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7 6. 나 좀 가만 내버려 둬요 =========================
그리고... 오늘의 궁극적, 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황제 폐하도, 형도 나에게 기대하고 있을, 그 목적. 레이디들.
“나스프 공작님.”
“반갑소, 에아임 경. 기리인 경. 기리인 경은 내 딸을 처음 보겠군? 아르논, 이 쪽은 기리인 모스 경이다. 아까 궁도장에서 봤지? 기리인 경, 이 쪽은 내 딸 아르논이라네. 제도에서 내 일을 돕고 있지.”
아. 아까, 궁도장에서, 얼굴을 약간 붉힌 채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그 사람이구나. 그리고 그녀는 다시 약간 얼굴을 붉힌 채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아차, 하고는 손등을 내밀었다. 나는 일부러 약간 더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손등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나스프 공작이 못 말리겠다는 표정과 재미있다는 표정이 반반쯤 섞인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나는 일어나 인사했다.
“기리인 모스라고 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 네, 아, 아르논 나스프라고 합니다...”
수줍은 듯한 태도. 설마 연기는 아니겠지?
“제가 이런 자리가 처음인데다, 너무 고귀한 분들이 많이 계셔서 너무 많이 긴장되는군요. 처신에 실수가 있었던 거나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미리 밑밥을 좀 깔아두면...
“아, 아니, 괜찮아요...”
그렇게 나오겠지? 고개를 약간 숙이고 눈을 못 마주친다. 연기라고 보기엔 좀 실감나는데? 나는 옆에 서 있던 형을 흘깃 보았다. 형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마주 고개를 끄덕이고는 최대한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릴(reel) 이후 저의 춤 신청을 받아 주실 수 있으실지...?”
밑밥도 깔아뒀고, 약간 저자세까지 취해줬고, 애초에 나한테 호감이 없는 것도 아닌 거 같고, 모르긴 몰라도 내 첫 왈츠라는 것도 알고 있을 것도 같으니, 거부하고 싶어도 거부하기 힘들겠지?
“아, 기꺼이...!”
“영광입니다, 레이디.”
이럴 때는 오히려 정중하게 인사.
“아, 아니, 제가 더... 영광입니다...”
순간 나스프 경이 황급히 개입해 왔다. 더 뒀다가는 위험할 것 같았던 모양이지?
“자, 기리인 경. 주빈이 한 곳에 있으면 사람들이 좋지 않게 생각해요. 잠시 후에 황제 폐하께서 들어오실 것 같으니 그 때 다시 만나기로 하자고.”
얼마나 다급하셨으면 말투까지. 하지만, 여기서 익숙한 기색을 보였다가는 지금 한껏 올려놓은 평가가 도로 떨어져 버릴 뿐만 아니라 아르논 양이 오히려 견고한 방어막을 쌓을 수도 있겠지. 여기서는 오히려...
“저, 나스프 경. 오늘 밤이나, 혹은 나중에라도 잠시 시간을 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음? 나 말인가?”
딸만 생각하다 보니 자기에게 기술이 들어올 건 모르시지 않았을까, 하고 던져본 미끼를 덥석! 좋았어.
“네, 다름이 아니라, 제 후견인이 되어준 에아임 경을 비롯해 에아임 경의 부친 되시는 린베크 로그푸스 경도 여러 고귀한 분들을 찾아 뵙고 고귀한 의무에 대해 조언을 구하라 하셨습니다. 특히, 황가의 처가이면서도 고귀한 의무에 추호도 소홀함이 없는 나스프 공작님을 꼭 찾아뵈라고 조언해 주셔서... 염치없지만...”
물론 뻥이다. 물론 뻥이지만, 에아임 형에게 그 정도의 눈치도 없진 않겠지. 형은 곧 옆에서 “사실입니다, 나스프 경. 제가 그리 조언해 주었습니다.”라고 지원 사격을 넣어 주었다. 한 사람의 아부라면 미심쩍어할 수도 있겠지만, 두 사람의 아부(와 한 사람의 인용된 말)는 경계심을 크게 누그러뜨리는 법이지.
“허허, 과찬이시군. 확답은 하지 못하겠네만 기회가 되면 기꺼이 좋은 말을 해 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나스프 경.”
나는 인사를 하고 나스프 경과 아르논 양의 앞에서 물러나왔다. 형은 ‘이 놈 보게’ 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씨익 웃어주었다. 형이 내 귓가로 입을 가져왔다.
“너, 열아홉 살 맞아? 너무 아부가 능숙한 거 아냐?”
하하하, 하고 웃었다. 뭔가 받아쳐 주려고 생각하는데, 형이 나를 잡아끌며 한 쪽을 가리켰다.
“저 쪽에, 저 여자분, 보이지?”
