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149화 (149/309)

00149 6. 나 좀 가만 내버려 둬요 =========================

별채로 가기 전에 본채에 먼저 가야 할 것 같아서 본채쪽으로 가서 문을 두드리자, 오레즈 할아버지가 문을 열어주었다.

“아, 도련님. 돌아오셨습니까. 주인님은 안 오신 모양이네요?”

“네, 일이 생겨서요. 마님은 주무시나요?”

“안 잔다~”

테밀 누나가 나이트 드레스 위에 가운을 두르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아, 누나.”

“왔니. 그이는?”

“오던 중에 사건이 생겨서 바로 기사단 본부로 가셨어요.”

“사건? 별 일은 없는 거지?”

“네. 아무 일 없어요. 오늘 집에 들어오기 힘들다고만 말씀하셨어요.”

“그래... 그이가 직접 얽힌 사건이면 꽤 큰 사건인가 보네. 무도회는 어땠니?”

“힘들었어요.”

내 즉답에 누나는 풋 하고 웃었다.

“힘들지? 나도 그이랑 결혼할 때 몇 번 무도회 나갔는데 너무 힘들더라.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눈치보고 말조심해야 하고... 다행히 결혼하고 안 나가게 되니까 너무 좋은거 있지.”

“아하하... 그건 부럽네요.”

“부러우면 너도 결혼하렴. 안 나가지야 않겠지만 훨씬 덜 귀찮아지는 것 같던데?”

“사람이 나타나면요.”

테밀 누나와 농담따먹기를 하니 아까 집 앞에서 선생님과 나눴던 어이없는 계약과 입맞춤이 더더욱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지금이 진짜같고, 아까가 꿈 같다. 그러고보니 내일 손님 온다는 얘기를 해 줘야지.

“아, 누나. 몇 가지 말해드릴 게 있는데요.”

“뭐?”

“내일 오전중에 황태자 저하께서 비공식적으로 방문하신다고 하셨고요.”

“에엑?”

누나 뿐만 아니라 우리 뒤에 서있던 오레즈 할아버지마저도 펄쩍 뛰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왜?”

“...저 보러 오실 거라고 하셨어요.”

“뭐어?”

하긴 나도 안 믿기는데 누나가 믿길 리가 없겠지.

“너를 왜?”

“아... 오늘 무도회에서 황태자 저하랑 얘기를 좀 했거든요... 제 말에 흥미가 있으신가봐요. 번거롭게 하기 싫으시다고 비공식적으로 오시기로 하셨어요.”

“그럼 조찬이나 오찬은 피하실테고... 아이고 그래도 집안 꼴이 이게...”

“별채로 모시세요. 형도 별채로 오라고 하면 되고요.”

“그래도...”

“그리고 내일 오후에는 잠시 외출할게요. 저녁을 먹고 올지 어떨지는 모르겠어요.”

누나는 황태자 저하가 온다는 소식에 이미 내 말은 귀에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청소해야 하는데, 차는 뭘로 준비하지?’ 이런 말들을 하며 이미 좌불안석이었다. 아이고. 형이 있었으면 누나가 좀 덜 당황했으려나... 부모님께서 살아계셨을 때 어머니가 손님 한번 치르려면 온갖 고생을 하시던 기억이 나서 나는 간만에 코끝이 시큰해지는 기분이었다.

“도련님, 어디로 가십니까?”

“아... 나스프 공작가에서 티타임에 초청받아서요...”

“공작가라고요? 내일 저녁 식사는 하시고 온다고 봐야겠군요.”

“그런 건가요?”

오레즈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다행히 할아버지는 어릴적부터 에아임 형을 모신 사람답게 전혀 당황하지 않고, 누나 곁으로 다가가 박수를 짝 쳤다.

“꺅!”

누나가 깜짝 놀라 할아버지를 바라보자, 할아버지는 안심시키려는 듯 다정한 어투로 말했다.

“마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집안은 저와 에노 할멈이 청소해서 깨끗하고, 차는 에아임 도련님이 늘 드시던 걸 내놓으면 됩니다. 황태자 저하께서는 그런 거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분이십니다. 전에 보셔서 아시잖아요.”

“그래도... 안주인으로서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잖아.”

“그건 맞지만, 저와 에노 할멈을 믿으세요. 본가에 있을 때 저하를 몇 번 모셔본 적이 있습니다.”

누나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다행이다.

“뢰다는 자요?”

“응, 아빠 기다리다가 어느새 잠들었네.”

“누나도 얼른 주무세요. 형 오늘 밤에는 들어오기 힘들 것 같아요.”

“그래... 기리인, 배고프지 않니?”

사실은 배고프지만 얹혀사는 주제에 그것까지 부탁할 수는 없지.

“괜찮아요. 주무세요.”

“그래... 아함. 너도 잘 자렴.”

