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8 6. 나 좀 가만 내버려 둬요 =========================
“기리인...”
“네.”
“어쩌다 이런 일에 말려들었니?”
나는 대답 대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도 신기해, 기리인. 내가 아는 기리인 모스는, 물론 뛰어난 학생이었지만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는데... 몇 달이 지나 만난 너는, 제국 황실기사단의 기사이자 명궁이 되어 있네?”
“저도 지금 제가 꿈을 꾸는 것 같아요. 선생님과 헤어지던 그 날의 저에게 앞으로 니 인생이 이렇게 될 거라고 말했다면, 과연 저나 선생님이나 모두 믿었을까요?”
“소설 쓰지 말라고 하지 않았을까?”
우리 둘 다 피식 웃어버렸다.
“아, 선생님. 저기요. 저 나무 있는 집에서 오른쪽이요.”
“어디... 아, 저 멀리 있는 나무? 정말 크구나.”
우리는 또 말이 없이 한참을 조용히 달려갔다. 내 가슴이 두근대는 것은 아까 전투중의 흥분이 진정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긴 시간을 지나 다시 선생님 곁에 앉아있기 때문일까.
“기리인.”
“네.”
“아직도 마법사로 돌아가고 싶니?”
“네.”
나는 조금의 주저없이 대답했다.
“왜? 지금처럼, 높으신 분들을 만나면서, 명궁으로 기사로 사는 것도 좋지 않아?”
나를 떠보는 걸까.
“두 가지 이유인데요.”
끄덕.
“첫 번째는... 선생님도 마법사시니까 잘 아시겠죠. 마법사에게, 더 큰 세상이 있다는 느낌, 더 큰 자신이 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말이에요. 자기 손으로 만지고,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발로 걷는 것보다 훨씬 큰 세상이 있다는 게 어떤 감각인지.”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마법사라면, 세상에 널린 마나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회로로 돌리는 마법사라면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저도 마법사 나부랭이였지만 그 감각, 어떤 것보다 짜릿하고 흥분되는 그 감각을 잃고 싶지 않아요. 어떻게든, 방법이 있다면 그걸 다시 찾고 싶어요.”
“그리고?”
...창피해서 두 번째는 얘기 못 하겠다.
“여기서 꺾으시면 돼요.”
“흐음... 두 번째 이유는 얘기 안 할 거니?”
“아, 저기요. 저 집이에요.”
“기리인.”
마차를 세운 선생님은 조용하고 나직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내가 몇 번이고 못 들은 척 하며 말을 돌리려 했지만 그 시도 모두를 한 방에 날려버리는 묵직함이 담긴 말이었다.
“네.”
“손 좀 줘봐.”
무슨 의미일까. 내가 손을 내밀자, 선생님은 그 위에 자기의 손을 포갰다. 아까 춤출때처럼, 가볍게 끄트머리만 맡기듯 올리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깍지를 끼었다. 선생님의 따스한 손이 내 손 위에 올려지고, 손가락과 손가락이 얽혀들었다.
“선생님...”
“기리인. 있잖아.”
...서두가 불길하다. 하지만 여기서 어이없는 말장난으로 답할 수는 없다.
“네.”
“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나?”
선생님은 내가 아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큰 눈에 별빛이 담겨 있었다. 그 별빛이 유려한 곡선을 타고 목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노란 띠가 들어간 검은 로브라는 눈에 확 띄는 차림조차 그녀의 터질 듯한 아름다움을 숨겨주지는 못했다. 나는, 아까보다 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어떤 말이요?”
“나는 너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 존재가 아니라는 거.”
“...기억해요.”
나는 미리 가슴아플 준비를 하며 마음을 굳히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 마음은 아직 변하지 않았거든?”
“...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라니?
“너하고 같이 있는 게 좋으니 어쩌면 좋니.”
!
내 표정을 본 선생님은 손을 더 꼭 쥐어오며 말했다.
“기리인, 다시 말하지만 이건 네 문제가 아니고 내 문제야. 그래서 내가 합당한 존재가 아니라는 말을 했던 거고 말야. 하지만... 조금만, 조금만 곁에 있어줄 수 있을까? 나도 정말 열심히 노력할 테니까, 합당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까... 그 동안, 서로를 구속하지도 말고, 하지만 서로를 놓지도 말고 곁에 있을 수 있을까?”
예전이었으면, 순수하게 요안나 선생님을 좋아하던 소년 기리인이었다면 저 제안에 얼씨구나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저 제안이 무슨 말인지 안다. 철저하게 이기적인 제안이다. 사귀는 건 안 된다. 무슨 문제인지 말해 줄 수도 없다. 하지만 내 곁에서 멀어지지는 말아줬으면, 곁을 떠나지는 말아줬으면 좋겠다. 이런 말이다. 친구보다는 더 친밀하지만, 연인은 아닌 관계. 그 문제가 무엇인지도 말해줄 생각이 없으면서 저렇게 나오는 건 나를 보고 호구짓을 하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하지만, 어쩌냐... 선생님의 얼굴을 보고는 화를 못 내겠으니... 그리고, 만약 선생님이 다른 남자들에게까지 이런 행동을 한다면, 나를 어장 속 물고기 한 마리로 여기는 것이 틀림없지만... 모르지, 선생님의 사생활이 어떤지... 하지만 화내는 건 그런 다른 ‘물고기’들의 존재를 확인한 후에 해도 늦지 않지 않을까?
그래도, 한 번은 퍼덕거려 봐야겠다.
“그 ‘문제’라는 거, 어떤 것인지 얘기해 줄 수는 없는 거죠?”
