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4 6. 나 좀 가만 내버려 둬요 =========================
대사제님 뿐만 아니라 우리 앞에 있는 주교며 사제님들은 모두 인상이 좋았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빙빙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사건을 끌어당기는 자석이 되었다지만, 그리고 최근 내 사회적 위치가 보통 평민에서 황제와 황태자를 독대하고 남공작의 딸과 왈츠를 추는 수준으로 잠시 – 어디까지나 잠시다! 그런 삶은 결코 원하지 않는다! - 올랐다 하지만,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는 모임에 대사제님이 나를 맞으러 나온다고? 대체 왜?
“대사제님께서 이렇게 문 앞까지 나와서 영접해 주시다니 더없는 영광입니다.”
형이 정중하게, 하지만 견제의 뜻을 채워넣은 것이 틀림없는 인사를 하자, 대사제님은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아마 알아들었겠지? 대사제님 쯤 되면, 전 대륙에 대여섯명 정도밖에 없는 사람 정도 되면 제국의 장관이나 재상 급이니까) 여전히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트리클 신 아래 우리 모두는 같은 아들딸입니다. 더더군다나, 신의 뜻을 받아 이 제국을 통치하는 황제를 위해 일하는 수사 기사와, 먼 길을 떠나오며 역시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운 젊은 청년을 맞이하러 나오는데, 이 늙은 몸이 길지 않은 걸음 했다 해서 그것이 뭐 대수이겠습니까.”
으아. 말만 들어도 딱 쉽지 않겠다는 느낌이 팍팍 온다.
“대사제님, 이 청년이 바로 기리인 모스입니다. 저와 북부 대영지에서부터 함께 동행하여 내려온 청년입니다. 이 청년에게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으며 그의 지성과 의기에 감탄하기도 한 훌륭한 청년입니다.”
톨라츠 아저씨의 듣기만 해도 낯부끄러워지는 인사가 있자, 대사제님은 내 앞으로 다가와 손을 내미셨다. 아... 예전에, 아직 열 살도 되기 전에, 북부 대영지에서 북부 대사제님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 때는 평민이고 어렸으니까, 무릎을 꿇고 대사제님의 신물(神物)인 반지에 입을 맞추었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하나.
“대사제님, 죄송합니다. 제가 미욱하여 어떤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지, 제가 갖추는 예의가 혹 실례가 되지 않는지 근심이오나... 어릴 적, 제 고향에서 대사제님을 만날 때 배운 대로 하겠습니다.”
나는 무릎을 꿇고 대사제님의 반지에 입을 맞춘 후 다시 일어났다. 다행히 실례는 아니었던지 대사제님은 웃으며 나를 일으켜 세우며 내 어깨를 친밀하게 안으며 두드려왔다.
“반갑습니다, 기리인 경. 어제 어전에서 기사 직위를 수여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네, 과분하게도 황제 폐하 이하 여러 분들께서 저를 귀히 보아주셔서...”
“겸손하기까지 하군요. 이런 젊은이가 계속 나오니 제국의 앞날도 밝고 또 밝겠군요.”
내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 준 대사제님. 으음. 실례가 아닐까... 그래도, 호기심이 나를 이겼다.
‘정보 확인.’
<이름 : 네벨레 비트리클
나이 : 66
HP : 1320/1320
힘 : 66
민첩 : 64
지력 : 91
마나친화력 : 82
매력 : 84
지구력 : 67
특수 : 부여된 재능 - 독심술
스킬 : 대치유 A0, 대축복 A0>
<제도 교구의 대사제입니다. 역대 교황님들이 그러했듯, 차기 교황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마음을 읽어내는 것 같다는 평이 많습니다. 대응에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봐, 시스템, 저 ‘독심술’ 말인데. 어느 정도까지 읽는 거야?
<확인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조언이라도 받으시겠습니까?>
그게 어디야. 부탁한다.