누나는 그제야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안방으로 향했다. 나는 웃으며, 잠시 내려놓았던 내 활과 짐들을 들고 일어섰다.

“아, 기리인 도련님.”

오레즈 할아버지가 등불을 들고 앞장서서 나를 별채로 안내했다. 내가 가슴의 동전지갑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자, 할아버지는 인사를 해왔다.

“좋은 밤 되십시오, 도련님. 내일도 바쁘실 것 같으니 푹 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네, 그럴게요. 할아버지도 얼른 쉬세요.”

할아버지는 웃으며 문을 닫아 주셨다. 나는 걸쇠로 문을 잠근 뒤 – 비키 씨와 그 일을 겪은 후, 배에서부터 반드시 문을 잠그고 자는 것을 습관붙였다. - 활과 화살을 침대 아래 넣어놓았다. 형이 화살을 수거해 주겠지. 아. 씻고 자야 하는데, 귀찮다. 간신히 얼굴과 손발만 닦은 나는 옷도 채 못 갈아입은 채 그대로 이불 위로 쓰러졌다.

잠들기 전, 나는 입술을 매만졌다. 아직도 요안나 선생님의 향기가 미미하게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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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도련님!”

아래층에서 문을 쾅쾅 두들기는 소리에 나는 잠에서 깼다. 아... 어제 옷도 안 갈아입고 잤구나... 에휴. 잠깐 정신차리고 신발을 신는 도중에도 오레즈 할아버지는 쾅쾅 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네! 지금 가요!”

황급히 신발을 꿰어신고 사다리를 타고 아래층으로 뛰어내려가 문을 열자, 할아버지가 뭔가를 한아름 안고 서 있었다.

“도련님, 이것 좀 받으세요.”

“이게 뭔가요?”

“세상에, 하다하다 이렇게 편지랑 뭐가 많이 오는 경우는 처음 봅니다요.”

지금 보니 할아버지는 상자 여러 개와 편지 한아름을 안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열어준 문 안으로 들어와 테이블 안에 내려놓았다.

“도련님, 아침 전에 얼른 이걸 보셔야 할 겁니다요.”

“네?”

“이것들 대부분이 초청장입니다. 얼른 간다 가지 않는다 답변해주지 않으면 하루에 동시에 세 군데에 가셔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요.”

에엑?! 내가 놀라서 편지와 상자 무더기를 바라보자 할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셨다.

“인기가 너무 좋아도 탈입니다요. 기리인 도련님을 보니 앞으로도 제도에서 지내시기 어려우시겠습니다.”

“저... 형은 돌아오셨어요?”

“아직 오시지는 않으셨습니다만, 아침 식사때를 맞춰 돌아오실 거라는 쪽지를 전해주셨습니다. 편지를 뜯어보시고, 에아임 도련님의 조언을 구해보시는 것도 좋겠네요.”

그렇게 말하고 다시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할아버지는 떠나가셨다. 나는 테이블 위에 쌓인 편지 무더기를 바라보았다. 하아... 이걸 어디서부터 손을 대나... 저기, ‘시스템.’

‘띠링!’

<미리 말하자면 저도 도와드릴 방법은 없습니다. 하나하나 읽어보십시오.>

미리 벽을 치는 시스템. 알았다, 알았어. 나는 일단 편지를 정리했다. 다행히, 상자 때문에 많아보이는 것일 뿐 편지 자체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대략 편지가 서른 통 정도, 상자가 다섯 개였다.

상자들은 하나같이 호화스러웠다. 작은 건 뢰다의 주먹 두 개를 붙인 정도의 크기에서, 크게는 내 신발만한 크기였다. 이것들... 대체 뭐야. 나는 시험삼아 맨 위의 상자를 집어들어 열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이봐, 시스템. 혹시나 이것들 위험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신중한 건 좋은 겁니다.>

‘정보 확인.’

<물품 정보>

<선물 상자>

<어느 귀족가에서 당신에게 보낸 상자입니다. 선물과 간단한 서신이 들어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행히, 상자들은 전부 위와 같은 정보였다. 혹시나 해서 서신들도 모두 정보 확인을 거쳤지만, 특별한 정보가 표시되는 서신은 없었다.

<이 정도면 어디 가서 암살당할 위험은 없겠군요.>

...감사. 암살당할 위험이 없는 게 최고겠지만 말야.

나는 안심하고 첫 번째 상자부터 열었다. 뢰다의 주먹만한 상자 안에는 내 새끼손가락만한 황금빛의 네모 막대가 들어있었다. 막대를 들어올려보니 일종의 집게 같았다. 이건... 옷을 고정하는 핀 같은 건가? 나는 상자 안에 든 접은 편지를 펼쳐 읽었다.

