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134화 (134/309)

00134 6. 나 좀 가만 내버려 둬요 =========================

황후 전하의 일갈이 있은 후 식사 자리에서는 잡담 정도를 제외하면 별 말이 없었다. 기껏 사람 불러다 놓고 뭐 하는가 싶은 생각도 들었으나, 내가 여기에서 불만을 제기할 수 있는 입장이 전혀 아니었으므로 가만히 먹기만 했다. 그저 체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물론 수확이 완전히 없는 건 아니었다. 황후 전하의 장악력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몇몇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고, 그들에게 내 얼굴을 알렸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이 오찬 자리에 왔나 싶은 생각이 들긴 했다.

그래도 이건 마음에 든다. 아버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분과 형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이 생기니, 황궁 안에서도 그나마 안심하고 가 있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말이다. 우리는 오후 티타임 전까지 다시 황실 기사단 본부로 돌아와, 어느 휴게실 하나를 빌렸다. (“어차피 다들 훈련하러 성 밖에 나가 있으니까, 둘이서 독점해도 괜찮을 거야.” 다르임 형님의 말이었다.)

“기리인, 이제 어쩔 거냐?”

형이 물었다. 나는 황궁에서 나올 때 들러서 가지고 나온 활을 간만에 살펴보는 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자 자체도 물건인 것 같았다. 충격에 예민하다고 했던 이 활은 대륙을 반쯤 가로지르는 긴 여행에도 멀쩡하게 있었다. 나는 가볍게 각 부분의 도르래를 움직여보고 시위의 탄력도 점검해 보았다. 멀쩡했다. 이 정도라면 있다가 한 번 제대로 보여줄 수 있겠는걸.

“어쩌다뇨?”

“황제 폐하께서 주신 임무 말이다.”

“아...”

나는 활을 케이스 안에 넣어놓고 뚜껑을 닫았다. 이어 화살통을 열었다. 화살통이 물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안의 화살촉이나 화살대는 멀쩡해 보였다.

“방법이 없어요, 형.”

“방법이 없다고?”

“네. 제가 직접 나서서 물어볼 수 없잖아요. 예를 들면 아까 우리 옆에 앉았던 나스프 공작님. 그 분께 제가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하고 이상한 거 물어봐요. 어떻게 되려나.”

“그래, 그건 그렇지. 참 어려운 문제다.”

애초에 난이도 A의 퀘스트가 쉬울 리가 없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래도 한 가지는 다행이에요. 폐하께서 오늘 그 말씀을 해 주시는 바람에...”

“뭐, 황태자와 비슷한 나이라는 거?”

“그렇죠. 아까 황제 폐하께서 말씀하셨지만, 융파트 공작의 아들과 북대공님의 아들은 기혼자라면서요? 나이가 비슷해도, 황태자님과 쉽게 친해지기는 힘들겠죠. 입장 차이도 있고. 게다가 황제 폐하께서 그렇게 운도 떼 주셨고.”

“하늘에 오르는 일이 대륙최고봉에 오르는 일 정도로 낮아지긴 했구나.”

형의 지적이 아프다.

“원래도 뭐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황태자 저하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안 되면 어쩔 수 없죠. 저는 그것보다 뫼르말 가문의 영애에게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흐음... 나는 그 쪽하고 좀 나이 차이도 있고, 이미 유부남이라 그 쪽을 잘 알지 못하니 도와줄 만한 게 없구나.”

형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그래도 뭐 어떻게 하겠다 이런 방향은 있을 거 아냐?”

“무도회에서 좀 적극적으로 움직여 봐야죠.”

“어떻게?”

“다른 레이디들에게 적극적으로 춤을 신청해볼까 해요. 너무 나댄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형은 약간은 심각해진 얼굴로 팔짱을 꼈다.

“흐음... 기리인, 아마 춤 시간은 하룻밤에 세 번 정도가 고작일 거다. 춤이라는 게 쉽지 않고, 특히 꽉 조인 코르셋과 높은 굽의 구두의 레이디들에게 춤은 심한 노동에 가까워. 호스트(host)인 황제 폐하와 황후 전하께서 입장하시고 릴(reel) 도는 거 빼고, 왈츠 한 세 번 정도 생각해라.”

