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143화 (143/309)

00143 6. 나 좀 가만 내버려 둬요 =========================

“기리인 경은... 뭔가 알고 계시는 건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신이시여, 거짓말을 용서해주세요.

“순수한 추론에 의한 결과일 뿐입니다.”

“세상에...”

나는 새하얗게 질린 알리시아 양의 얼굴을 보고, 더 밀어붙이는 걸 포기했다. 만약 울어버리거나 기절해버리기라도 하면 내 모든 활동은 거기서 끝이니까.

“말씀하시기 곤란하시겠지요.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리시아 양은 제게 아무 것도 말씀하신 것이 없으시니 잘못하신 것도 없으시고요.”

이 말조차도 냉정한 계산이 들어있다. 이렇게 얘기하면 더 당황하며 신경쓰겠지? 하는 계산 말이다. 뻣뻣하게 굳어있는 그녀를 향해 나는 고개를 숙인 후,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샴페인이 과했나 보군요. 저는 잠시 바람을 쐬어야겠습니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테라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 잠시 바람을 쐬고 있겠습니다. 혹시 제게 말씀하실 것이 있으면 이리 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당황하여 일어나려 하는 알리시아 양에게 나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내 메시지를 알아들었을까? 나는 자리에서 물러나, 지나가던 궁내부원에게서 새 잔을 받아든 후, 테라스로 나가는 거대한 유리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사실 정말로 바람을 쐬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머리를 너무 굴려서인지 머리에서 김이 날 것만 같았고, 안주 없이 술만 홀짝거려서인지 술도 좀 올라오는 것 같았다.

황궁의 정원은 아름답다는 말조차 실례일 정도였다. 최고의 정원사들이 동원되어 반듯하고 단정하게 관리되어 있는 정원이었다. 붉은색, 분홍색, 흰 색의 장미들이 피어있는 덤불, 꽃이 달린 나무들에서 꽃향기와 풀향기가 향긋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1층인 테라스 바로 바깥으로 나는 드넓은 정원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랑을 속삭이는 여러 연인들도. 예복 차림의 남자들과 드레스 차림의 여자들, 나 정도 나이라기 보다는... 음... 그래, 알리시아 양이나 오르테 양 정도의 나이인 남녀들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나무 아래에 앉거나 서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테라스에 가까이 있을 정도로 바보같은 사람들은 몇 없었다. 대화가 안 들릴 정도로 떨어져 있는 그들은 간신히 얼굴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까 스치듯 인사한 사람들은 있지만, 내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 본 사람들은 없는 것 같았다.

조금,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달칵.

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내가 예상하던 인물일까? 나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내가 예상하던 인물이 아니었다.

“너무 노골적으로 실망하는 표정을 짓는군요?”

이브 오르테 씨였다.

“하아...”

“기리인 경, 너무하시네요. 어쩜 대놓고 한숨을 쉴 수가 있으세요.”

“아... 기분나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다른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혹시 오해하실까봐 말씀드리지만 남자입니다.”

“실례지만 혹시 그 쪽 취향...”

“...실례니까 거기까지만 하시죠.”

그녀는 후훗, 하며 내 곁으로 다가와 섰다. 확실히 아름답긴 아름답다. 아르논 양도, 알리시아 양도 분명 나보다 나이가 몇 살은 많을, 사교계에서 경험이 많은 레이디들일텐데도, 그녀들에게는 아직 소녀같은 면모가 없지 않아 있었다. 역경을 겪어본 경험이 적어서 그런 걸까? 반면 이브 씨는, 몸매를 드러내는 어두운 색의 드레스도 그렇고, 장식 없이 그냥 뒤로 틀어올리기만 한 머리도 그렇고 어른스러운 매력이 확실하게 나오고 있었다. 아마 내가 요안나 선생님을 먼저 겪지 않았으면 지금쯤 푹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매혹’ 스킬까지 갖고 있는 그녀이니까.