“기리인 모스 경에게. 경의 공훈으로 인한 기사 서임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조그마한 성의를 보냅니다. 마침 저희 가문에서 내일모레 저녁에 자그마한 파티가 있어 경을 초청하고자 하니, 참석하셔서 자리를 빛내 주신다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아래에는 어제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기억 안 나는 어느 후작가 이름이 적혀 있었다. 혹시나 해서 나는 다른 상자들도 열어보았다. 장갑, 예복에 다는 브로치, 그리고 심지어 자그마한 보석이 달린 목걸이 같은 것도 있었다. 편지의 내용은 하나같이 대동소이했다. 할아버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듯, 내일모레나 그 다음날, 혹은 다음주에 나를 초청하는 것이었다.

혹시나 해서 서신들을 열어 훑어본 나는 역시 서신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모두가 초청장이었다. 문구는 틀에 박힌 듯, 기사 서임을 축하드린다, 경의 무위와 풍채에 탄복했다, 자그마한 행사가 있으니 오시라... 행사의 종류도 다양했다. 오찬, 티타임, 저녁 무도회, 사냥... 차이가 있다면, 가세(家勢)를 반영이라도 하듯, 선물을 보낸 것이 후작가나 백작가라면, 편지만 보낸 집안들은 자작가나 남작가라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나는 이 서신을 보낸 사람들과 내가 어제 만난 적이 없다는 걸 확신했다. 이름을 들은 기억이 없었으니까. 선물들과, 면식도 없는 사람에게서 온 편지를 제외하자, 네 통의 편지가 남았다. 이 사람들은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이 확실하다. 즉, 내가 손수 답장을 해 줘야 한다는 거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맨 위의 편지부터 읽기 시작했다.

첫 편지는 파라 융파트 경이 보낸 편지였다. 오늘 티타임에 올 수 있는가 하는 편지였다. 나는 얼른 한 쪽에 비치되어 있던 편지지에 ‘초대해 주셔서 무한한 영광이나 오늘 티타임은 선약이 있어 참석하기 힘들 것 같다, 다음 기회에 초대해 주시면 열 일을 제쳐놓고 달려가겠다’는 내용을 급히, 하지만 또박또박 적었다. 내 악필을 최대한 커버하느라 정말 힘들었다. 융파트 공작령의 생각이 궁금하기도 하니 저 자리는 꼭 가야겠다. 그러고 보니, 북대공의 아들인 외르트 경에게도 편지 보내놔야겠네. 오늘 중으로 연락 주기로 했었지.

두 번째 편지를 보낸 사람을 보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브 오르테 씨였다.

“기리인 경. 어제 여러 사정으로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하여 너무 아쉬웠어요, 오늘은 꼭 기리인 경과 자세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겠어요, 경이 시간이 되신다면 언제든 어디든 가겠어요...라고? 하아...”

이 끈질긴 여자 같으니라고. 편지를 구겨버리려다가, 이 사람은 만약 그랬다가는 내가 시간 낼 때까지 계속 편지를 보내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편지지를 끌어당겨, 오늘 밤에라도 괜찮으면 이 집으로 와라, 라고 적었다. 뭐... 별채에서 보면 되겠지. 형이나 누나, 그리고 뢰다에게는 피해 안 가겠지.

세 번째 편지는 알리시아 양이 보낸 거였다. 그녀는 어제 만나서 반가웠다고 적고, 비밀을 지켜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하긴, 이 사실이 새어나가면 가문이 흔들려 버릴 수도 있을테니까. 나는 간단히 답장을 적었다. 나도 만나서 반가웠다, 내가 알아낸 것은 모두 추정일 뿐이기 때문에 이야기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을 거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말하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시라, 하고 적었다. 물론 맹세는 하지 않았지만.

그리고 나니 마지막 편지가 남았다.

============================ 작품 후기 ============================

하루종일 붕 뜬 느낌이었습니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했던 선작과 추천이 마구마구 늘어나고,

과분한 칭찬 댓글들이 달려서... 참 뿌듯했습니다.

타입문넷에 추천글 올려주신 연구생 님 정말 감사합니다.

1화에 flavius 님이 댓글 달아주셔서 그제야 어떤 영문인지를 알았습니다.

근 몇 년만에 타입문넷에 로그인해서 추천글과 댓글을 살펴보았습니다.

여지없이 '제목이 안티'라는 뼈아픈 지적도 있었지만^^;;;

정말 감사한 추천글이었습니다. 솔직히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타입문넷에서 오신 분들께도 감사와 환영의 인사 드립니다.

니세시키 님 // 꼐임 그 이상, 연인 그 이하...? 상당히 껄쩍지근한 관계죠~

인비 님 // 과분한 칭찬 말씀, 그리고 1화에 달아주신 추천 리플 감사합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말씀하신 대로 '시원답답'이 제가 노린 바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연구생 님 //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eastarea 님 // 기리인은 사실 내색 안해도 지금 속으로 콩닥콩닥하고 있을듯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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