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6 6. 나 좀 가만 내버려 둬요 =========================
“기리인. 황실 기사단에 들어가서 좋은 게 뭔지 아냐?”
“뭔데요?”
“저런 옷들을 입지 않아도 된다는 거지.”
형이 가리키는 곳에는 달라붙는 바지, 달라붙는 조끼에 금색 실로 잔뜩 수가 놓여진 남성용 무도회 예복들이 걸려 있었다. 형의 말에 나는 적극 공감했다. 저런 옷을 좋아서 입는 사람이 있다는 게 참 믿을 수가 없다. 뭐... 대전에서 폐하 앞에 엎드려 있을 때라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차라리 조금 덜 매력을 발산하더라도 좀 덜 창피한 게 낫겠다.
“형은 뭐 입을 거에요?”
“나? 수사기사단 예복.”
“그런 게 있어요?”
“그럼. 아까 너 활 쏘러 갔을 때 집에서 받았지.”
형이 꺼내서 보여주는 예복은 본질적으로는 내가 입고 있는 예복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망토만 파란 색이고, 망토의 뒤에 약간 진한 색으로 검과 천칭의 그림이 수놓아져 있을 뿐이었다. 나보다 훨씬 더 멋져 보인다.
“기리인, 너는 춤 춰야 하니까, 망토를 약간 타이트하게 조이고, 그래. 발을 밟아서 미끄러지지 않게끔 이렇게 하는 게 낫겠다.”
형은 직접 손을 뻗어 내가 예복 위에 입은 망토를 만져 주었다.
“어, 고마워요, 형.”
“뭘. 갈까?”
조그만 방을 나와서, 복도를 좀 걷자, 불이 환히 밝혀진 곳이 보였다. 마력석으로 하나하나 빛을 밝힌 호화찬란한 샹들리에들이 밝혀져 있는 그 곳에, 아까 우리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던 예복을 입고 그 위에 브레스트 아머를 걸친 병사 둘이 입구를 경비하고 있었다. 그 옆에, 궁내부원 한 분이 이름들이 적힌 서류를 이리저리 넘겨보고 있었다. 아까 우리가 옷차림을 정비하러 갔을 때도 그 분께 인사를 했었기 때문에 그 분은 별로 놀라지 않고 말했다.
“이제 들어가시겠습니까?”
“네, 부탁드립니다.”
“문을 열게나.”
병사들은 그 말을 듣고 무거운 문을 안으로 밀어젖혔다. 우리가 문 안으로 들어가자, 문 안에 있던 궁내부원이 큰 소리로 외쳤다.
“금일 기사 서임을 받았으며, 오늘 놀라운 활 솜씨를 뽐낸 바 있는 기리인 모스 경, 그리고 그의 후견인이자 제국 2급 수사기사인 에아임 로그푸스 경 입장입니다!”
으아. 주빈은 약간 늦게 나타나는 법이라고 해서 조금 늦었는데, 홀 안에는 이미 100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 사람들이 일제히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를 보고 있었다. 으아. 적응 안 된다.
홀은 아주 넓었다. 천장에는 아까 복도에 있었던 샹들리에의 10배는 되어보이는 거대한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고, 벽에는 마력셕 등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호화스러운 벽지와 태피스트리, 그림들이 매달려 있었다. 한 쪽 구석에는 악사들 10여명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아직 흥을 돋굴 때는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플루트가 조용한 멜로디를 연주하고 현악기들이 피치카토(pizzicato)로 현을 튕기며 반주를 넣고 있었다.
