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8 6. 나 좀 가만 내버려 둬요 =========================
나는 형에게서 잠시 눈을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느린 박자의 춤곡이라서, 나이든 귀부인들도 무리없이 춤을 소화하고 있었다. 젊은이들끼리 짝지어진 사람들은 스텝을 정확히 밟는 것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몸을 가까이 붙여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어느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이렇게 남녀관계가 가능한 한도 내에서 개방적이다보니 스캔들이 안 생기려야 안 생길 수가 없겠구나...
“무슨 생각을 하나요?”
다른 사람을 본받듯, 내 쪽으로 몸을 많이 기울인 오르테 씨가 속삭이듯 말해왔다. 그녀의 몸에서는 마치 마뇰리아 향 같은, 진하지 않지만 사람을 잡아끄는 향이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 정도로 흔들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몸에서 나는 향기로 치면 요안나 선생님을 따라갈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약한 모습을 연출해 보이기로 한다. 그 편이 더 쉬워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앞자리의 형이 그러는 걸 보고, 맞잡은 손을 가볍게 눈높이로 들어올리며, 오르테 씨에게 대답했다. 일부러 몸은 약간 빼는 척 하며.
“적응하기 쉽지 않다는 생각이요.”
그녀는 아까처럼, 왼손으로 입을 가리고 푸훗, 하고 웃었다. 하지만, 나는 아까처럼 그녀의 웃음이 매혹적이라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아까보다 긴장하고 있어서인가? 아니면 냉철의 도움일까?
“하긴, 기리인 경은 지금 이 곳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사람 같아요.”
그러다가, 내 얼굴을 보고, 그녀는 황급히 덧붙였다.
“아, 아니에요, 기리인 경이 지금 에티켓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거나, 고귀한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오히려 기리인 경의 얼굴이나 분위기는 이 자리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걸요.”
‘띠링!’
<이브 오르테가 ‘매혹’과 ‘언변’을 조합하여 사용합니다.>
<당신의 냉철과 고급 언변이 대응합니다. 이브 오르테의 기술이 파훼됩니다.>
시스템이 말하지 않아도, 나는 오르테 씨가 뭘 하려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를 꼬셔보겠다’? 그래서 정보를 좀 더 알아내기도 하고, 아카데미 쪽에서 대도서관 쪽으로 끌고 가 보겠다, 이거지? 흐. 여행을 출발하기 전이라면 거기에 쉽게 넘어갔겠지. 모르고 넘어갔을 수도 있고, 알면서도 ‘뭐 그까짓것’ 하면서 오르테 씨의 유혹에 넘어가, 그녀와 섹스를 하고, 정보를 이야기해 줬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그러기에는 나에게 얽힌 사람이 너무나 많다. 요안나 선생님, 에아임 형, 로그푸스 가문, 황실 기사단, 그리고... 황제 폐하. 나는 오히려 이 아가씨를 이용할 생각을 한다. 어떻게 하면 될까. 일단은, 같이 좀 어울려 줄까?
“그러는 오르테 씨야말로 이 자리가 원래 자기 자리였다는 것처럼 녹아드는군요.”
“어머, 말씀 감사해요. 레이디를 칭찬할 줄 아는 것이 훌륭한 신사의 자세랍니다.”
“진심을 말했는데 칭찬이 되다니, 일석 이조로군요.”
호호호, 하고 웃지만, 그녀의 귀 위가 약간은 빨개져 있다.
우리는 어느새 홀을 반 바퀴 정도 돌았다. 형의 말대로 바스 당스는 너무 쉬웠다. 스텝이 약간 복잡하기도 하지만, 스텝에 신경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저 손의 높이를 바꾸거나, 약간 방향을 바꿔 걷거나 하는 정도가 다였다. 그러니 남녀간에 대화가 열심히 일어나는 거겠지. 저기, 앞에 봐. 황제 폐하도 황후 전하와 이야기를 하고 계시네.
