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9 6. 나 좀 가만 내버려 둬요 =========================
꽤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춤을 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춤추는 사람들을,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들을 보고 있었다. 예상도 했고, 각오도 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지금 주목받는 신인이니까, 일거수 일투족이 관심의 대상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예상했던 일이다.
지금은 춤에 더 집중하자. 하나, 둘, 셋. 당기고, 둘, 셋. 뻗으면서, 둘, 셋, 받쳐주고, 둘, 셋. 생각보다 아르논 양은 좋은 반응을 가지고 있었다. 뭐랄까... 뻣뻣한 편이긴 한데, 합이 잘 맞는다고 해야 하나? 내가 밀 때 밀 것을 예상하고 당겨주고, 내가 끌 때 끌 것을 예상하고 힘을 빼 준다. 자연스럽게 동작이 경쾌하고 박자를 잘 타게 된다. 빠르다고는 할 수 없는 왈츠의 동작. 숨 차거나 힘들 것이 하나도 없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즐겁다.
그리고 나만 그리 생각한 게 아니었나보다.
“기리인 경, 정말 처음이 맞으세요?”
“신께 맹세하고 처음입니다.”
“그런 것 치고는 너무 잘 추세요.”
“아르논 양이 반응이 좋으셔서 그런 겁니다.”
“말씀 감사해요.”
후훗, 하고 미소짓는 아르논 양. 아버지의 외모를 닮아서일까. 하얀 색의 머리카락에, 눈썹도 하얀 색이었다. 얼굴까지 희었으면 너무 창백해 보였을 외모였겠지만, 피부색이 원래 약간 까무잡잡한 탓에 색다른 매력을 주고 있었다. 벗겨놓으면, 그 부분의 털도 하얀 색일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가볍게, 아르논 양의 발을 밟았다.
“아얏.”
“어, 이런, 죄, 죄송합니다. 괜찮으신지...?”
“괜찮아요.”
그러더니 아르논 양은 다시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오히려 이제 기리인 경이 춤이 익숙하지 않다는 걸 믿을 것 같은데요?”
나는 오늘 처음으로 얼굴이 약간 붉어지는 걸 느꼈다. 자, 다시 춤에 집중하자. 집중하지 않아서 아까같은 사고가 난 거니까. 한 번은 귀엽게 봐 주지만, 두 번부터는 짜증이 나기 시작하는 게 사람이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다시 우리는 아까의, ‘합이 잘 맞는’ 분위기로 돌아갔다. 내가 이끄는 대로, 아니, 내가 이끌기도 전에 그녀는 이끌려와 있다. 춤 자체가 즐거운 분위기. 하나, 둘, 셋, 둘, 둘, 셋. 딴, 따안-.
악단이 연주하던 곡이 끝났다. 왈츠가 끝나자, 주변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아르논 양을 보고 있었다. 남자들은 웃으며, 혹은 무표정하게, 혹은 질투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하고 당황해하고 있을 때, 아르논 양이 내 어깨 위에 올렸던 왼손을 놓고, 나에게 맡겼던 오른손을 축으로 화려하게 빙글- 돌더니, 나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 쪽은 황제 폐하와 황후 전하가 앉아계신 곳이었다. 아하. 나는 아르논 양의 무언의 언질을 알아채고, 그녀가 치맛자락을 들며 허리를 숙일 때 나 역시 손을 가슴 앞으로 하며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보였다. 박수 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고개를 들자 황제 폐하와 황후 전하도 박수를 치고 계셨다. 황제 폐하는 흐뭇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짧게 고개를 끄덕이셨고 – 내가 첫 상대를 고른 이유를 대략 짐작하신 모양이다. - 황후 전하는, 자신에게 조카가 되는 아르논 양을 아까 나스프 공작과 비슷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흐음. 일단 황후 전하와 나스프 공작 사이는 별 불화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군. 그리고, 그 옆에 앉아있던 황태자 전하는 무관심한 표정이고... 이크. 티아라를 얹은 공주님은 약간 뿔이 나신 것 같다. 얼른 도망가자.
나는 아르논 양의 손을 잡고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다시 조용한 음악이 흐르며 사람들은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소란스러움에서 약간 떨어진 곳까지 와서야 우리 둘의 손이 떨어졌다. 누가 뺐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감사합니다, 아르논 양. 첫 왈츠의 상대로 최고의 선택이었던 것 같네요.”
“과찬이세요, 기리인 경. 저도 너무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자, 여기에서 끝내면 춤을 춘 보람이 없지...
“잠시 숨이라도 고르고 가시지 않으시겠어요?”
“그리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면 마음 상하려고 하던 참이었는걸요?”
