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0 6. 나 좀 가만 내버려 둬요 =========================
아주 살짝, 일어나는 척을 한다. 약간 당황해서 따라 일어나려고 하는 아르논 양을 보며, 나는 ‘귀엽다’는 따뜻한 생각과, ‘좋아, 잘 끌려오고 있군’ 이라는 차가운 생각을 함께 한다. 뜨겁고 차가운 생각이 공존하는 것을 이상해할 필요 없다. 그게 ‘냉철’이니까. 나는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아르논 양, 한 가지 여쭤봐도 될지? 만약 예의에 어긋났다 여기시면 대답해 주시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당신과 관련없는 질문을 할 거라서 말이지... 아르논 양은 일어났다 앉았다 하느라 약간 당황한 상태에서 내가 질문까지 하자 약간 더 당황한 거 같았다.
“네, 네?”
아까의 차분하면서도 다정한 모습보다, 이런 소녀같은 모습이 본 모습이 아닐까? 하지만 웃으면 안 된다. 나는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제가 사교계에 처음이라, 고귀하신 분들이 서로 어찌 연결되는지를 잘 모릅니다. 친절하신 아르논 양이라면 제 소박한 물음에 친절히 대답해 주시지 않을까 하여...”
“네, 여쭤보세요.”
아까의 신색을 회복한 아르논 양. 약간 띄워준 것은 본인이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표정이 약간 굳어있는 것 같아서였다. 약간 칭찬을 해 주면 좀 풀리지 않을까 하는 계산이었고, 계산이 맞은 것 같았다.
“오찬 모임에서, 황후 전하께서 나스프 공작님께 오라버니 라고 부르셨는데...”
아르논 양이 푸훗 하고 웃었다.
“네, 황후 전하께서는 저의 고모님이 되세요.”
“그럼 황태자 전하와...”
“네, 사촌 간이에요.”
“그러셨군요. 두 분의 얼굴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두 분께서 별로 대화를 나누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
잠시 아르논 양은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잠시 주변의 눈을 의식한 후, 말했다.
“기리인 경께서 옳게 보셨어요. 사실 황태자 저하께서는 저와 썩 친한 편이 아니세요.”
“아...”
나와 비슷하거나 나보다 약간 나이많을 그녀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아르논 양에게는 약간 불안정한 매력이 있었다. 지금 하는 이야기가 주변을 살펴야 하는, 남이 들으면 약간 곤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 정도로는 어른스럽고 경험이 있지만, 그 이야기를 하고 약간 울적해하는 표정을 짓는 것이나, 애초에 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 선택지가 있다는 걸 생각하지 않는 소녀스러움이 있었다. ‘아카데미의 여왕’이었던 리미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불안정함이 충돌하는 그녀에게는, 정말 묘한 매력이 있었다.
만약 내가 아르논 양의 선생님이었다면 그 불안정한 매력을 의식적으로 발휘해 보라고 하겠지만... 뭐, 오지랖이지. 애초에, 아르논 양 정도라면 적극적으로 매력을 발휘해 좋은 남자를 엮어야 할 정도의 위치도 아닐 테고 말이지.
“그러시군요...”
그녀의 소녀스러움에 공감하는 내가 있는가 하면, 여기서 공감하는 포지션을 취해주면 좀 더 유도하기 쉽지 않을까 생각하는 나도 있다. 조금 더 이야기를 끌어내 볼까.
“그러시다면 이런 자리에서 마주치시면 좀 불편하시겠군요.”
“그러지는 않아요. 황태자 저하께서는 이런 자리에 잘 안 나오시거든요.”
‘띠링!’
<메인 퀘스트(3) - 황태자의 암살을 막아라>
<#1. 단서 수집>
<퀘스트 목표
5) 사교계에서 도는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저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1/3>
“그러셨군요. 아르논 양의 입장에서는 다행이라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당장은 다행이기는 하지만... 저는 황태자 저하와 친해지고 싶은데, 저하께서는 제가 찾아갈 때마다 냉랭하시기만 하시니... 이런 자리라도 있어서 좀 더 친해지고 싶어요.”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돌려 홀 안에서 황태자 저하를 찾았다. 황태자 저하는 샴페인 잔을 들고 웃으면서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약간은 나이차이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흐음. 또래의 미혼 남자들이 많이 없다 보니 그런 거...라는 황제 폐하의 말씀이 맞는 건가. 그나저나 웃으면서 저렇게 대화를 하는 사람이라면, 비사교적인 사람이라 아르논 양에게 차갑게 대하는 건 아니겠군?
“혹시 황태자 저하께선 황후 전하나 공작님 같은, 외가의 인물들과도 썩 사이가 좋지 않으신가요?”