“기리인 경은... 참 나이답지 않은 것 같아요.”

“무슨 말씀이신지?”

“아카데미 졸업을 올해 봄에 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러면 올해 성인이 되신 거잖아요.”

“맞습니다.”

“솔직히 기리인 경이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그 나이대의 사람이라고 보기 힘들어요. 한 서른은 먹은 것 같아요.”

칭찬이야, 먹이는 거야.

“부끄러운 말이지만, 기리인 경. 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응?! 갑자기 뭐야. 놀라서 이브 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다행히, ‘당신을 사모해왔다’ 류의 고백을 결의한 여성분들이 띨 법한 홍조 같은 것은 없었다. 순수한 궁금증이랄까? 하지만 낚시바늘이 뒤에 숨어있을지 모르니, 나는 안전하게 답변하기로 했다.

“매력적인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짓말. 위험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잖아요.”

“왜 그런 생각을 하시는 지 모르겠지만...”

말을 꺼내려다 나는 멈칫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브 씨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한 걸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 눈빛에 밀려서였다. 간만에 느껴보는 압박감이었다.

“듣는 귀가 없으니 솔직히 말하죠. 저는 제 자신을 꽤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어요. 아무나 마음만 먹으면 홀릴 수 있다, 는 자신도 있었고요. 실제로 대부분의 남자들은 나에게 홀리면서도 여러 여건 때문에 손을 뻗지 못하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귀족이라거나, 유부남이라거나.”

나는 그녀의 ‘매혹’이라는 스킬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다시 한 걸음 더 내딛었고, 나는 그녀의 기세에 밀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당신은 이상해요. 오늘 처음 이 자리에 온 당신이 나에 대해 알 리가 없어요. 알 리 없는 사람을 처음부터,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위험하다고 여겨서 피하려고 드는 건 이상하지 않아요? 그런데 당신은 그렇게 하고 있어요.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이 어떤지 알아요?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큰 거래의 상대를 바라보는 냉정한 눈이란 말이에요.”

다시 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고,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툭. 뒤로 뻗은 내 발에 테라스의 대리석 난간이 부딪혔다. 더 이상 뒤로 물러날 곳이 없다.

“잔뜩 꾸미고 작심하고 온 여자가, 이제 갓 성인이 된 19세의 남자에게, 그런 눈으로 바라봄을 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기분 더러운지 알긴 하나요?”

“아니 기분 더러울 게 뭐가 있다고...”

황당해서 나온 나의 항변을 그녀는 가뿐히 무시하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이제 거리는 두 걸음 정도.

“자존심 상해요. 내가 매력이 없나요?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거죠?”

다시 한 걸음. 아. 외퉁수에 몰렸다. 여기서 내가 ‘모든 사람이 당신의 매력에 빠져 헤롱거려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당신의 자의식이 너무 큰 거다’라고 사실을 말한다면, 그녀는 앞으로 나를 안 보려 들겠지. 아니, 나를 적으로 여기고 미워하겠지. 여자들이 흔히 그러는 것처럼 말야.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내가 경계를 내려놓기에는, 이브 씨가 위험한 먹이인 것도 맞거니와, 해야 할 일도 있다. 아아. 진퇴양난이로고.

내 어려운 상황을 더 가중시키듯 그녀는 한 걸음 더 나에게 나아왔다.

“기어코 나를 당신의 앞에 무릎꿇리고 내가 매달리게 만들어야겠나요?”

이건 또 뭔 소리래.

“수많은 남자를 굴복시켜 온 내가, 당신이라는 갓 성인이 된 남자의 매력 앞에 굴복해서 나 자신을 바치는 걸 원하나요? 나를 꺾고, 굴복시켜서, 당신의 발 아래 두고 싶나요? 그렇게?”

