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1 6. 나 좀 가만 내버려 둬요 =========================
카리스마라는 게 그런 건가보다. 어느 자리에서든 자신이 주인이 될 수 있는 것. 생전 모르는 사람들이 봐도 ‘뭔가 있는 사람이다’라고 알아보는 그런 사람, 그런 재능. 분명 남의 집이고, 남의 방인데, 이 자리의 주재는 황태자 저하가 되어 있었다. 주재인 저하가 입을 열었다.
“무리하게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형님. 이 때 아니면 시간을 내기가 참 힘들더라구요. 눈도 피해야 하고 말이죠.”
“눈을 피한다고 하셨습니까?”
황태자 저하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이래저래 보는 눈이 많아서 말이죠. 잔소리꾼들도 많고... 이래저래 몸가짐을 조심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별 수가 없네요.”
음? 몸가짐을 조심한다고? 저하가? 황제의 외아들이? 물론 황제 폐하께서 아직 한창 나이이시고, 황후 전하가 아닌 다른 귀비에게서 아들을 낳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황가는 대대로 씨가 귀하기로 유명한 집안인데다가, 이제 아들을 낳아서 언제 교육시키고 언제 황위에 오르려고... 그러니까, 황태자께서 어지간한 망나니짓을 해도 불안할 리 없는 상황인데, 지금 황태자 저하는 신동 소리를 여러 번 들은 사람이라고 형이 그러지 않았나? 대체 뭘 조심한다는 거지?
위화감이 든다. 그리고 내 위화감은 여러번 그랬듯 뭔가 무의식적으로는 알았지만 의식적으로 집어내지 못하는 사실이 있을 때 든다. 뭘까.
“그러셨군요.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하.”
“하하, 괜찮습니다. 그 정도야 뭐.”
“오늘 오신 것은...”
“기리인 경과 이야기하기 위함입니다. 더불어, 형님께 남아달라 부탁드린 것은, 형님께서도 그 이야기를 듣고 정리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설마 형님이 저의 적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적, 이라고 하셨습니까?”
저하는 예상외로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적이 있는 게 이상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황태자 저하는 내 얼굴을 돌아보았다.
“기리인 경, 무슨 할 말이 있는 표정이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하. 이야기를 다 나눈 후에 생각이 정리되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저하는 팔짱낀 두 팔꿈치로 테이블을 괴며 말했다.
“그럼 어제 우리가 나눈 얘기를 정리해볼까?”
“네, 저하. 안 그래도 에아임 경과 어제 정리하다가 일이 생겨 채 정리하지 못했는데, 처음부터 되짚어 보겠습니다.”
“일이라 함은?”
순간 날카롭게 변하는 황태자 저하의 말투. 형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잠시 후 이야기의 맥락 안에서 나올 것입니다.”
“알았다. 기리인 경, 시작하게.”
나는 아예 종이를 하나 가져와 그 위에 낙서 비슷하게 정리를 해 가며 말하기 시작했다. 고위 귀족들. 나스프 공작. 황가와 사돈을 맺으며 나스프 공작가가 확 떠오르고, 이것이 중부 융파트 공작가와 북부 대공가에게 압박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황제 폐하조차도 궁성에서 눈과 귀를 의식해야 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는 점. 하지만 그런 나스프가가 영향권 내의 뫼르말 백작가에 한 수 접어줘야 할 사정이 생긴 점, 그리고 그 사정이 단시간에 해결되긴 힘들 것이라는 점.
“그런 상황에서 황태자 저하께서 뫼르말 백작가와 혼인을 하게 되면 역학관계는 완벽히 뒤집어지게 되죠.”
저하와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혼담이 저하의 진의는 아닐 것입니다.”
“왜 그리 생각하는가?”
“알리시아 양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 이 결혼이 사랑도 정략도 아니라는 것 등은 어제 말씀드렸지요.”
“그랬지.”
“저하, 이 결혼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무엇이겠습니까?”
