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5 6. 나 좀 가만 내버려 둬요 =========================
“기리인 경.”
“네, 저하.”
“지금까지 대체 어디 있었나?”
“네?”
너무 어이없는 물음에 나는 고개를 들어 멍하니 황태자 저하를 바라보았다. 저하는, 웃고 있었다.
“마치 나 자신과 대화를 하는 기분이었어. 척하면 척이라는 느낌. 에아임 형님이 자네를 의동생 삼은 이유를 알 것 같군. 형님의 사람보는 눈 하나는 누구 못지 않거든.”
“과찬이십니다.”
“아냐. 적은 단서를 조합해 뒤의 큰 그림을 그려낸 그 솜씨는 칭찬받아 마땅해. 내가 경의 입장이었다면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했을 거야.”
“저하...”
약간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자 저하는 웃으면서, 친밀하게 내 어깨를 쳤다.
“궁금한 게 많겠지? 내가 왜 아버님께도 비밀로 하면서 이런 행동을 했는지 말야.”
“네, 추측이야 할 수 있습니다만 이 추측에는 근거가 약해서...”
“근거만 말해보겠나?”
요안나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황태자 저하는 하나를 말하면 열 가지를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자. 주저해서도 안 된다. 주저하면 그걸 알아낼 사람이다.
“황태자 저하께서 나스프 공작, 즉 외가와 크게 사이가 좋지 않다는 점 하나,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 궁내부원을 비롯한 황궁 내 사람들을 믿을 수 없어하신다는 점 하나 이렇게 두 가지입니다.”
“과연. 그 정보라면 그런 추측을 할 만 하군. 대충 맞긴 하네.”
“그 말씀은...”
“여기서는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 어렵군.”
“그러시겠지요.”
“이렇게 하지. 자네 지금 어디에 묵고 있는가?”
“아... 에아임 경의 집 별채에...”
“내일 어디 가지 말게. 오전중에 내가 찾아가지.”
“네에?”
“뭘 그리 놀라나. 황궁 안에서 얘기를 잘 할 수 있을 리 없잖나. 내가 에아임 경을 찾아가는 것이 이상한 것도 아니고 말이지.”
그렇겠군요...
“그럼 내가 먼저 들어가지. 너무 오래 나와 있으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니까. 자네도 곧 들어오게. 주빈은 오래 자리를 비우면 안 되거든.”
“알겠습니다, 저하.”
“경에게 기대가 커. 많이 도와주게.”
나는 들어가는 황태자 저하에게 고개를 푹 숙였다. 마음 속으로는 큰일났다, 싶은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아아. 왜 이리 나를 가만 놔두지 않는지 모르겠다. 내가 원하는 건 그냥 얌전히 1년간 연구하는 것인데, 조용히 좋은 사람들과 지내고 싶은 건데.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어서, 거부할 수 없어서 내렸던 선택들이 중복되고 보니 어느새 나는 황당한 곳까지 와 있었다. 변경백의 아들과 의형제를 맺고 변경백을 아버님이라고 부르고, 황제 폐하를 알현하는가 하면, 황태자 저하에게 기대한다는 소리를 듣지를 않나. 대도서관 쪽에서는 자기 몸을 바쳐서라도 나와 좋은 관계를 맺겠다는 ‘교수’(!) 한 명을 보내지를 않나. 황궁에서 열리는 무도회장에 주빈의 한 명으로 참석하지를 않나. 내 몸에 두른 검은 망토를 봐라. 이 제국 황실기사단의 망토가 나한테 어울리기는 하는 건가.
왜 나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 사람의 운명이 이렇게 뒤바뀔 수도 있는 걸까? 지금까지의 경험이 좋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아버지 어머니를 잃었지만, 나를 아껴주는 다른 사람들을 얻었다. 하지만 뭐랄까, 그 날 이후로 나는 계속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물 위에 떠 다니는 연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가만히 놔 두지 않고 이쪽 저쪽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내친 걸음이다. 이미 마수의 등 위에 올라탄 후이다. 여기서 사라질 수도 없고, 사라지면 나 때문에 피해볼 사람들이 너무 많다.
하지만 자꾸만, 내가 있을 자리가 여기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황제 폐하고, 황태자 저하고, 대도서관이고 나를 좀 가만히 놔뒀으면 좋겠다. 어디 가서 이런 말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후우. 들어가자, 들어가.
내가 밖에서 이야기하는 동안 이미 꽤 밤이 깊었고, 세 번째 왈츠가 진행중이었다. 몇몇 레이디들이 내 쪽을 약간은 원망과 아쉬움을 담아 바라보았지만 나는 도저히 새로운 사교를 진행할 기분이 아니었다. 오늘 만난 세 여자와 황태자 저하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지쳤다. 다행히 제도의 예의바른 레이디들은 내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시선을 돌리고 있는 간단한 제스처만으로도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신호를 못 본척 할 수 있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기리인 경.”
나는 최대한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
“공작님.”
아르논 양의 아버지, 나스프 공작님이었다.
“예의는 됐네. 어떤가, 무도회는 재미있었는가?”
“너무 고귀한 분들이 많아 몸둘 바를 몰라서 언제 시간이 지나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허허, 그런 것 치고는 춤이 꽤 능숙하던데?”
“공작님께서 제 두 번째 왈츠를 보시지 못하신 모양이시군요. 제 춤이 능숙하게 보였다면 그것은 아르논 양이 워낙에 훌륭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가?”
공작님은 다행히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말했다.
“이보게, 기리인 경.”
“네, 공작님.”
“내일 잠시 시간을 내 줄 수 있겠는가?”