회색빛이라고 해야 할 머리에, 제법 예쁘장한 이목구비, 중간 정도의 키, 그리고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단정하다고 해야 할, 쉽게 말해 수수한 드레스를 입은... 외모가 훌륭하기는 하지만 옷이나 장신구가 부족한 것을 커버해 줄만큼의 미모까지는 아닌 여자분. 비슷한 나이대의 레이디들 몇 명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저 사람이 바로 뫼르말 백작가의 여식이다. 저 회색 머리가 뫼르말 백작의 특징이지.”
“...접근이 쉽지 않겠는데요?”
“그 생각부터 하는 거냐?”
“기왕이면 임무 중심적인 사고라고 생각해 주시면 안 될까요.”
“...말을 말자. 어, 그리고...”
형이 뭐라고 말을 하려 할 때, 홀의 문이 열렸다. 음악이 딱 멎었다. 형이 잽싸게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무슨 사태인지 모를 리가 없지. 나도 늦지 않게 무릎을 꿇었다. 궁내부원이 큰 소리로 외쳤다.
“제국 모든 영토의 정당한 지배자이시며, 대륙 모든 인간과 생물들의 주재자이시며, 신앙의 수호자이신 황제 폐하와, 신께서 예비하신 폐하의 반려이신 황후 전하 입장이십니다!”
홀 안에 있는,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말소리 하나 내지 않고 조용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가운데, 악단에서 트럼펫을 동원한 힘찬 행진곡이 연주되며, 그에 맞춰 황제 폐하와 황후 전하가 단상에 마련된 옥좌로 향하고 있었다. 도착하기 전에 궁내부원이 외쳤다.
“황제 폐하께서 정하신 정당한 계승자이시며, 제도 공작이신 황태자 저하, 그리고 디트리클 시의 백작이신 아를리 공주마마 입장이십니다!”
내 ‘메인 퀘스트’의 주된 목표인 황태자 저하와,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공주마마가 들어오고 있었다. 황제 폐하 부부의 약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두 남매가 걸어들어갔다. 얼마나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을까.
“고개를 들라.”
폐하께서 그리 말하자 모든 사람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까 흐르던 조용한 음악이 아닌, 쿵짝짝 쿵짝짝 3/4박자의 춤곡이었다. 사람들은 익숙하게 줄을 서기 시작했다.
“뭐, 뭐에요?”
형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기리인, 너 바스 당스(basse danse)에 대해 들은 거 없지?”
“바스 당스요?”
“줄서서 춤추는 건데... 어, 별 거 아냐. 내 뒤에 서서 내가 하는 대로만 따라해라.”
으음. 순식간에 남자가 바깥에, 그리고 여자가 안에 늘어섰다. 형이랑 나처럼 남자들만 온 사람도 있지만, 아까 뫼르말 백작가의 레이디처럼 여자들만 온 쪽도 있어서 크게 무리없이 1:1의 성비가 맞는 모양이었다.
나와 형처럼 앞뒤로 늘어서는 경우가 특이한 모양인지, 내가 기억하는 부부들이 다들 제각각으로 짝을 맺고 있었다. 나이든 귀부인과 젊은 남자가 짝을 짓는 경우도, 그 반대도 많았지만, 대부분은 젊은 남자와 여자가 짝을 맺고 있었다. 나는 형의, ‘제도의 사교계는 사실 젊은이들을 짝지어주기 위한 기능이 크다’는 말을 기억했다.
그제야 나는 내 옆에 누가 와서 서는지 볼 정신을 찾았다. 아마 익숙하지 않은 춤을 춘다는 사실에 너무 긴장했나 보다. 내 옆에는... 지금 보니 수많은 내 나이 또래의 여자들이 내 곁에 서려고 순서를 이리저리 바꿔대고 있었다. 무려 머리에 작은 티아라(tiara)를 얹은 여자, 그러니까, 공주 전하가 내 뒷줄에 서서 떫은 페르시몬(persimmon) 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헐...
그 공주 전하를 밀어내고 내 옆자리를 차지한 것은, 머리를 멋지게 틀어올리고 검은 뿔테의 안경을 쓴, 요안나 선생님 나이 정도 되는 한 여자분이었다. 코사주(cosage)와 프릴이 잔뜩 달린 다른 여자들의 드레스와는 달리, 몸매가 많이 드러나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정숙한 매력을 내려고 애쓰는 레이디들과는 다른 모습이었고, 오히려 그게 신선한 느낌이었다.
음악이 끝나자, 안쪽 줄의 여자와 바깥쪽 줄의 남자가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다. 어제 왈츠 선생에게 배웠던 대로, 남자가 손을 올리고, 여자가 그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려놓는 느낌. 잡는다기 보다는 손끝을 맡긴다에 가까운. 진한 빨간 색의 장갑을 낀 손을 내 손 위에 올려놓은 그 여자분이 나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꽤 매력적이다.
“반가워요.”
“아, 네. 반갑습니다. 기리인 모스라고 합니다.”
“알아요. 며칠만에 나타난 사교계의 신성이자 젊은 영웅이시잖아요.”