“그야, 나스프 공작가의 세력을 축소시킬 수 있는 것 아닌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하께서 그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셨다면 혼담을 공표하셨어야지요. 혼담이 추진된다는 것만으로 공작가의 세력이 꺾일 텐데 말입니다.”
“공작에게만 조용히 알릴 수도 있지 않은가? 그 쪽이 내가 원하는 이익을 더 쉽게 가져올 것 같지 않나?”
“저하. 저희는 어제 낮에 오찬 모임의 말석에 참여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두 사람이 앉아있는 것을 나도 보았다.”
“린베크 경과 공작이 대화 나누는 가운데 저희가 안 사실은, 공작이 이 혼담의 존재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저하의 얼굴을 바로 바라보았다. 뻔히 알 만한 사실을 가지고, 아직도 사람을 시험하려 들어? 감히 신민이 군주에게 화를 낼 수는 없겠지만 이 정도의 소심한 항의는 들어주겠지. 저하는 내 눈빛을 잠시 받아내다가 피식 하고 웃었다.
“역시. 내 자신과 대화하는 것 같다는 어제의 내 감상이 틀리지 않군. 미안하네, 기리인 경.”
“아닙니다, 저하. 그럼 소신의 생각이 맞다고 봐도 될지...?”
“그래. 내가 이 혼담 건을 추진한 건 그 목적이 아니야.”
형은 약간 놀란 얼굴로 우리 두 사람을 돌아보고 있었다. 나는 저하의 뒤에 시립해 있는 비르히라는 사람을 계속 바라보았다. 비르히는 나는 이 대화에 끼지 않는다는 딱딱한 표정을 한 채 뒤에 꼿꼿이 서 있었다. 황태자의 호위 무사라는 건 어려운 거구나.
“기왕 말 나온 김에, 기리인 경. 내가 왜 그랬을지도 한 번 추측해보지 않겠나?”
“궁내부 안에서 누가 어떻게 정보를 나르고 있으며, 어떤 곳으로 전달되는지 알고자 하셨겠지요. 그리고 그 말은, 지금까지 황제 폐하로부터 들었던, 궁내부가 황후 전하와 나스프 공작에 의해 장악당해 있다는 말과 상충됩니다. 장악당해 있는데 굳이 정보가 흘러가는 길을 새로 알 필요가 없겠지요.”
“그럼?”
“황태자 저하의 살해를 협박하고, 어제 우리를 습격한 놈들은 별개의 조직이라는 말입니다. 궁내에 그 별개의 조직의 손이 뻗어 있어요.”
황태자 저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대담하고 빠른 결론이군, 기리인 경. 하지만 그대 말이 옳아. 그간 나는 내가 추진하던 일에 이래저래 방해를 받는 과정에서 이 비밀결사에 대한 단서를 잡을 수 있었다. 에아임 형님, 그래서 형님을 옆에 모시고 함께 이야기를 들은 겁니다.”
에아임 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런 비밀결사는 대개 반역과의 연관이 있지요. 더더군다나 황태자 저하의 목숨을 노렸다니 말할 나위 없지요. 그리고 수사 기사단의 제 1임무는 반역을 색출하는 것이고요.”
“그런데, 습격을 당했다고요?”
그러고 보니, 에아임 형은 밤새 습격자들을 신문하고 새벽에 돌아왔지. 뭔가 캐낸 것이 있을까? 형은 타이밍 좋게 하품을 한 번 하더니 대답했다.
“어제 밤, 기리인 경과 제가 집으로 돌아오던 때, 레드스니 가의 좁은 골목길에서 앞뒤로 마차 두 대, 총 10명의 복면인에 의해 습격을 받았습니다. 다행히 기리인 경의 활이 아티팩트라 그 중 한 대의 마차를 불태우고 말들을 놀라게 해 전력을 반감시켰고, 무서운 활솜씨로 한 명의 발목을 날리고 한 명의 손목을 날렸습니다. 여기서 날렸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지워버렸다는 뜻입니다, 저하.”
“...활로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기리인 경의 활이 아티팩트라 그런 줄로 압니다.”