허이구, 이 여자 보게. 나는 아르논 양과 함께, 앉아서 식사를 하거나 담소를 나눌 수 있는 테이블 쪽에 앉았다. 앉으면서 사방을 둘러보니, 이 홀에는 발코니들이 몇 보였다. 그 발코니들은 이미 서로 무슨 말인가를 속삭이는 젊은 남녀들로 점령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발코니를 넘어 그 옆 나무와 풀숲 속으로 사라지는 사람들도 있으려나. 여긴 1층이니까.
...그러다가 나는 잠시 레카 시에서 봤던 그 구역질나는 광경을 떠올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생각하지 말자. 지나가던 궁내부원에게서 샴페인 잔 두 개를 집어든 나는 하나를 아르논 양에게 내밀었고, 그녀는 웃으며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까딱하면서 잔을 받았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은색의 장갑이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건배할까요?”
“기리인 경은 뭐에 대해 건배하고 싶으세요?”
“가슴뛰는 순간들을 위해, 어떠신가요.”
나는 아까 그녀가 두근거림이 없어진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 말했다. 그녀는 약간 얼굴을 붉히더니 말했다.
“좋아요. 가슴뛰는 순간들을 위해.”
쨍. 나는 한 모금 샴페인을 넘기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확실히, 예쁘다. 아르논 양도 그렇지만, 평균적으로 이 홀 안에 있는 레이디들의 미모 수준이 높다. 화장, 머리손질, 드레스 등 관리 수준이 높아서이기도 하겠지만, 어... 아무래도 오래전부터 미모의 여자들이 많이 가문으로 들어가다 보니(정실이든, 미스트레스든) 그 미모가 유전되고 유전되어 그런 것일 거다. 에아임 형만 봐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얼굴이잖아.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퀘스트를 어떻게 달성해야 좋을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눈치채이지 않게, 손가락으로 허공에 떠 있는 ‘버튼’을 눌러 ‘퀘스트’ 창을 띄웠다.
<메인 퀘스트(3) - 황태자의 암살을 막아라>
<#1. 단서 수집>
<퀘스트 목표
1) 뫼르말 가문에 대해 단서를 수집하세요 – 1/3
2) 뫼르말 가문의 여식에 대해 단서를 수집하세요 – 0/4
3) 나스프 공작과 남부 공작령의 상황에 대해 단서를 수집하세요 – 2/5
4) 융파트 공작과 중부 공작령의 상황에 대해 단서를 수집하세요 – 0/5
5) 사교계에서 도는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저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0/3>
시스템, ‘유도’를 부탁해.
‘띠링!’
<고급 언변의 하부 기능인 ‘유도’가 발동합니다. 당신은 대화 상대에게서 이야기를 끌어내거나, 그 이야기를 토대로 당신이 원하는 쪽으로 협상을 전개하거나 할 수 있습니다. 유도의 스킬레벨은 현재 Lv. 1이며, 고급 언변 스탯 92의 보정을 받습니다.>
좋아. 먼저 남부 공작령의 상황에 대해 알아보자. 그녀를 공략해보고, 모자란 건 나중에 나스프 경으로 채워보자.
“아르논 양은 남부에서 오셨지요? 남부는 어떤 곳인가요?”
“남부요? 모든 것이 빠르게 자라는 곳이지요.”
“흥미로운 말씀을 하시는군요.”
아르논 양은 배시시 웃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남부는 주로 농업을 하지요. 넓은 평원에, 소를 끄는 농부들이 밀밭을 갈고, 씨를 뿌리면, 며칠만 지나도 어느새 싹들이 훅 하고 올라오지요. 기리인 경, 혹시 대나무라는 나무를 아시나요?”
“말로만 들어봤지 본 적은 없습니다. 저는 차디찬 북부에서 온지라...”
“숲 중에 대나무로만 만들어진 숲이 있어요. 저희 고향에도, 성을 약간만 나가면 있지요. 거기에 가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차분해지는 기분이 든답니다. 비가 뿌린 다음 날 가 보면, 대나무의 새 순이 여러 개 땅을 뚫고 올라오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게 뭔지 아세요? 몇 시간만 지나면 손가락만했던 새 순이 무릎 높이까지 올라온답니다.”
생각보다 화술이 좋은 아르논 양이었다. 리미가 ‘화제를 끊이지 않는 법’에 대해 배운다더니 그건가. 어쨌든 나는 적절하게 받아줘야 한다.
“아, 그래서 ‘비 온 뒤의 대나무 숲’이라는 말이 있군요?”
“맞아요. 아마 그 비유는 남부에서 생기지 않았을까요?”
“재미있군요. 기회가 된다면 남부를 한 번 구경해보고 싶네요.”
“언제든지 오세요. 온갖 곡물과 과일, 먹거리가 풍부하고, 사람들의 인심도 넉넉한 곳이랍니다.”