“알겠습니다. 허나 오전에는 선약이 있을듯하여...”
“그런가? 그러면 오후에 내 에아임 경의 자택으로 마차를 보낼테니 우리 저택에서 티 타임을 함께 하는 건 어떤가?”
누구의 초대라고 거절할까.
“그리 하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좋은 차가 있으니 내일 함께 하지. 아르논도 기다리고 있을 걸세.”
네, 네? 미처 물어보기도 전에 공작님은 돌아서 떠나버렸다. 아르논 양은 대체 왜. 아. 머리가 복잡해진다.
“기리인. 잘 됐냐?”
등 뒤에서 형이 다가와서 내 옆에 서며 말했다.
“형. 형은 어땠어요?”
“뭐 나야 만나던 분들 만났지. 니가 나스프 공작 쪽을 먼저 공략하길래 나는 융파트나 중부 귀족들하고, 재상님을 비롯한 고위 관리분들하고 많이 얘기했지. 별 말 없었어. 황태자 저하의 혼담 이야기는 꺼내는 사람조차 없더라.”
둘 중 하나다. 형이 화제를 못 끌어내거나 했을 리는 없고, 형이 만난 사람들 가운데는 별로 화제가 안 되었거나, 혹은 형이 황제 폐하나 황태자 저하와 연관이 있으니 귀에 들어갈까봐 쉬쉬하고 있거나. 후자일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너는 어떠냐?”
“여기서 말씀드리긴 좀 기니까 있다 돌아가면서 마차에서 말씀드릴게요.”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꽤 괜찮았나보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형은 호오~ 하는 소리를 내더니, 지나가던 궁내부원에게서 잔을 두 개 집어들어서는 나에게 하나를 건넸다. 형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황제 폐하께서 축사 하시고, 건배할거야.”
아. 아니나다를까 사람들이 원형으로 모였고, 황제 폐하와 황후 전하께서 나란히 앞으로 나서셨다.
“재미있게들 즐기셨소?”
“예, 폐하.”
“젊은이들은 왈츠도 많이 추고 이야기도 많이 했는가?”
“예, 폐하.”
“어디 있나? 이봐, 기리인 경.”
아. 좀. 제발.
“네, 폐하. 소신 여기 있사옵니다.”
“첫 무도회를 즐겼는가?”
“모두들 친절히 대해주셔서 즐거이 보냈사옵니다.”
“그래, 다행이군.”
다행히 폐하는 나에게 별달리 더 말씀하지 않고 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더 함께 하고 싶소만, 내일도 공무에 임해야 하는 이들도 있고 하니 오늘은 여기에서 이만 파하기로 하겠소. 오늘의 교분이 내일로 이어지기를. 오늘의 즐거움이 내일에도 함께 하기를.”
“신이여, 제국을 보호하소서!”
마지막 말을 모두가 합창하며 잔을 들어올렸다. 나는 적당히 웅얼거리며 잔을 들어올린 후, 모두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샴페인을 비웠다.
“이것으로 오늘의 무도회를 마치겠습니다. 마차가 바깥에 기다리고 있으니, 차례대로 조심히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마지막까지 기다리던 프그단 경의 폐회 선언을 끝으로 무도회는 막이 내렸다.
---
나는 마차에 타자마자 형에게 그 날 있었던 일을 정리해서 말해 주었다. 아르논 양을 만나 들은 이야기, 알리시아 양을 만난 이야기, 이브 오르테 교수를 만난 이야기, 그리고... 황태자 저하를 끌어낸 이야기.
“뭐? 황태자 저하가?”
“네. 애초에 알리시아 양을 만난 이유가 황태자 저하를 끌어내기 위해서였으니까요.”
“너 처음에 대충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지 예상하고 있었던 건 아니냐?”
사실은 그랬다. 황태자 저하의 지능이 95라는 걸 떠올렸을 때, 나는 황태자 저하가 혼담을 계획적으로 꾸몄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요안나 선생님의 지력이 95였는데 나는 선생님의 지능에 감탄했던 적이 정말 많으니까. 황태자 저하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감정이라는 것이 의외로 지능을 이기는 경우도 많으니까, 오늘 참석해서 알리시아 양을 살펴보자고 결심했다. 그리고 알리시아 양에게서 황태자 저하에 대한 애정보다는 들킬까봐 두려워하는 것이 더 많다는 걸 깨닫고 나서는 저하의 계획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굳힌 것이다.
“혹시 그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안 한건 아니에요.”
하지만 형에게 지능이 95라서 그랬다는 얘기를 해 줄 수는 없으니 둘러서 말했다. 형은 혀를 내둘렀다.
“하아, 저하께서도 신동 소리 숱하게 들으셨던 분이지만, 너도 진짜 대단하다.”
형은 그렇게 창밖을 잠시 내다보았다. 들은 얘기를 정리하는 것이겠지.
============================ 작품 후기 ============================
좀전에 롯데월드 불꽃놀이를 보고 왔습니다.
사람이 정말 많아서 미어터지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그 높은 건물에서 터트리니까 다 잘 보이더군요.
읽어주시는 여러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모두 여러분 덕입니다.
카드보험 님 // 정말 말로 하는 싸움을 제대로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ㅎㅎ
화이트프레페 님 // 솔직히 몇 번 후회했습니다.;; ㅎㅎ
eastarea 님 // 아직 중간정리고, 본격적으로 음모를 캐야죠. 챕터 넘어갈 겁니다 ㅎ
이문세 님 // 감사합니다! / 연참은 토요일에 몇연참 하려고 비축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