아르논 양은 눈을 약간 크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아셨지요? 맞아요. 아버님께서는 황태자 저하와 같은 자리를 하는 날이면 집에 돌아오셔서는 영 힘든 표정을 지으실 때가 많았지요. 지금도 그렇구요. 황후 전하께서 황태자 저하에게 아무리 간곡히 말하고 혼을 내도 아버님과 황태자 저하의 사이는 좋아지기 힘들었다고 하셨어요.”
‘띠링!’
<메인 퀘스트(3) - 황태자의 암살을 막아라>
<#1. 단서 수집>
<퀘스트 목표
5) 사교계에서 도는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저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2/3>
대충 그림이 그려지는 것도 같다. 한 가지만 더 물어보면 좋겠는데... 하지만 ‘황태자 저하가 누군가를 만난다던데요?’하는 가십을 물어보기에는 아직 친분 관계가 명확하지 않으니... 게다가 황태자 저하와 스스로 친하지 않다고 하는 아르논 양이니, 아르논 양에게 황태자의 일을 계속 물어봐야 헛수고이겠구나. 황제 폐하에 대해서는 잘못 말했다가 불경죄로 경을 칠 수 있으니 조심할테고 말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얼른 다가가 아르논 양의 의자를 약간 뒤로 빼 주었다. 아르논 양은 얼굴에 잔뜩 아쉬움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이미 우리 둘이 왈츠도 한 곡 춘 데다가 꽤 긴 시간을 서로 이야기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나를 잡으려 들지는 않았다.
“아르논 양, 오늘 첫 춤의 상대가 되어 주셔서 영광입니다. 이야기도 즐거웠습니다.”
“제 쪽에서 드릴 말씀이에요, 기리인 경.”
그녀는 살짝 상체를 내 쪽으로 기울였다. 까무잡잡한 빛의 가슴골이 드레스 위로 드러났다. 그렇게 볼 게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훌륭한 라인이었다. 내가 거기에 눈을 잠시 뺏긴 사이 아르논 양은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나중에 좀 더 편한 자리에서 뵐 수 있을까요?”
“기꺼이 그리 하겠습니다. 저는 에아임 로그푸스 경의 댁 별채에서 묵고 있습니다.”
“아...!”
그녀는 얼굴을 붉히다가, 곧 내가 ‘그리로 오라’는 뜻이 아닌 ‘그리로 서신을 전달해 달라’는 뜻으로 말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굴을 더 붉히며 잠시 도리질을 쳤다. 불안정한 매력이 확실하구먼. 그녀는 빨개진 얼굴로 손등을 나에게 내밀었고, 나는 무릎을 꿇으며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즐거웠어요, 기리인 경. 다음에 또 뵈어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아르논 양이 총총히 아버지에게로 돌아갔다.
흐음... 나는 잠시 접시로 가 손가락 크기 정도로 포장된 음식 하나를 접시에 담고, 곧바로 포크에 찍어 입으로 가져가 우물거리며 생각했다. 처음 내 계획은, 아르논 양을 통해 정보를 꽤 많이 얻음으로서 완전히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 다음 계획은 이거였다. 춤이 총 세 번이라면, 두 번째 춤 쯤에 뫼르말 가의 여식, 황태자가 빠져있다는 여자에게 접근해 춤을 추고, 그걸 빌미로 아까 아르논 양과 그러했듯 정보를 좀 더 캐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황태자가 질투든 경고든 뭐든 하기 위해 나에게 올 것이고, 그걸 계기로 좀 더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레이디 뫼르말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비슷한 나이 또래의 여자들 여럿과 함께 있었다. 나는 내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수많은 경험에서 얻은 일이었다. 저렇게 여자들만 있는 집단에서 한 명의 여자를 집어 수작을 부리면? 그녀들은 친구들을 의식해서, 마음은 호의적이더라도 결코 호의적인 답변을 주지 않는다. 게다가, 그녀들의 친구들이 나에 대한 악평을 퍼트릴 수도 있다. 아니, 그럴 것이다. 더더군다나 여기는 없는 말도 만들어낸다는 사교계니까.
흐음, 이걸 어쩐다... 아르논 양에게 부탁해 볼 걸 그랬나. 아니, 그건 무리였을 거야. 집안과 알력이 있다고 했으니 말야. 그럼, 중간에 다른 레이디를 거쳐야 하나? 아니면... 화장실이라도 갈 때까지 잠시 기다려야 하나? 하지만 그러다가 황태자 저하가 우연인 척 춤을 먼저 신청하기라도 하면? 아아. 귀찮은데 정공법으로 얘기할 걸 그랬나...
“겨우 찾았군요.”
내 등 뒤에서 누군가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놀라 돌아보니, 씨익 하고 미소를 짓고 있는 이브 오르테 양이 서 있었다.
“끈질기시군요.”
“인내는 레이디의 덕목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일관성은 신사의 덕목이기도 합니다.”
사고를 방해받은 나는 약간의 짜증을 담아, 한 마디도 밀리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받아쳤다. 오르테 씨는 약간 질린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저, 기리인 경. 왜 그렇게 저희 대도서관 쪽과는 얘기도 하지 않으려 하시는 거죠?”