환한 미소. 나는 새삼, 마지막으로 섹스를 한 것이 꽤나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지막이 무려 레카 시의 사교계 모임, 그 구역질나던 현장에서 수르키 씨와 나무 뒤에서 했던 거라니. 나는 눈치채이지 않게 조심스럽게 심호흡을 했다. 조심하자. 이럴 때 잘못하면 욕정의 노예가 되어 원하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다.
“레이디의 성함을 알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그녀는 나에게 맡긴 오른손이 아닌 왼손을 들어 입을 가리며 푸훗, 하고 웃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기리인 경. 물론 그게 더 귀엽긴 하지만, 그래두요.”
나는 하하, 하고 웃었지만, 속으로는 쉽지 않은 상대라는 생각을 했다. 웃음을 그친 그녀가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브 오르테, 라고 해요. 역사학과 마학(魔學)을 연구하며 제국 대학에서 강의하는 교수에요.”
나는 눈이 저절로 크게 떠지는 것을 느꼈다.
‘정보 확인.’
<이름 : 이브 오르테
나이 : 27
HP : 1395/1395
힘 : 66
민첩 : 72
지력 : 96
마나친화력 : 80
매력 : 91
지구력 : 73
특수 : 언변 90
스킬 : 매혹 Lv. 2, 정통마법 B0(4서클)>
<젊은 제국 대학의 교수입니다.>
스물 일곱에 교수라니, 어마어마하구나. 지력 96이면 나를 제외하고 본 사람 중에 가장 높은 지력이다. 그리고... 저 매혹 Lv. 2는 뭐야. 정통마법? 마법사라고? 아... 하긴 마학을 연구하려면 마법사가 되어야겠지. 그런데 왜 마탑에 들어가지 않고? 자, 잠깐만.
“혹시, 이 자리에 오신 게, 대도서관 쪽에서...?”
오르테 씨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생긋 웃었다.
“기리인 경의 영민함에 대해 명성이 높더니, 역시 명불허전이로군요. 맞아요. 이 자리에 나는 대도서관의 대표자로 왔어요.”
땡땡땡! 머릿속에서 비상시에 치는 종 소리가 막 들려오는 느낌이다. 무려 공주님을 밀어내고 이 자리, 내 옆자리를 차지할 정도의 여자. 처음 보는 ‘매혹’이라는, 능력치도 아니고 스킬을 갖고 있는 여자. 마법사. 내 몸의 상태를 연구하기 위해, 지금 그랜드 아카데미와 신전과 경쟁 중이라는, 대도서관 쪽의 사람이다. 아까 은근히 달아올랐던 아랫도리가 어느새 차갑게 가라앉았다.
시스템, 도와줘.
‘띠링!’
<이미 냉철이 발동 중입니다. 너무 지나친 냉철 의존은 체력과 정신력의 저하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자신을 믿으십시오.>
하아... 차라리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는 게 낫지, 상대가 나를 유혹하려 든다는 걸 알면서도 뭐라 할 수 없는 지금 상황이 오히려 지친다는 느낌이 든다. 오르테 씨가 나를 보며 말했다.
“기리인 경,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곧 당스가 시작하니 시간이 없군요. 있다가 잠시 시간을 좀 내 주지 않겠어요?”
그리고, 예의 그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나는 아까처럼 그 미소를 순진하게 바라보지 못하는 자신을 깨달았다.
“같이 왈츠를 한 곡 할 수 있으면 더 좋고요.”
“어... 확답은 못 드리겠습니다. 지금 이미 첫 춤을 부탁드린 레이디가 있어서...”
“한 가지 충고 할까요? 레이디의 춤 신청을 그렇게 매몰차게 거절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에요.”
확실히 쉽지 않은 상대다... 매몰차긴 뭐가 매몰차. 확답 못 하겠다고만 한 건데. 이 여자 지저분한 화법 쓰네... 내가 가만히 있으면 매몰차게 레이디의 신청을 거절한 남자가 되고, 그렇다고 여기서 받아치면 쪼잔한 남자가 될 뿐이지...
뭐라고 받아쳐줘야 하나 하고 고민하던 그 때, 대열의 맨 앞에 황제 폐하와 황후 전하가 서시고, 그 뒤에 황태자 저하가 여성 한 분과 서셨다. 잿빛 머리가 아닌 걸 보니 뫼르말 가의 여식은 아니겠구나. 음악이 새로 시작되었다. 느린 박자의 춤곡이 진행되고, 사람들은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나는 마음 속으로 박자를 세며, 형을 따라서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페르시몬은... 감입니다, 감 ㅎㅎ;;
바스 당스는 옛날 치렁치렁한 드레스 입었던 귀족들을 위한, 느린 춤입니다. 나이든 사람들도 있고 하니 릴(reel) 하기에는 그 정도가 제일 적당하겠죠. 지금 기리인의 세상은 왈츠에서 좀 더 빠른 정통 사교춤이 나오기 시작하는 그런 시기입니다. 룸바 같은 게 나오려면 아직 음악이 더 발전해야 하거든요.
곧바로 다음 편이 이어질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