“기리인 경... 빈말이 아니라, 있다가 잠시 시간을 좀 내 주시기를 부탁드려요.”
“글쎄요. 오늘 처음 이 자리에 오는데다, 황공스럽게도 황제 폐하께서 저를 주빈으로 삼아주셔서...”
몸을 조금 더 밀착해오는 오르테 씨.
“아이,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구요.”
순간, 나는 의외로 오르테 씨가 경험이 많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만약에 경험이 많았다면, 지금 오르테 씨처럼 당기기 일변도로 하지는 않을 거란 말이다. 좀 풀어줬다가 당겨야 할텐데, 풀어주는 것 없이 스트레이트로 계속 밀어붙이는 그녀. 자, 그럼 이제 게임을 할 시간이 됐지?
“죄송합니다, 오르테 씨. 오르테 씨에게 신사이고 싶은 제 마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신사는 책임지지 못할 약속을 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기리인 경...!”
약간 다급한 목소리. 여기서 내가 다급해하거나 목소리를 올리면 오히려 말려들어간다. 최대한 정중하게, 안타깝다는 톤으로.
“그리고, 오늘 이런 자리에 제가 처음 참석하는 터라, 최대한 많은 분들을 뵙고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한데 오르테 씨와의 이야기는 길어질 수 밖에 없는 얘기이니, 다른 분들이 오히려 저를 고깝게 보지 않을까 저어되는군요. 죄송합니다.”
“기리인 경, 그러지 마시고...! 제가, 다른 분들 몫까지 보상해 드릴게요!”
낮게 속삭이는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 나는 당황이 아니고 황당해서 오르테 씨를 보았다. 아니, 왜 이래? 대체 뭘 주려고? 이렇게 나와도 되는 거야? 이 정도가 되면 대체 어떤 ‘보상’을 줄 수 있는지가 궁금해서라도 오르테 씨를 따라가 보고 싶어진다. 하지만, 나에게는 황제 폐하의 임무가 있고, ‘퀘스트’가 있다.
나는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오르테 씨. 지금 이 자리에서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군요.”
그러자 오르테 씨의 표정이 팍 굳어버리며, 아니, 울상이 되었다. 그녀가 다시 뭐라 말하려 했을 때, 마침, 음악이 딴, 딴, 따안-! 하며 으뜸 화음을 끝으로 끝이 났다. 황제 폐하와 황후 전하를 필두로 모든 사람이 박수를 쳤다. 오르테 씨는 울상이 된 채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어쩔 수 없이 박수를 쳤다.
“황제 폐하의 개회 선언이 있겠습니다!”
황제 폐하가 황후 전하와 손을 잡고 홀 한가운데로 나아가, 우리가 선 대열을 바라보며 말했다.
“금일 황실 무도회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을 이 황궁의 주인인 내가 진심으로 환영하오. 오늘의 자리는 고귀한 의무를 지닌 자들의 친목을 다지는 자리이자, 제국의 새 영웅을 환영하는 자리이기도 하오. 기리인 경, 어디에 있는가?”
나는 오르테 씨에게 양해를 구하고, 손을 놓은 다음, 그녀의 옆으로 지나가 대열의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폐하에게 군례를 올렸다.
“소신 여기 있사옵니다, 폐하.”
“어떤가, 즐기고 있는가?”
“예, 폐하. 고귀한 분들께서 많이 환대해주시고 지도 편달해 주셔서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내가 특별히 여식이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음에도, 여식이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 자리에 딸과 함께 참석하였군. 그렇지 않소, 나스프 경?”
저 먼 곳에 있던 나스프 경이, 속마음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이미 기리인 군의 미모에 대해서 황궁 안팎으로 소문이 파다한 줄로 아뢰옵니다. 또한 그가 오늘 오후에 보여준 무용은 저 전설속의 명궁 온케오 님에 비견되는 것이 아니었사옵니까? 그러니 사교계의 신성이자, 뭇 레이디들의 궁금증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그것이 이상한 것이겠지요.”