“저에게 이득이 될 것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대도서관의 그 방대한 자료가 없이는, 기리인 군의 현상이 과거 문헌에 기록된 것이 있는지 찾아보는 일이 불가능할 텐데요?”
번역하면? 너 협조 안하면 우리 기록 안 보여 줄 건데.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대도서관의 정책이 ‘모으고 기록하고 유지한다’가 아니라 ‘내 손에 들어오지 못할 것은 망쳐놓아라’라는 것인 줄은 몰랐습니다.”
번역하면, 니네 이렇게 치졸하게 나올래? 이 정도로 끝내서는 안 되지. 나는 한 마디 더 받아치기로 했다.
“오르테 씨께서 아실지 모르겠지만... 제 나이 또래의 남자들은 반발력이 강하지요. 한 번 밀어붙여진 터라, 오히려 저는 대도서관과 멀어지는 쪽으로 되튕기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번역 : 나를 기분나쁘게 해서 나 니네랑 안 놀아.
아니나다를까 오르테 씨는 다시 아까의 그 울상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 쯤에서 그녀를 한 번 당겨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나치게 밀기만 했고, 그리고 오르테 씨의 말대로 대도서관의 협력 없이는 연구가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으니까.
“오르테 씨.”
“이브라고 부르세요, 기리인 경.”
“...이브 씨. 혹시 제 부탁을 하나 들어주실 수 있으실까요?”
“말씀만 하세요.”
드레스를 벗으라고 해도 벗을 기세로 오르테 양이 말했다.
“혹시, 뫼르말 백작가의 저 여자분과 교분이 있으신지?”
이브 씨는 내 손이 가리키는 회색 머리의 그녀를 보고는 말했다.
“어, 알리시아를 말하는 건가요? 당연하죠. 아카데미 후배였는걸요.”
오호? 그냥 던져봤는데, 의외로 큰 물고기가 물릴 것 같은 기분인데?
“이브 씨가 부탁하면 들어줄 정도의 친분인가요?”
“그렇죠. 같은 동아리도 하고 꽤 친한 후배였으니까요.”
오히려 자랑하거나 뻐기는 것이 아닌 담담한 서술을 보고 나는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있었다. 진짜 친한 모양이구나.
“그럼, 제 부탁을 하나 들어주신다면 오늘이나 이후에라도 이브 씨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다고 약속할게요.”
아직 승낙하겠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브 씨도 내 말을 눈치챈 듯, 잠시 심사숙고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어떤 부탁인가요? 알리시아를 이용하려 드는 부탁이라면 거절하겠어요.”
“아, 그런 것 아닙니다. 그저 알리시아 뫼르말 양과 춤을 한 번 출 수 있게 다리를 놓아주십사 하는 부탁입니다.”
설마 내가 그런 부탁을 할 줄은 몰랐던지 이브 씨는 눈을 깜빡였다. 그만큼 내 부탁이 의외라는 것이겠지. 알리시아 양이 그렇게 특출난 외모도 아니고, 수수한 쪽에 가까우니까 말이다.
“저 자리를 보니, 직접 말하기가 좀 그렇겠군요... 알았어요. 한 번 말은 해 볼 게요.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아요.”
그렇게 말하고, 이브 씨는 뫼르말 양 쪽을 향해 걸어갔다.
============================ 작품 후기 ============================
오늘밤은 멘탈이 회복이 안 돼서 한 편만 올리겠습니다.
글을 왜 쓰나 생각해 봤습니다.
저는 글을 쓰는게 재미있고, 여러분이 읽어주시고 선추코쿠 주시는게 행복해서 썼습니다.
그런데 글을 읽는 사람이 너무 적은 것이 안타까워 이런저런 시도를 하다 보니
어느새 글보다 글을 써서 인기를 얻는 것이 목표가 되었습니다. 주객전도가 된 거죠.
다시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
제가 재미있게 적는, 쓰는 과정이 재미있는 글을 적자고 다짐했습니다.
인기는 뭐... 열심히 적어서 알아봐 주시면 좋고.
안 알아봐 주시면 슬프지만 그래도 제가 적으면서 재미있었으면 됐죠 뭐.
천재지변이나 집안의 사고가 없는 한,
어떻게든 더 쓰는 저도 읽는 여러분도 재미있는 글을 끝까지 적어나가겠습니다.
나중에는 좀 더 흥미로운 제목과 자기소개와 전개로 도전해보든가 하겠습니다.
푸념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그래도 기리인은 먹고 버리는 등의 행위는 하지 않았으니 예쁘게 봐주세요 ^^;;;
eastarea 님 // 언제나 감사합니다!
체크필통 님 // 경험이 있고, 얼굴이 먹어주니까.. 솔직히 쓰면서도 부럽습니다 ㅠㅠ
|라랄라랄라| 님 // 위의 후기로 갈음합니다. 초심을 일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