홀의 저 쪽 벽에 약간 올라간 단이 있었고, 단 위에 황제 폐하와 황후 전하, 그리고 황태자 저하, 황녀 저하가 앉을 자리가 있었다. 아직 네 분은 들어오시지 않았다. 그 단의 양 쪽으로는 테이블들이 놓이고, 내가 아는 음식과 내가 모르는 음식들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요리는 주가 아닌지, 뭔가 즉석에서 요리를 해 주거나 요리에 공을 들이거나 하는 음식은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전에 레카 시에서 전야제 파티에 참석했었을 때 맛본 적 있는 샴페인이 준비되어 있었다. 샴페인을 목이 좁고 길쭉한 잔에 따라, 그걸 쟁반에 들고 궁내부원이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은 마음내키는 대로 잔을 들어 목을 축이거나, 접시에 음식을 담아 먹거나 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양 벽으로는 둥근 테이블과 의자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그 쪽의 조명은 약간 어두웠다. 홀 가운데로 주의가 모이게 하기 위한 장치일까.
그리고 형은 나를 이끌고 홀 가운데, 사람들이 잔뜩 모인 곳으로 이동했다. 그 이후 나는 형이 소개시켜주는 사람들을 머리 속에 집어넣기 바빴다. 물론 정보 확인 기능을 이용하면 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케비주 경, 오랜만이군요. 격조하였습니다.”
“오오, 에아임 경이 아니시오. 안 그래도 아버님을 통해 에아임 경이 우리 북부 영지에 다녀가셨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습니다.”
“불민한 일 처리로 북부 대영지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았는가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씀을! 아버님께서는 에아임 경의 공명정대한 일처리와 사후 뒷매듭에 매우 만족하고 계십니다.”
북대공 전하가 형을 죽이려 들었던 건 나도 알고 형도 알텐데 형은 전혀 그 언급은 하지 않았다. 나 같으면 ‘살아서 다행입니다’ 정도로는 톡 쏴 줬을 텐데.
“외르트 경, 이 쪽은 기리인 모스입니다. 귀 북부 대영지 출신입니다. 기리인, 이 분은 외르트 케비주 경이시다. 북대공 전하의 첫째 아드님 되신다.”
“기리인 모스라고 합니다.”
나는 가볍게 군례를 올렸다. 황실 기사단이 군 조직이라 군례로 인사를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좋군. 외르트 경은 군례로 답례한 후,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아왔다.
“에, 엣?”
“아버님께서 자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적어 보내셨다. 제도에 도착할 경우 힘이 되어주라고도 신신당부 하셨다. 자네의 시바낙 제조에 대한 공훈은 본 가에서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기리인 경, 만나서 반갑다.”
“어, 음, 네, 외르트 경. 만나뵈어서 영광입니다.”
“드네, 이 쪽으로 와요. 아까 활 쏘는 거 봤지? 이 친구가 우리 북부 영지의 자랑 기리인 모스야. 기리인, 이 쪽은 내 안사람 드네라고 한다.”
“만나 뵈어서 영광이에요. 어쩜, 신의 은총을 몰아서 받았나봐. 얼굴에, 머리에, 그 활 솜씨에...”
그렇게 말하며 드네 씨는 손등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무릎을 약간 꿇으며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어색하지 않게 된 모양이다. 타박하는 이가 없었다.
“기리인, 나는 에아임 경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다. 조만간 한 번 들러주지 않겠나? 식사나 하며 자세하게 이야기를 좀 나누는 시간을 갖도록 하지.”
“그리 하겠습니다, 외르트 경. 단지 제가 지금 언제라고 확답을 드릴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 제가 내일 중으로 편지를 드리거나 사람을 보내거나 해도 될지?”
“그리 하게. 사교계의 신인이 바쁜 것이 당연하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이야기 나눠요, 기리인 경.”
“네, 저도 뵙게 되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건을 종료하면...
“기리인, 이리 와라. 디캔 경,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이 쪽은 기리인 모스라고 합니다.”
“아까 활을 쏘는 것을 보았지요. 명궁이라는 칭찬조차도 그대의 솜씨 앞에서는 빛을 바래는 것 같구료.”