사실은 내가 마불살을 쏘기 때문인 줄로 압니다만 얘기할 수는 없겠지요.
“또한 기리인 경은 한 명의 하반신을 얼어붙게 해 도주를 저지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도 역시 아티팩트의 힘인가?”
“그렇습니다, 저하. 결과적으로 멀쩡한 세 명의 습격자를 확보했습니다. 밤새 기사단 지하에서 믿을 수 있는 수사 마법사와” - 그러면서 형은 나에게 한쪽 눈을 깜빡여 보였다. 아. 에빌로 누나를 말하는 거구나. - “심문을 한 결과. 이 세 명은 수도의 해결사 집단에 소속된 해결사라고 합니다.”
“그냥 낭인들 아닌가?”
“그러합니다만, 이 낭인들을 지휘한 자가 있습니다. 이 자는 이 낭인들 이외에도 낭인들을 대략 서른 명 정도 고용해 비밀리에 훈련시켰다고 합니다. 보수도 꽤 준 모양이고요. 한데, 어제 기리인 경에게 잘못 걸려서 손목이 날아가 버렸죠.”
“어느 가문인지는 모르고?”
“네, 낭인들에게 심문 마법을 걸었으나 원래 모르는 것은 말할 수 없으니까요. 대략적인 집 위치조차 철저하게 보안된 통에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숙소는 빈민촌의 어느 구역이고, 창문이 없는 마차로 이동해 눈가리개를 한 채 움직였다고 하더군요.”
“편집증적이군.”
그 순간.
‘띠링!’
<당신이 황태자와 직접 만나, 사건의 정보를 깊이 파악하며 서로 의견을 교류했기에 메인 퀘스트의 진행이 빨라집니다.>
뭐, 뭐?
<당신의 행동과 얻어낸 정보, 그리고 그 여파를 평가중입니다...>
나는 한참 기다렸지만, 다... 뒤의 점이 네 개, 다섯 개 이런 식으로 점점 늘어날 뿐 결론이 나지는 않았다. 이거, 언제 결론나는거야... 나는 더 못 기다리고 말을 이었다.
“형. 그래서 형은 그 손목이 없는 남자, 틀림없이 돈이 좀 있는 귀족가 사람일텐데, 그 남자를 잡기 위해 어떻게 하셨어요?”
“특별 지시를 해서 제도의 4대 성문에 오른손 팔뚝 절반이 어제 날아가 붕대를 하고 있는 남자가 나오는지 잘 보라고 했다. 미덥지 않아서 5급 수사관을 한 명씩 보냈지. 그리고, 귀족가의 가십을 모으고 있는 중이다. 혹시 어제 어느 누가 팔이 다쳐서 왔다더라, 이런 소문이 반드시 나올 테니까.”
“역시, 형이에요.”
“니가 칭찬하니까 왠지 쑥스럽다 야.”
============================ 작품 후기 ============================
아직도 제 글이 갑자기 이렇게 많은 분들이 보아주신다는 점에 얼떨떨해하고 있는 작가입니다. 정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글부터 몇 연참이 될지 모르겠지만 시작합니다.
세 시간 간격으로 올라오고, 좀 더 많이 써지면 나중에 한 편쯤 더 올리겠습니다.
연참기간의 리리플은 맨 마지막에 모아서 하겠습니다.
원래는 투베에 한 번이라도 올라가보고 싶은 마음에서 준비했었는데,
투베에 올라가고 나니 감사의 의미로 하게 되네요. 이래저래 감사합니다.
eastarea 님 // 정말 감사합니다. 함께해주신 덕입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초기부터 함께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melontea 님 // 어디 안 가니까 시험 보고 와서 보셔도 돼요~ 늘 감사합니다!
|라랄라랄라| 님 // 그때 해 주셨던 조언들 정말 감사합니다.
카드보험 님 // 저도 그런 쪽의 딥다크 좋아합니다. 나중에 오마케로 꼭...ㅋㅋㅋ;
akins 님 // 정주행하시며 꼬박꼬박 리플 달아주셔서 정말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