유도, 유도.
“농업이 위주라니, 공작님께서도 늘 날씨 걱정을 하시겠군요.”
“네, 맞아요. 비가 오지 않으면 소출이 뚝 떨어지거든요. 제국의 곡창인 남부의 곡물이 나오지 않으면 제국 전역이 몸살을 앓으니까, 남부로서도, 그리고 제국으로서도 중요하죠. 정 비가 안 올때는, 마탑의 대마법사님을 초청해서 기후 변화 마법을 쓰기도 하지만... 그 마법은 워낙 대마법이라 하실 수 있는 분이 많이 없으셔서...”
그거야, 제가 아주 잘 알지요. 따지고 보면 그놈의 기후 변화 마법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거니까.
“남부 영지로서도 고민이 많으시겠습니다. 곡물도 곡물이지만, 당장 작황이 나쁘면 영지를 꾸려나갈 예산이 적어지니까요. 다각화를 위해 고민이 많으시겠어요.”
“아...”
아르논 양의 눈빛이 약간 흐려졌다. 어. 실패인가. 좋지 않은 화제를 꺼낸 건가... 아니, 내 감은 그런 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조금만 기다려보자.
“안 그래도... 아버님이 그 때문에 고민이 많으세요. 요 몇 년간 계속 작황이 좋지 않아서... 남부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생겼거든요.”
빙고!
“아... 그렇군요, 그런 일이...”
“아버님이 가지고 계신 곡물을 풀어 사람들을 먹이고는 있는데, 여의치만은 않다고 해요. 아버님은 그래서 남대륙으로부터 곡물을 사들이는 방안도 생각하시고 계시다고 해요.”
“남대륙... 그렇군요. 그러면, 음, 남부 대수림으로 아무리 길이 나 있다고 해도 곡물을 실은 수레 여러 대를 보내는 것은 무리일테고, 대수림을 우회해서, 대륙 동쪽의 항구들을 사용해야 하겠군요?”
“그 점이 아버님의 고민거리세요. 동쪽의 항구들은 뫼르말 백작님이나 크라스프 자작님 같은, 아버님과는 사이가 좋다고만은 할 수 없는 분들의 차지라...”
좋아, 좋아.
“아... 그럼 공작님께서도 그들과의 관계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계시겠군요.”
“네, 어... 남의 흉을 보고 싶지는 않지만, 뫼르말 백작님은 좀 너무하세요. 평소에 대균열에서 캐내는 광물을 비싸게 사 주는 은혜도 모르고, 마구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것 같더라구요... 아버님께서 말씀은 안 하시지만 속을 너무 끓이시는 거 같아서 걱정이에요...”
‘띠링!’
<메인 퀘스트(3) - 황태자의 암살을 막아라>
<#1. 단서 수집 - 업데이트!>
<퀘스트 목표
1) 뫼르말 가문에 대해 단서를 수집하세요 – 2/3
2) 뫼르말 가문의 여식에 대해 단서를 수집하세요 – 0/4
3) 나스프 공작과 남부 공작령의 상황에 대해 단서를 수집하세요 – 5/5 완료!>
크으. 예상대로. 공작을 직접 공략했으면 이렇게 한 번에 고구마 캐듯 캐어지지는 않았을 거다. 약한 고리인 딸을 공략하니, 꼭 공작에게 묻지 않아도 여러 가지를 알아낼 수 있구나.
‘띠링!’
<그간 유도 기술의 경험치가 쌓여 유도의 스킬 레벨이 증가합니다.>
<유도의 스킬 레벨이 Lv. 2로 상승하였습니다.>
좋아, 좋아. 나는 유도를 종료했고, 그러자 그녀는 흠칫 놀라더니, 확 얼굴을 붉히며 두 손으로 뺨을 감쌌다.
“어머, 제가 별의별 이야기를... 기리인 경, 실례를 범해 죄송해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아르논 양. 오히려 제가 가 보지 못한 곳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저는 너무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용건도 끝났고 말이죠. 여기서 내가 이렇게 선을 그어줘야...
“아...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히려 그 쪽에서 더 안달을 내겠지.
============================ 작품 후기 ============================
일단 이번주까지만 낮 1편 밤 2편의 템포를 유지해보겠습니다.
그리고 나서도 큰 변화가 없으면 아쉽지만 연참모드는 종료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읽어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시는 분들께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관심이 제게는 큰 힘이 됩니다.
얼룩야옹이 님 // 감사합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안 보낼 수도 없고 참 마음이 복잡할 거에요 ㅎㅎ;; 그리고 오르테 양이 잘못한 건 없죠. 기리인이 사기캐일 뿐..
eastarea 님 //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