지만, 저 정도로 당당하게, 그들을 대리해서 황제 폐하의 앞에서 말할 수 있는 건가? 저 정도면, 아예 그 백작령들을 거느린 공국(公國)의 수준 아닌가?
저 이야기를 황제 폐하의 앞에서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황제 폐하가 그것을 감내해야 할 정도로 나스프 공작의 세력이 커진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뫼르말 백작, 황태자와 좋은 사이가 되고 있다는 그 가문에 대해 지배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황태자의 혼사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는 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반대라면? 나스프 공작이 저 이야기를 하게끔, 뫼르말 백작이 은근히 청탁이나 압력을 넣었다면? ...그 경우는 뫼르말 백작가가 생각보다 황태자 저하에게 지배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봐야 하겠지.
“오라버니, 식사 자리에서 너무 무거운 화제를 꺼내셨어요. 식후에 폐하의 집무실에서 이야기 나누시는 것이 어떨지요.”
황후 전하의 한 마디에 식탁 위를 덮고 있던 긴장된 분위기가 다소 풀렸다. 눈치를 보던 시종들이 바삐 다가와 수프 그릇과 샐러드 그릇을 덜어내가고, 손가락 길이만한 튀김들이 담긴 그릇 하나와 면요리가 담긴 그릇 하나씩을 각 사람들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릇 부딪히는 소리와 시종들이 움직이는 소리로 잠시 대화가 끊겼다.
그리고 나는 역시 대화 하나 하나에 신경을 써야 하는 이런 고귀한 자리는 스트레스 받는다는 생각을 했다. 매일 이래서야 황제 폐하께서 스트레스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건너편의 아버님을 바라보니, 아버님은 오불관언, 귀만 열어둔 채 요리에 집중하고 계셨다. 차라리 저런 태도가 좋을 지도 모르겠구나.
============================ 작품 후기 ============================
야간에 두 편 올려도 베스트는 멀고 먼 길이네요.
전작은 어떻게 올라갔던 건지 이제는 의아해집니다.;
혹 최근 분량이 재미가 떨어지나요? 아무래도 제도에서 큰 사건들을 다루게 되니, 인물들이나 배경 설명이 있어야 하는 편이 있다 보니... 계속 템포감 놓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언제든 글에 대해 의견 주실 것이 있으면 거리낌 없이 주세요. 어떤 의견이든 적극 반영하겠습니다.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시는 분들께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덕에 힘을 얻습니다.
후원쿠폰 주신 카드보험 님 정말 감사합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열아홉이니 별 수 없죠 뭐. 그걸 무기로 삼을수밖에...ㅎㅎ; 감사합니다.
체크필통 님 // 꼬바리 막내라 일단은 귀를 열심히 열어놓고 있어야겠네요. 감사합니다.
급급여율령 님 // 감사합니다. 아직은 살 만 합니다 ㅎㅎ;;
longway 님 // 네, 타버리지 않게끔 조절해가면서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