헐... 망상도 이 정도면 대문호급인데. 그녀는 다시 한 걸음 내딛었다. 그녀가 손을 내 가슴에 얹으려 드는 그 때, (그리고 여차하면 발코니 난간을 넘어 풀밭으로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 때)

달칵.

발코니로 나오는 큰 유리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가 흠칫해서 손을 거두어들이는 순간, 문을 연 사람은 조심스럽게 안을 살피더니, 몸을 빼서 발코니 바깥으로 나왔다가, 우리 둘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리고 나와 이브 씨는 즉시 무릎을 꿇었다.

“일어나시오.”

드디어, 기다리던 사람이 왔다. 황태자 저하였다.

“잠시 이야기를 하러 왔는데, 선객이 있었군. 자리를 피해드리지요.”

“아니, 아니옵니다, 저하. 저는 저하를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내 말에 저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브 양을 보며 말했다.

“오르테 교수님이 아니십니까?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네, 저하, 그간 격조하였사옵니다.”

“미안하지만 잠시 자리를 비켜주실 수 있겠습니까? 잠시 기리인 경과 이야기를 나눌 것이 있습니다.”

누구의 영인데 거절하랴. 이브 씨는 “그리하겠사옵니다.”하고 태자 저하에게 고개를 숙여보인 후, 나를 잠시 노려보았다. ‘네가 뭔데 황태자 저하가 찾아오는 거지?’라는 뜻일까. 아니면 ‘다음에는 가만 두지 않겠어’라는 뜻일까. 어느 쪽이 됐건, 그녀는 조심스럽게 테라스 유리문을 열고 홀 안으로 들어갔다.

“기리인 모스 경이라고 했지. 경과는 꼭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었어. 활 솜씨가 어마어마하더군.”

“황공하옵니다, 저하. 과찬 거두어 주소서.”

“일단 그 말투부터 좀 편하게 하면 어떨까? 과도한 존칭이 어울리기엔 나는 아직 서른도 안 돼서 말이야.”

“저하, 어찌 소신이...”

“부탁이야. 말 좀 편하게 해 줘. 대신들에게 존대 듣는 걸로 족해. 경은 에아임 형과 의형제를 맺었다지?”

아, 황제 폐하를 삼촌이라고 부르는 형이라면, 황태자 저하와는 사촌에 가깝겠구나...

“그러하옵니다, 저하.”

“형동생 간에 쓰는 편한 말투를 쓰라고까진 안 하겠지만, 제발 그 ‘옵’, ‘소서’ 같은 말투 좀 빼. 부탁이다.”

저렇게까지 하시는데...

“알겠습니다, 저하.”

“훨씬 좋군.”

나는 안도하면서 동시에 긴장했다. 의외로 분위기를 확 휘어잡고 있었다. 카리스마 88의 위력인 것인가. 이거 긴장하지 않으면 끌려갈 수도 있겠다. 오히려 황제 폐하보다 더 어려운 상대라는 느낌이 든다.

‘띠링!’

<황태자의 카리스마 수치와 당신의 냉철 수치가 충돌합니다. 판정... 냉철이 우위에 있습니다. 카리스마의 영향력이 반감됩니다.>

<냉철 발동중입니다. 다만 상대의 능력치도 꽤 높기 때문에 마냥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계속 긴장상태를 유지할 것을 권합니다.>

============================ 작품 후기 ============================

다음주 금요일까지는 하루 한 편씩만 올라갑니다.

토요일에 열 편에서 열두 편 정도를 한번에 올리겠습니다.

가장 걸림돌은 닥쳐야 쓰기 시작하는 제 게으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든 휴재 없이 쓰겠습니다.

판타지zz 님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열아홉 살이 이런다는 건 아무리 봐도 반칙캐인거 같아요; 감사합니다!

melontea 님 // 오랜만이에요! 학교는 잘 다니고 계십니까? 히사시부리 라는 문구를 보니 '독수리 부리는 왜 노랄까'라고 물어야 할 것 같...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보니까 더 반가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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