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150화 (150/309)

00150 6. 나 좀 가만 내버려 둬요 =========================

그리고 나니 마지막 편지가 남았다. 나스프 공작의 이름이 적힌 편지였다. 공작님이 이제 와서 내게 왜 편지를 보냈을까. 조금, 뭔가 위화감이 든다. 뭘까...

‘정보 확인.’

<물품 정보>

<이름없는 편지>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는 편지입니다.>

<경고! 편지에서 마법적인 기운이 감지됩니다. 물리적인 장치나 약품 처리 등은 되어있지 않습니다.>

뭐, 뭐야 이거... 무슨 마법인지는 알 수 없을까? 나는 편지를 흔들어보았다. 종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 뿐, 안에 뭔가 가루 같은 것이 들어있지는 않았다. 전염병에 걸린 서신이라면 사제나 마법사에게 치료받으면 되고, 무게가 무겁지 않다는 것은 마력석 같은 마력공급원이 없다는 거다. 그렇다면... 기껏해야, 위치 추적 정도이겠지. 내가 어디 가는지 알고 싶다는 거겠지...

<좋은 추론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하긴. 나한테 마법이 안 걸린다는 걸 모르고 한 거지. 그대로 뜯어버리면 되겠지.

<과감한 결단입니다만, 근거가 없지는 않군요.>

나는 나이프로 편지봉투를 북 찢고는 편지지를 꺼냈다. 뭔가 파르스름한 빛이 편지지를 빙글 돌았지만, 내 손으로 넘어오지 못하고 계속 편지지 위를 돌고 있었다. 편지지의 내용은, 글씨가 아닌, 온갖 책에서 오려낸 글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 황제 폐하가 나에게 보여준 그 황태자 암살 협박장처럼 말이다. 그래. 이건 협박장이자, 내 위치를 추적하게 하는 함정이다. 물론 나라서 안 걸렸지만.

‘기리인 경 보라. 시골뜨기로서 귀족의 반열에 올랐고, 레이디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면, 그 쯤으로 된 것 아닌가? 족함을 안다면 부디 지금을 즐기고 들쑤시는 일은 하지 말기를 바란다. 목숨을 소중히 여기도록.’

헤에... 생전 처음 받아보는 협박장은 오히려 재미있는 느낌이 들었다. 여러 가지 추론이 머릿속에서 막 떠오르기 시작했다. 몇 가지는 재미있었고, 몇 가지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불경죄를 짓는 느낌이었다. 아... 혹시, 어쩌면.

탕탕탕!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기리인!”

형의 목소리다.

“네, 형! 오셨어요?”

“어! 아침 먹자!”

그래, 그래야지. 나는 들고 있던 편지지를 보았다. 역시, 짧은 순간만 마력이 유지될 수 있었던지, 그 푸른 빛은 사라져버렸다. 그래도 혹시 몰라 나는 부싯돌로 양초에 불을 붙인 후, 양초불로 편지지를 태워버렸다. 종이가 모두 타서 없어진 것을 확인한 후 나는 테이블 위에 있던 것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별관의 문을 열었다.

“잘 잤... 헐, 너 그게 다 뭐냐?”

“아침에 오레즈 할아버지가 주고 가셨어요. 아침 전에 이걸 열어봐야 할 거라고...”

“세상에... 이렇게 많이 받는게 가능하긴 한 거야?”

형은 내가 손이 부자연스럽다는 걸 눈치채고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테밀 누나가 나를 맞으러 나왔다.

“기리인, 좋은 아... 세상에! 그게 다 편지랑 선물이야?”

“여보, 나 자괴감 들려고 해.”

형의 너스레에 누나는 정신을 차리고, “아침부터 흰 소리 하지 말고 가서 씻어요.” 라고 형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그동안 나는 가져온 것들을 소파 앞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세상에... 나도 사교계에 처음 데뷔했을 때 몇 통 편지를 받긴 했지만, 이렇게 많이 받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는 듣도보도 못했어.”