“형.”

“응.”

“제가 이러니 저러니 해도, 주빈 격인 인물이 맞죠 오늘 밤은?”

형은 얘가 왜 이러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제가 춤을 청하면 다른 날은 몰라도 오늘은 어지간해서는 제 신청을 받아주겠지요?”

“어... 뭐, 그렇기야 하지... 약간 좀 천방지축이라는 건 감수해야겠지만.”

“뭐, 그거야 얼굴이랑 말로 어떻게든 커버해보죠.”

형의 질린다는 표정.

“너 니가 당당하게 그 말 하고 다녀도 되냐?”

“다른 사람이 안 들으니 하는 거죠.”

“어쨌든, 그래서 어쩌려고?”

“세 번 밖에 기회가 없으니 핵심적인 사람에게 춤을 신청해야죠. 뫼르말 백작의 딸에게 한 번 신청해 보려고요. 그 다음에는... 어, 나스프 공작도 딸이 있다고 했죠? 재상님의 딸도 있고...”

“야, 너...”

“어떻게든 되겠죠 뭐.”

“속도 좋다. 준비됐냐?”

“네, 슬슬 갈까요?”

나는 활 상자를 메고, 활통을 허리에 차고 형의 뒤를 따라 방을 나섰다. 슬슬 궁도장으로 이동해야지. 고귀한 분들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

황실 궁도장은 사각형의 긴 공간이었다. 세네 명이 나란히 서서 백 걸음 바깥의 과녁에 활을 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었다. 유사시에는 과녁을 치우고 테이블을 깔 수 있는 그런 공간이었다.

궁사들이 서는 사대 뒤쪽으로, 붉은 카펫이 넓게 깔리고, 그 위에 둥근 테이블이 여럿 놓여졌다. 테이블 위에 실크 재질인 것 같은 새하얀 테이블보가 깔렸고,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의자들이 놓여졌다. 그 의자에, 신분 높은 남녀노소가 와서 앉았다. 아까 어전 회의에서 본 분들도 있다. 예를 들면 나스프 공작. 공작은 공작부인은 아닌 것 같은 어린 여자를 데리고 왔다. 얼굴이 닮은 걸 보니 딸인가. 그리고 융파트 공작의 맏아들과 북대공의 맏아들도 각자 부인인 것 같은 사람들을 데려왔다.

지금 이 순간 누가 제일 많이 생각나느냐고 물으면 좀 어이없지만 크주크 형이 제일 많이 생각난다. 그 운집한 관중 한 가운데서 시합을 하던 형의 마음이 이런 것이었을까? 나는 원래 무예를 닦던 사람이 아니라 그런지 무예를 이런 자리에서 펼치는 것이 가치를 떨어트린다거나 하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지만, 어릿광대나 별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은 든다.

기왕 여흥이라면, 재미있는 걸 많이 보여줘야겠지.

“오늘의 참가자는 폐하의 앞에 무릎을 꿇으시오.”

나 말고도 활을 들고 온 세 사람이 있었다. 제도 경비대의 저격병 한 명, 황실 기사단의 선배 기사(선배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걸 보니, 반 나절만에 나는 황실 기사단에 꽤 적응했나보다), 그리고 예전에도 활 깨나 쏴서 명궁으로 이름높았다는 어느 귀족 한 분이었다. 나와 함께 줄을 맞춰서 선 네 명은 한번에 황제 폐하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까보다는 가벼운 차림을 한 폐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씀하셨다.

“비록 이 자리가 어전 시합도 아니고 그저 여흥을 겨루는 자리일 뿐이나, 그렇다 하도 경쟁은 경쟁이다. 경들은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승복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하라.”

“넷!”

우리는 그렇게 대답하고, 황제 폐하가 자리에 앉는 것을 기다려 일어서서 돌아섰다. 궁내부장 프그단 경이 말했다.

“오늘은 말씀드렸던 대로 어전 시합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무의 길을 추구하는 네 명이 만났으니 간단히 시합을 해 보겠습니다. 열 다섯 발의 화살을 쏘아, 중앙에 많이 맞히는 사람을 승자로 하겠습니다. 그러면 먼저, 금일 오전 황제 폐하로부터 황실 기사단 명예 기사로 선임받은, 기리인 모스 경.”

