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153화 (153/309)

00153 6. 나 좀 가만 내버려 둬요 =========================

그 때, 편지를 못 맡겼는지 형이 손에 편지를 든 채 방으로 들어왔다.

“아이고, 오레즈가 벌써 편지를 부치러 나가버렸네... 저하, 죄송하오나 저는 이제 다시 기사단으로 나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형님. 저도 이제 일어서려고 하던 참입니다.”

“그러십니까? 다행이군요.”

“기리인 경. 내가 조사해 보고 곧 연락하겠다. 그때 함께 고민하도록 하자.”

“네, 저하. 언제든 분부해 주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형님, 형수님께 안부 전해 주십시오. 인사 따로 못 드리고 바로 갑니다.”

“알겠습니다, 저하. 옥체 보중하시길.”

비르히를 앞세운 저하는 그대로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다. 곧, 어디 숨어있었는지도 모를, 비르히와 비슷한 사람 둘이 그들 옆에 따라붙었고, 저하와 세 호위는 어느새 정문에 와서 선 마차에 올라타고 떠나 버렸다.

“후우...”

나와 형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며 뒷목을 주무르다가, 서로를 보고 큭 하고 웃어버렸다. 형은 평소와 같은 태도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힘들지?”

“아니에요, 형. 밤새고 오신 형이 더 피곤하시겠네요.”

“아냐, 뭐 그 정도야. 그보다, 황태자 저하와 무슨 얘기를 한 거냐?”

“형 곧 가셔야 하니까 짧게 말씀드릴게요.”

나는 내가 추측하고 있는 진상에 대해 형에게 말해주었다. 형은 대경실색했다.

“진짜야?”

“진짜냐뇨. 당연히 정황이죠. 아직 모르죠. 그런데 제 말대로라면 의심할만 하지 않아요?”

“그건 그런데... 확인할 수 있는 방도가 없잖아.”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요... 일단, 지금 당장은 뭐 할 수 있는게 없으니, 하던대로 해야죠. 황태자 저하의 연락을 기다리고, 일단 오후에 티타임은 가야 할 것 같고요.”

“어째 너라는 놈은 사건이 몰려드는 것 같냐.”

하아... 저도 그게 정말 의문입니다... 형은 다시 내 머리를 쓰다듬어준 후 일어섰다.

“그럼 형이랑 같이 점심이나 먹으러 갈까?”

“네, 어디로 갈 건데요?”

“안가르쳐 줄거지롱.”

헐... 형님, 제발 제국 2급 수사기사에 아들 아버지면 체통을 좀 지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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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근처로 갈 줄 알았는데, 형은 마차까지 빌려왔다. 마차를 타고 우리는 한참을 달렸다. 고급 주택들이 있는 주택가를 지나자, 너른 광장이 보였다. 어제도 지나가다 봤었던 제도 광장이었다. 마부는 광장 안으로 마차를 몰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광장 둘레를 따라 그려진 선을 따라 마차를 천천히 움직이게 했다.

“광장 안으로는 마차나 말이 들어가서는 안 돼. 여기는 무조건 걸어야 한다. 황제 폐하께서도 예외가 아냐.”

“하긴, 안 그래도 사람들이 많은데 말이나 마차까지 달렸다가는 하루에도 몇 명씩 다치겠네요.”

“그렇지. 저 옆에 상점가 보이지? 그저께 너 옷 맞추러 갔던 데.”

“그게 어제에요? 와... 한 열흘은 된 느낌인데요.”

“내 말이 그거다. 그러니 너를 보고 사건을 끌어당긴다고 하지 않냐.”

우리는 별 말 없이 계속 광장 곁을 따라 달려갔다. 끄트머리에서 대로로 빠져나간 우리는 대로를 따라 쭉 달렸다. 중간에 잠시 멈추게 한 형은, 지나가던 편지 배달부 겸 세금 징수원을 붙잡고 자신의 수사기사의 인장을 보인 후, 기사단으로 편지 배달을 시켰다. 마차가 멈춘 동안 살짝 고개를 창 밖으로 내밀어 앞을 바라보자, 앞에 큰 성벽과 제도의 성문이 보였다.

“형, 이리로 가면 어디로 가는 거에요?”

“북쪽.”

“북쪽이요?”

“제도의 북쪽에는 뭐가 있게?”

“위로 쭉 올라가면 변경백령이 있고, 그리고... 제도에서 걸어서 20분, 마차로 5분이면 가는... 아!”

“그래, 오늘 점심은 디트리클 시에 갈 거다. 톨라츠의 부탁이야.”

“네... 톨라츠 아저씨 며칠만에 보겠네요.”

“기리인, 지금 너 상황을 알고 있는 거지? 대신전 쪽에서도 너한테 흥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잊지 마라.”

“네... 알고 있어요. 그리고 이렇게 불러줘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 치르낙 대왕의 격언은 기억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외교와 협상, 그리고 인내로 나라를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 치르낙 대왕의 명언 중에서도 워낙 유명한 명언이니까, 학교에서도 가르칠 정도니까 모를 리 없다.

“친구는 나에게 가까이, 하지만 적은 나에게 더 가까이.”

“그래. 적이든 친구든, 나와 뭔가를 하려 드는 사람이 있다면 가까이 두라는 말씀이시지. 그래야 필요할 때 내 손이 닿을 수 있다고 말이다.”

“네. 대신전이 저와 척을 지려고 한다는 생각은 안 들지만, 그래도 어떤 생각인지 알아는 봐야 할 것 같아요. 고마워요, 형.”

“뭐가?”

“굳이 시간내서 같이 가 주시는 거 말이에요.”