선생님은 미안한 표정을 한가득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너를 얽혀들게 할 수도 없고, 너에게 얘기해서도 안 되는 문제야. 하지만 맹세할게. 내 과거의 일 때문에 있는 문제이지만, 금전적인 문제도, 법적인 문제도, 치정싸움 같은 문제도 아냐. 그보다 더 깊은 문제야.”
“해결할 방법이 있는 건가요?”
“글쎄, 잘 모르겠네... 실마리를 잡고 있는 건 맞는데, 아직 확실하지는 않아.”
대체 어떻게 하면 개인이 저런 큰 문제를 떠안을 수 있는 건가? 금전이나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면... 몇 가지의 가능성이 떠오르지만, 어차피 선생님에게 확인받을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니 추론은 무의미하다.
“저랑 같이 있는 시간이 좋다고 하셨죠.”
평소같으면 이런 무자비한 확인을 하지 않겠지만. 선생님은 약간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발적인 호구 노릇을 할 거라면.
“저는 이미 제가 원하지 않는 세계에 얽혀들어가 있어요.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때로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여자들을 만나야 할지도 몰라요.”
약간쯤은, 내 조건을 제시해도 되겠지.
“...잔인하게 나오고 싶은 거니?”
약간은 토라진 듯, 약간은 마음상한듯한 표정을 짓는 선생님. 내 마음도 약간 싸해지려 하지만,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서 내가 흔들리면, 나는 그냥 호구에서 구제불능의 호구가 된다.
“그래... 그래도 상관없어.”
“상관없다고요?”
‘어쩔 수 없지’가 아니고 ‘상관없어’라고?
“나무가 가만히 있고 싶어도 바람이 흔드는 건 막을 수 없으니까. 그리고...”
선생님이 한층 더 내 곁으로 다가온다.
“원래, 더 좋아하는 쪽이, 손해를 보는 거거든.”
아아.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설령 앞으로 다른 어떤 여자를 만나더라도,
다른 어떤 여자와 사랑을 하고 심지어 섹스를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이 마법적 속박이 되어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으리라는 걸.
죄책감? 아니다. 선생님이 나에게 모든 걸 열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내가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내 마음 속 한 구석에 남은 선생님의 속박은, 선생님이 나를 물고기 중 한 마리로 대하지 않는 이상, 오래오래 남아있을 것만 같은 확실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말 대로라면 제가 손해를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어머, 다른 여자 맘대로 만나도 된다고 하는데, 니가 손해라고?”
“좋아하는데도 손에 닿을 수 없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누가 손에 닿을 수 없다고 했니?”
한 마디 한 마디가 오갈 때마다 우리의 얼굴은 점점 가까워졌다.
“연인도 되지 못하는데, 손에 닿아 봐야 뭐하겠어요.”
“기리인, 너라면 알 줄 알았는데?”
“뭐를요?”
코가 닿을수도 있을만한 가까운 거리.
“꼭 애정만이 아닌 위안일 수도 있다는 거.”
“그건 소금물 같은 거잖아요. 마실수록 목이 마른.”
“그래, 하지만... 그래도, 닿고 싶어. 만지고 싶어.”
마지막 한 마디가 둑을 터트렸다.
“저도요.”
선생님의 촉촉한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아온다. 아직 깍지 낀 손을 풀지 않은 채, 우리는 마치 처음 키스를 나누는 풋풋한 연인처럼, 서로의 얼굴을 다정히 감싸며, 입을 맞춘다. 익숙하지만, 익숙해지지 않는 선생님의 향기가 나를 가득 채운다. 부드러운 혀가 내 혀와 얽힌다. 선생님에게서 넘어오는 타액마저도 선생님의 향기가 가득 묻어있다.
소금물. 그래,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더 심해지는 소금물이다. 선생님과 진하게 입맞춤을 할수록 나는 더더욱 갈증에 시달린다.
그리고, 그건 나만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안다.
“하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리는 입술을 떼고 서로를 바라본다.
이 순간, 어이없는 계약이 하나 성립되었다는 걸 깨닫는다.
서로를 좋아하고, 함께 있고 싶어하지만, 연인은 되지 않는 관계.
서로를 좋아하면서도, 서로에게 주고 받는 것은 애정이 아닌 위안인 묘한 관계.
심지어 내가 다른 여자를 만나도 뭐라 하지 않겠다고 하는 묘한 관계.
그러면서도 나에게는 자신의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하는 관계.
이 어이없는 관계의 계약이 지금, 입맞춤으로 성립되었다.
“기리인.”
“네.”
그 어이없음 때문일까. 내 말투는 놀랍도록 담담하다.
“기회가 되면, 이것보다 더한 것도 하자.”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래.”
나는 마차에서 내 짐과 형의 짐을 내려 바닥에 내려놓은 후 그녀 곁에 다가간다. 그녀는 몸을 숙여 내 얼굴 가까이에서 나를 들여다본다.
“기리인. 잘 자.”
짧게 입맞춤한 후, 선생님은 그대로 마차를 몰아 앞으로 달려나가 버렸다. 나는 멍하니, 내 입술에 남은 선생님의 온기와 향기를 손으로 매만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꿈보다 더한 황당한 일인 것 같다.
하지만 꿈보다 더 짜릿하니, 꿈이었으면 깨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황당한 하루를 마무리하는 데 가장 적합할, 황당하기 그지없는 마무리라는 생각도 든다.
============================ 작품 후기 ============================
어떠세요?
요안나 캐릭터가 좀 복잡하죠? 공들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욕먹을수 있을 것 같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들 덕에 글 씁니다.
melontea 님 // 요새 감기 독하더라구요... 얼른 나으세요!
화이트프레페 님 // 그렇게 됐네요? ㅎㅎ 근데 다리 놨는데 서로 오작교로 만들어버렸...
eastarea 님 // 조만간 진짜 데이트 장면도 나올 겁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