나는 황제 폐하에게 허리숙여 인사하고, 이어 돌아서서 자리에 앉은 여러 귀족 여러분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작은 박수 소리가 나왔다. 저 쪽에서 열심히 박수를 치고 있는 린베크 아버님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고, 아버님. 민망해요.

내가 활을 들고 궁사대로 걸어가자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렸다. 예를 들면 ‘저게 활이야?’ ‘활에 왜 도르래가 붙어 있대?’하는 소리 말이다. 심지어는 ‘쯧쯧쯧... 꼭 실력 없는 자들이 저런 부가장치를 달지... 힘이 없으니 힘을 좀 줄여보려고 단 것 아니겠나.’ 이런 사람들도 있었다. 당신, 기대해. 얼굴이 일그러지게끔 해 주지.

나는 궁사대로 걸어가, 거기 놓여 있던 내 화살통을 집어들었다. (폐하의 앞에 서느라 화살을 가지고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리 윌로우(willow) 촉들을 다 결합해 둔, 시커먼 마수목 화살을 꺼내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더 커졌다.

“설마 마수목 화살인가?”

“신기한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구만...”

역시 귀족들의 안목은 무시하지 못할 데가 있구나. 나는 오른손에 릴리즈(release)를 차고, 화살통을 오른다리에 걸었다. 그리고 화살 하나를 꺼내 활에 물렸다. 그 때,

‘띠링!’

<서브 퀘스트 – 실력의 증명>

<간단한 여흥자리일 뿐이지만, 당신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당신의 실력을 보여주면, 당신이 명예 기사직을 얻은 것을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그런 시선을 거둘 것입니다.>

<목표 : 15발 중 15발을 모두 원 안에 적중시키세요.>

<추가 목표 :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솜씨를 보여주세요.>

<목표 달성 보상 : 이 자리에 모인 귀족들의 당신에 대한 평판이 올라갑니다.>

<추가 목표 보상 : 오늘 밤 있을 무도회에서 당신이 사람들에게 접근하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흐음. 추가 목표를 반드시 달성해야겠군.

<마불살을 쏘기를 권장합니다.>

그래, 나도 그렇게 할 작정이야. 하지만 과녁을 박살낼 정도로 해서는 안 되겠지?

<적당한 강도로, 겨냥이 도움 될 정도로만 하십시오.>

좋아. 나는 숨을 깊이 들여마신 후, 천천히 활시위를 당겼다.

빠아아아.

활대가 약한 비명을 지른다. 좋은 케이스 안에 들어있었어서일까, 미틱 시를 지난 들판에서 마지막으로 쏴 보고 이후 꺼내보지도 않았는데 활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탄력있는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수월하게 활시위를 릴리즈에 걸었다.

그리고 마나를 불러일으켰다. 바람은... 확인할 필요 없다. 위력은 약하지만 이것도 마불살이다. 바람에 그리 쉽게 영향받지는 않을 거다. 신중히 겨냥하고, 마나로 만든 레일을 평소보다는 짧게 앞으로 뻗는다. 과녁 쪽으로. 자... 조금만 더 오른쪽으로... 됐다.

나는 릴리즈를 놓는다. 톡.

쐐애애액!

마불살의, 빵 하는 폭음까지는 아니지만, 화살이 공기를 찢는 소리가 들린다. 보통 같으면 반의 반 정도 위를 향하게 쏘아야 100보 거리의 과녁에 적중하지만, 내 화살은 다르다. 거의 직선으로 앞으로 날아간다. 다른 화살보다 몇 배는 빠르게.

터엉.

멀리 있는 새빨간 원 한 가운데, 검은색 나뭇가지가 하나 생겨난다. 과녁에서 약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시종이 파란 깃발을 들어올린다. 명중이다.

============================ 작품 후기 ============================

그간 열심히 탐정노릇 했으니 액션도 좀 해 봐야죠?

여기에서 퀘스트를 깨면 이후 무도회에서 기리인이 활동하기가 좀 편해질 겁니다.

레이디들이 훅 가버릴 거라... (뭐래니)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 추, 코, 쿠 주시는 여러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덕에 기운 얻어 씁니다.

곧바로 다음 편이 올라갑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