“무슨 소리야? 나도 초대를 받았다고. 간만에 부하이자 협력 관계인 사람의 상사에게서 식사 초대를 받았는데 가야지.”

하지만 형은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형 곁에 있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리를 다듬어야 하지만, 별로 싫지가 않다. 그 동안 마차는 어느새, 왼쪽으로는 다소 낡고 허름한 집들이 간간이 섞여 있는 거주 구역, 오른쪽으로는 용도를 알 것 같은 건물도 있고 모르겠는 건물도 있는 창고와 공방 등이 잔뜩 있는 구역들을 지나 성문에 닿았다.

낮이라 그런지 특별히 성문에서 잡거나 하는 것은 없었다. 그냥 잠시 확인 후, 우리가 디트리클 시로 간다는 것을 알게 되자 바로 통과시켰다.

시라고 하기에는 성벽이 없었다. 머리로는 ‘신의 공간이기 때문에 인간이 장벽을 세우면 안 된다’며 그냥 하얀 돌로 경계석만 둘렀다는 건 알고 있는데, (그리고 신의 가호를 받은 그 경계석은 치르낙 대왕 이래 400년이 지났는데도 유지 보수가 필요없을 정도로 멀쩡하다는 건 알고 있는데) 직접 보니 정말 신기했다. 보기에도 입이 떡 벌어지는 규모의 거대한 신전이 하나 서 있었고, 신전 옆으로 몇 개의 부속 건물이 있었다. 사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오가는 것이 보였다.

신전은 거대하다는 말도 부족해 보였다. 그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크기가 개미처럼 보일 정도였다. 새하얀 거대한 신전의 정면 벽에는 거대한 천칭의 부조가 새겨져 있었다. 천칭은 트리클 신의 상징이니까 당연하겠지. 그 외에 다른 조각상은 없었다. 트리클 신은 우주적인 법칙에 가까워서, 사람 모양의 조각상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며 교리로도 막고 있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고향 북부 대신전에도 주변에 조각상이고 뭐고 없었는데, 이 거대한 대신전에 천칭 부조 하나만 있는 걸 보니 좀 휑하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변 부속건물도 꽤 컸는데, 그조차 압도하는 거대하다는 말조차 부족해 보이는 신전은 그 거대함 자체가 장식이 되어주는 장관이었다. 마차가 점점 신전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게끔 깎은 거대한 기둥들이 신전의 측면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와...”

“그래, 와 소리밖에 안 나오지?”

형은 큭큭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규모 자체가 주는 압도감과 미(美)에 푹 빠져 있었다. 오히려, 대신전 가까이 마차가 다가가자 마치 산이나 절벽을 옆에 둔 것처럼 너무 가까이 있어서 전체가 보이지 않았다. 마차가 신전 앞에 멈추고, 마부가 뛰어내려 문을 열어주었다. 마차에서 내린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한껏 뒤로 꺾어 신전의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쨍한 정오의 햇빛이 신전 꼭대기에서 빛나고 있었다.

“하하하, 기리인 군도 대신전을 처음 보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반응하는군요.”

익숙한 목소리가 내 고개를 다시 아래로 끌어내렸다.

“아저씨!”

나는 반가움에 아저씨의 앞으로 달려갔다. 아저씨의 억센 손이 내 손을 잡아주었다.

“잘 지냈습니까, 기리인 경?”

“...그게 어제인데 벌써 아셨어요?”

“하하, 어쩌다 보니 듣게 되었습니다.”

...차라리 ‘신의 눈은 어디에나 뻗어 있다’처럼 약간 오만하게까지 들리는 반응이 나을 것 같다. 저런 겸손한 반응이 무서울 수도 있구나. 마차에서 내린 형이 내 곁에 다가왔다.

“여어, 톨라츠. 잘 지냈나?”

“그럼요. 간만에 신전에서 신의 손길에 푹 파묻혀 있지요. 에아임 경은 잘 지내셨습니까? 간만에 사모님을 만나니 좋으시죠?”

“하하, 당연하지. 뒤에 계시는 분들은...?”

형은 아저씨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는 헉 소리를 내더니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대사제님을 뵙습니다.”

에엑? 나도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따라했다.

“대사제님을 뵙습니다.”

대사제라니, 대사제라니! 트리클 교단에는 교황님이 한 분 계시고, 각 지역별로 대사제님이 한 분씩 계신다. 그 아래에 주교와 사제들이 있는 거다. 고향인 북부 대영지의 신전에도 북부 대영지 전체를 아우르는 대신관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 분은 트리클의 날 예배 때 말고는 뵙기가 어려울 정도의, 쉽게 말해 대공님 급의 위상을 자랑하는 분이었다.

그런 대사제님이 여기, 다른 주교들과 사제 예닐곱 명을 거느리고 대신전의 문 앞까지 마중을 나와 계신 거다. 대체 왜? ...나 때문에? 내가 뭐라고?

“신의 종에게 과분한 예의입니다. 허리들 펴세요.”

예순 정도 되었을, 머리 가운데는 벗겨지고 주변머리는 하얗게 센, 역시 새하얀 턱수염을 기른 인자한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했다. 톨라츠 아저씨가 아직 사제 서품을 받기 전이기에 평상복에 디트리클 시에서만 달 수 있는 뢰다의 손바닥 크기만한 천칭 뱃지를 가슴에 달고 있었다면, 사제님들은 검은 색 사제복을 차려입고 허리에 하얀 띠를 두르고 있었다. 주교님들은 그 띠와 모자가 분홍색이었고, 우리 앞의 대사제님은 진한 빨강색의 모자와 허리띠를 하고 계셨다. 모두 가슴에는 천칭 문양이 금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 작품 후기 ============================

이 새벽에 누가 보고 계실까요?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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