황제 폐하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역시 소문만큼 빠른 것이 없군! 기리인 경, 즐거운 무도회 되기를 바라네. 그럼, 오늘 밤의 무도회를 시작하겠소!”
빰빠바밤-! 악단 속에 있던 트럼펫과 호른(horn)이 팡파르를 연주하였다. 팡파르가 끝나고 다시 약간은 템포가 빠른 음악이 나오기 시작하자, 모든 사람들이 대열을 풀고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부는 산더미같이 쌓인 음식을 향해 움직이고, 일부는 샴페인 잔을 들고 움직이는 급사에게 손을 들어보인다.
나는 마침 내 곁을 지나던 급사에게서 샴페인 잔을 하나 받아들었다. 이제는 형과 독립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다. 형은 형만이 캐낼 수 있는 정보를 캐낼 것이고, 나는... 아까 말한 대로, 레이디들에게 춤을 청해 봐야지. 나는 은근슬쩍, 나를 다시 잡으려는 오르테 씨를 피해 사람들 사이로 숨어든 다음, 나스프 경과 그 딸 근처로 다가갔다.
나스프 경의 주변으로는 원이 그려져 있었다. 이미 몇몇의 사람들이 경의 주변에 모여 하하호호 웃으며 담소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르논 양도 그 곁에 있었다. 예의바르게, 아버지의 곁에서 하하 호호 웃고 있지만... 글쎄. 과연 자기보다 스무 살 정도 많은 아저씨들의 복잡한 대화를, 레이디의 소양으로 따라가고 이해할 수 있다 한들, 재미있어 할까?
그때 아르논 양이 지루한 듯 주변을 둘러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들어보였고, 아르논 양은 얼굴을 붉히면서 웃더니, 아버지의 팔을 끌어당겨 뭐라뭐라 속삭였다. 나스프 공작은 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를 보더니, 약간은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헹. 당신 생각을 내가 모를 줄 알고. 당신이 뫼르말 백작가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곧 권력의 중심은 당신에게서 뫼르말 백작가로 이동하게 될 거야. 그렇지? 물론 황태자 저하가 외삼촌인 당신을 바로 무시할 수야 없겠지만 말야. 당신은 보험이 하나 필요하다고 느낄 거야. 그리고, 황제의 방패라 불리는 로그푸스 가의 후견인이자, 에아임 형의 의동생이라면, 충분히 그 역할을 해 줄 수도 있다, 이렇게 여기는 거겠지.
미안하군, 당신의 의사에 완전히 부응해 줄 수 없어서.
나는 이런 심사를 속으로만 생각한 채 나스프 공작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그러자 아르논 양은 대열에서 빠져나와 내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 대열에 있던 모든 사람이 우리 둘을 바라보는 가운데, 아르논 양은 내 앞에 와서 섰다.
“오셨군요, 기리인 경.”
“아까 약속한 바가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레이디.”
“아이, 참. 레이디라고 부르지 마세요. 이름을 불러주세요.”
“실례했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아르논 양.”
나는 마침 옆을 지나가던 시종에게서 잔을 하나 더 집어들어 아르논 양에게 건넸고, 아르논 양은 웃으면서 가볍게 무릎을 굽혀 보였다. 나는 내가 들고 있던 잔을 아르논 양에게 내밀어 보였고, 아르논 양은 역시 웃으면서 잔을 가볍게 부딪혀 왔다.
한 모금. 하아, 역시 황실 무도회에서 나오는 샴페인은 레카 시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구나. 달디단 포도를 직접 따서 먹는 것 같은 청량함과 달콤함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아르논 양은 한 모금 샴페인을 마신 뒤, 여전히 웃으며 나에게 물어왔다. 저 웃는 것도 레이디의 교양 중 하나인가. 힘들겠다..