뢰다가 안방에서 눈을 부비며 걸어나오다가, 소파에 앉은 우리를 보았다.

“삼촌, 잘 잤어? 이게 뭐야?”

내가 대답하기 전에 테밀 누나가 먼저 대답했다.

“으응, 기리인 삼촌이 어제 무도회 갔었지? 그래서 선물 받아온 거야.”

“우와... 삼촌, 좋겠다.”

아이의 순수한 감탄은 이 뒤처리에 고민하고 있던 나에게 잠시 웃음을 짓게 했다. 나는 누나를 보고 말했다.

“누나. 오레즈 할아버지를 잠시 빌려도 될까요?”

“오레즈, 시간 괜찮을까?”

오레즈 할아버지는 시계를 보더니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말했다.

“한 시간 정도는 여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요.”

다행이다... 나는 따로 발송할 네 통의 편지 – 파라 경, 외르트 경, 이브 오르테 씨, 알리시아 양에게 쓴 편지를 아저씨에게 건네주었다.

“이 편지들은 주소로 답장을 보내주시면 되구요...”

나는 나머지 편지들과 선물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편지들과 선물들은 도로 돌려보낼 수 없을까요?”

“돌려보내시겠습니까요? 포장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요. 한데 한 마디는 적어 보내셔야 할 겝니다.”

“아...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너무 과한 후의라 돌려보냅니다, 뭐 이런 식으로?”

“네. 그렇지 않으면 기리인 도련님에 대한 평판이 갑자기 확 안 좋아질 겁니다요.”

“편지지랑 펜 좀 주시겠어요?”

그래서 나는 형과 누나와 뢰다가 아침을 먹는 그 시간 동안 똑같은 간단한 사과말을 적은 편지에 수신인 이름만 바꾼 걸 서른 장 넘게 만들어야 했다. 아. 아침부터 이게 뭐냐. 팔 아프다. 편지지 더러워질까봐 먹으면서 하지도 못하고. 배고파! 어제 저녁도 제대로 못 먹고 샴페인만 홀짝거렸단 말이다!

“다 됐다...”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할아버지가 날 보고 웃으며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요. 나머지는 제가 포장해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아이구, 그런 말씀 마세요.”

나는 편지지 다발을 그대로 테이블에 두고 일어서서 식당으로 향했다. 한 시간 내내 긴장한 채 펜을 쥐고 있느라 아픈 손을 털며.

“고생했어, 기리인.”

테밀 누나가 좀 늦은 아침 식사를 나에게 내주며 웃었다. 수프가 약간 식었지만, 워낙 배가 고파서 나는 아무 상관 없었다.

“어제는 잘 잤냐 기리인?”

형이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약간은 음흉하게 웃었다.

“그래. 이 형 말대로, 같이 보내는게 정답이었지, 그치?”

에휴. 말을 말자, 말을 말아. 내가 먹는 것에 집중하는 것을 본 형은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리인, 오전 중에 황태자 저하께서 오실 거고, 그리고?”

“오후에는 나스프 공작님이 티타임에 불러주셨어요.”

“호오. 너 어제 그 집 딸이랑 춤 잘 추더라.”

“그랬어요? 세상에. 기리인, 얼굴 값 하는 거야?”

“형 한명으로도 차고 넘치니까 누나까지 저 놀리지는 말아주세요...”

누나가 키득대는 동안 형은 말했다.

“아마, 별 일 없으면 저녁까지 먹고 올 거야. 그리고는 별 일 없고?”

“어... 사실은, 대도서관에서 나온 교수 한 명이 그 후에 찾아오기로 했어요. 제 상태 연구에 대해 제안할 게 있다고...”

“...어제 파티장에 왔던 사람?”

“네.”

“너랑 바스 당스 같이 췄던 그 사람이 교수야?”

“네...”

형은 불현듯 약간 표정을 굳혀보였다.