“이 쪽 분은 디캔 크목 경이시다. 제국 해군의 연락관 직책을 맡고 계시지.”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크목 경. 과분한 칭찬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런 식이었다. 형은 그 안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과 친분이 있었고, 그건 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사람들은 서로서로 이리저리 움직이다 마주치는 사람들끼리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형은 그럴 때마다 나를 소개했고, 내가 이 파티의 반쯤은 주빈인 탓에 사람들은 기꺼이 나와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려 했다. 거기에 한두 마디씩 반응해주고 넘어가야 했고, 사람들은 우리가 다음 사람으로 넘어가는 것을 양해해 주었다. 내가 주빈인 데다가 아까 활솜씨로 너무 큰 인상을 준 바람에 다들 나와 이야기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이해해 주었으니까.
문제는 그러다 보니 우리의 전진 속도가 달팽이의 그것보다도 느렸다는 점이었다. 한 걸음만 나아가도, 새로 인사해야 할 사람이 생기고, 그 사람에게 인사하고 이야기하다 보면, 다시 발걸음이 늦춰졌다. 거기에 더불어, 자꾸만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다행히 그러는 와중에도 형은, 그리고 나는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정말로 사교계 데뷔를 위해 나타난 것이 아니라, 황제 폐하께서 부탁하신 것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파라 경.”
“오오, 에아임 경. 그리고, 이게 누구신가. 사교계의 신성 아니신가.”
이 분은 파라 융파트 경이다. 아까 점심 연회 자리에 참석하는 것을 보았던 분이다. 그리고... 아까 외르트 경이 나에 관련된 것을 모두 알고 있었듯, 파라 경이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면... 융파트 공작령은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소개드리지요. 이 쪽은 기리인 모스입니다. 얼마 전 저와 의형제의 연을 맺었습니다. 기리인, 이 쪽은 파라 융파트 경이시다. 융파트 공작님의 맏아드님이시지.”
“파라 융파트라고 합니다.”
파라 경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두 손으로 그 손을 맞잡으며 공손하게, 하지만 너무 비굴해 보이지는 않게 허리를 숙였다.
“기리인 모스입니다. 만나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기리인 경, 경과는 꼭 이야기해 보고 싶었습니다. 경은 우리 융파트 가에도 은인입니다.”
“그 말씀은...”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이 자리에서도 좋고, 나중에 시간을 내어도 좋습니다. 내가 제도에서 머무는 집은 에아임 경이 머무는 집에서 멀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융파트 가의 사람을 꼭 뵙고 싶었습니다. 뵙고 설명도 드리고 질책하실 것이 있으면 받고 싶었습니다.”
“질책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아, 티르히, 이 쪽은 아까 봤죠? 명궁이자, 미틱 시의 영웅 기리인 모스 경이에요. 기리인 경, 이 쪽은 내 안 사람 티르히라고 합니다.”
“티르히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기리인 모스라고 합니다. 만나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몇 번째인지도 모르게 나는 무릎을 꿇고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티르히 씨는 수줍게 웃었다.
“기리인 경, 그럼 나중에 봅시다. 꼭.”
“네, 저도 만남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다행히 융파트 공작가는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 같다. 아까 ‘미틱 시의 영웅’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북대공의 수작에게서 미틱 시를 건져내었다는 것을 말하는 거겠지. 치유의 손 조직을 없애기도 했고 말이다. 또한, 아무래도 북부군에 비해 약한 융파트 가의 전력이 정면 격돌하는 것을 막아줬다... 이런 식으로 보고 있는 모양이다.
다행이다. 이걸 토대로 융파트 가에게서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겠다.
============================ 작품 후기 ============================
솔직히 이런 자리에 제가 들어가면 제 정신을 지킬 수나 있을지 참 의문입니다.
읽어주신 여러분들께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이 주시는 숫자 하나, 둘이 저에게는 100, 200이 되어 다가옵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음... 액션신을 넣으면 기리인이 구르면서 활쏘는(...베인? 한조?) 장면 같은 것도 넣을 수 있으니까요 ㅎㅎ
체크필통 님 // 죄송합니다 소설 속에서라도 인기남을 그려보고 싶었...ㅠㅠ
얼룩야옹이 님 //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드보험 님 //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소설 속에서라도 인기있어보고 싶었 ㅠ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