“기리인 경, 파티는 즐거우세요?”
“레이디의 앞이라 체면을 차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솔직해져야 겠지요.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정신없는 쪽이 더 큽니다.”
“호호호. 그러실 수밖에요. 저도 처음 왔을 때는 제가 마시는 게 뭔지 먹는 게 뭔지 하나도 몰랐거든요.”
“전혀 그러실 것 같지 않은데...”
“물론 지금은 이런 자리가 익숙해졌으니까요. 기리인 경, 그거 아세요? 익숙해질수록 덜 두근거리는 법이에요.”
“아... 그렇겠군요. 새로운 사람을 보는 것보다는 늘 보던 사람들과의 사교를 하기 마련이니까...”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겠는걸? 아르논 양은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실은 지금 제가 기리인 경을 독점하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답니다.”
응? 주변을 둘러보자, 아닌게 아니라 많은 레이디들이 우리 쪽을 흘깃거리고 있었다. 나스프 공작의 영애라서 뭐라고 하지는 못하겠는데, 질투와 불만은 생기는 그런 건가보지? 그리고 저 쪽에서 아직도 포기 못한 듯 오르테 씨가 내 쪽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이크.
마침 그 때, 음악이 끝나고, 새 음악의 전주가 시작되었다. 동시에, 홀의 안쪽으로 남녀가 손을 잡고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아르논 양에게서 잔을 받아들고,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에게 잔을 건넨 후 (아마 이럴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서 근처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르논 양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아르논 양, 제 첫 왈츠의 상대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영광이에요, 기리인 경.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우리 둘은 손을 포갠 채 홀의 중앙으로 나갔다. 어제 배웠던 대로. 망신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처음 추는 사람이니 실수를 하더라도 파트너가 이해해 줄 거다, 라고 왈츠 선생님이 어제 그랬지. 내가 내민 왼손에 아르논 양의 오른손이 올라가고, 내 손이 아르논 양의 허리 위에 올라갔다. 아르논 양이 가볍게 얼굴을 붉히며 왼손을 내 오른어깨 위에 올리고, 우리 둘의 몸이 조금 더 가까이 붙는다. 하나, 둘, 셋, 둘, 둘, 셋.
============================ 작품 후기 ============================
최근 연재분을 읽어봤습니다.
제가 봐도 왜 조회수가 떨어지는지 알 것 같더군요. 죄송합니다.;
심기일전해서 다시 열심히 써 보겠습니다.
오르테는 사실 꽤 경험이 많은 사람입니다.
하필이면 같은 계통의 더 큰 기술을 가진 기리인을 만나 기술이 박살나서 그렇지요.
아, 오해의 여지가 있을까봐 미리 설명드립니다만,
기리인 이외의 캐릭터에게 스킬이 있을 경우, 이 스킬은 캐릭터가 의지를 가지고 기술명을 외쳐서 발동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하게 어떤 행동을 하면 그것이 스킬처럼 발동되는 것에 가깝습니다. 쉽게 말하면 '못 박기!'를 외치고 못을 박는 것이 아니라, 목수가 하도 못을 많이 박다 보니 못 박기 스킬이 생겨 더 익숙하게 못을 박는 것이라 할까요.
읽어주시는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선, 추, 코, 쿠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하나 둘이 제게는 백 이백으로 느껴집니다.
쓰굴 님 // 기리인은 활쟁이이니... "류요 와가테키오 쿠라에"?! 감사합니다~!
eastarea 님 // 능력이 많아질수록 열심히 구르겠죠. 그리고 기리인도 다 기억 못할거에요. 정보 확인이 있으니까 안심하는거죠 ㅎㅎ 감사합니다!
카드보험 님 // 그거 이번 챕터 끝나고 오마케로 꼭 쓰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급급여율령 님 // 과분한 칭찬 정말 감사합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사실 기리인도 정보 확인 없으면 ㅎ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