“알아서 조심하겠지만, 기리인. 처신에 주의해라. 소문은 금세 퍼진다. 바로잡기는 더 힘들고.”

“네... 조심할게요, 형.”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남은 스프와 아침에 오레즈 할아버지가 사 왔다는 아직 따뜻한 빵을 다 먹어치우고, 오레즈 할아버지가 편지와 소포를 모아들고 일어서는 순간,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 똑. 오늘 아침에 찾아올 방문객이 누구인지 아는 우리 모두는 그 자리에 턱 굳어 버렸다. 형이 음음,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누구십니까?”

“접니다, 에아임 형님.”

아. 황태자 저하의 목소리다. 형은 황급히 달려가 문을 열었다. 단출한 차림의 황태자 저하가, 등 뒤에 약간은 딱딱하게 생긴 무표정의 검사 한 명을 데리고 문 앞에 서 있었다.

“황태자 저하를...”

“아아, 형님, 제발요. 제가 그런 거 싫어해서 이렇게 비르히만 데리고 왔는데 그러지 마세요. 예전처럼이야 대하실 수 없겠지만 그래도 너무 딱딱한 건 싫습니다, 형님.”

저하는 씩 하고 웃어보였다. 나는 저게 타고난 성격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밀하게 연기를 계산하고, 카리스마로 납득시키는 것 아닐까? 왜냐하면... 내가 태자 저하라면 그랬을 것 같거든.

“저하를 뵈옵니다.”

누나와 뢰다가 고개를 숙이자, 형은 환한 얼굴로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형수님, 건강하셨습니까?”

“저하의 염려 덕택에 잘 지냈습니다.”

“우리 뢰다도, 잘 있었니?”

“네, 저하.”

뢰다의 씩씩한 혀짧은 소리는 황태자 저하를 웃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뢰다의 머리를 쓰다듬은 황태자 저하는 일어서서 나를 보았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나는 에아임 형이 아니니까. 나는 저하와 친분이 있는 것이 아닌, 신민이니까.

“황태자 저하를 뵈옵니다.”

“기리인 경, 일어서게.”

내가 일어서자 황태자 저하는 내 눈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일까. 무슨 생각을 하려는지 알아내려는 걸까. 약간 그렇게 들여다보던 저하는 씩 웃더니 말했다.

“형님, 형수님,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오늘은 제국의 황태자 자격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대접 같은 거 그렇게 신경쓰지 않으셔도 되고요. 차도 안 주셔도 됩니다. 오늘 온 건 이 기리인 경과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온 거니까요.”

“저하, 그러시다면 별채로 가시지요. 그곳에는 기리인 경만 있을 것이니까요.”

형은 손수 열쇠꾸러미를 들고 앞장섰다. 작은 정원을 지나, 열쇠로 내가 아까 잠갔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내가 어지럽혀놓은 그대로였다. 나는 약간 민망한 기분에 얼른 뛰어들어가 테이블 위를 정리하고 의자를 황태자 저하에게 내어드렸다. 저하는 아무런 어색함 없이 그 의자에 가서 앉았고, 비르히 라고 불렸던 그 무표정한 검사는 저하의 뒤에 가서 시립해 섰다.

“앉지, 기리인 경. 형님도 앉으세요.”

내심 축객령을 각오했던 건지 형은 약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 작품 후기 ============================

투베 84위. 감사합니다.

투베 든 기념으로 원래 내일 연재하려 했던 거 당겨서 씁니다.

내일은 최소 6~7연참, 최대 10연참을 하려고 생각중입니다. 최대한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께서 호평해주셔서 정말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그저, 더 열심히 쓰겠다는 약속 말고는 드릴 게 없네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eastarea 님 // 언제나 감사합니다~!

melontea 님 // 시험 잘 보셨으려나...? 주말동안 푹 쉬고 감기 나으세요!

코모에 님 // 115편은 저도 써놓고도 울컥했던 장면이네요. 감사합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기리인이 당할거라는 예단을 버리세요(?!)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