<이것도 한계가 있어 이 정도의 조언이 다일 것 같습니다. 이 분과 도박판에 앉는 건 자살행위에 가깝습니다.>
너무 두루뭉술한 조언이잖아... 뭔가 말하지 못할 사정이라도 있는 거야?
<각 기술의 상세 내용을 아시고 싶으면 정보 확인의 레벨을 3까지 올리십시오. 현재 정보 확인의 레벨로는 이 정도의 조언도 상당한 호의입니다.>
으음. 시스템은 장난을 치거나 독설을 하기는 해도 거짓말을 한 적은 없다. 도박판에 같이 앉지 마라. 같은 게임을 하지 마라... 내가 생각하는 걸 어지간하게 읽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게 게임이라는 형식에서만 가능한 거라면, 예를 들어 내가 불경한 생각이나 적의를 품었다고 해도 그걸 내가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것에서 추론은 가능할지언정 정확하게 알아낸다고는 보기 힘들다, 라고 봐야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사제와 도박판에 앉는 비유를 했을 리가 없지. 그렇지, 시스템?
<훌륭합니다.>
좋았어. 모르고 대처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 되었군. 짧은 시간에 머릿속으로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네벨레 대사제님은 나를 보며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누구와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까?”
와우. 깜짝이야. 시스템이 미리 언질을 주지 않았다면 완전히 화들짝 놀랄 뻔 했다. 어차피 시스템 얘기는 하지도 못할 테지만, 그래도.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겠지.
“아뇨, 아직 상황이 믿기지 않아서...”
“하하, 그리 놀랄 것 없습니다. 아까 에아임 경에게 말했듯, 트리클 신 아래 우리는 모두 같은 아들딸 아닙니까.”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으니까 문제죠... 당장 사제님도 그렇게 생각 안 하실 텐데요? 네벨레 대사제님은 그런 나를 보며 허허 웃더니 – 속을 읽었으면 반응을 해야지, 반응을 안 하니까 읽힌 건지 안 읽힌 건지 모르겠잖아! 아 답답해! - 뒤를 돌아 어느 주교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주교님이 한 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자, 이 쪽으로 가시죠.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식사는 다같이 식당에서 합니다. 식당 한 켠에 자리를 맡아 달라고 말했으니, 거기에서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죠.”
나는 흘깃, 에아임 형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형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으윽. 식사가 썩 맛있지는 않나 보네...? 에아임 형을 바라보던 네벨레 대사제님은 웃으면서 말했다.
“이보게, 에아임 경. 예전보다는 낫다네.”
“...그래도 저 식당에서 일하는 분들은 ‘맛없는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도 신에 대한 감사요 수련의 하나’라고 하시는 분들이잖습니까...”
“뭐, 부정하지는 않겠네만. 껄껄껄! 그래도 몸에는 좋지 않나!”
대사제님은 형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으면서 앞서서 가는 주교님을 따라 걸어갔다. 나이에 비해 걸음걸이에 힘이 있고 아직은 창창하신 것 같았다. 우리는 거대한 신전의 옆에 있는 자그마한(물론, 대신전에 비해 작은 거지, 이 식당도 엄청 넓었다. 몇백 명이 한 번에 식사할 수 있는 거대한 넓이였다) 식당으로 향했다.
‘트리클 신 아래 모두는 같은 신의 자녀다’라는 말을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지키는 것 같았다. 귀족가라면 당연히 문을 열어주는 시종이 있었을 텐데, 여기서는 고위 주교도 대사제도 구분없이 스스로 걷고 스스로 문을 여는 것 같았다. 물론, 대사제님 같은 어르신 공경은 사제고 일반인이고 구분이 없으니 어르신을 위해 문을 열어드리는 정도는 여기서도 똑같이 했다.
식당 안에는 테이블이 네 줄로 길게 늘어놓아져 있었다. 그리고 앞쪽에, 보통 연회장 같으면 약간 솟아오른 바닥에 상석이 위치했었을 곳, 예를 들면 어제의 무도회장에 황제 폐하와 황후 전하가 앉아계시던 바로 그곳에, 역시 테이블이 몇 개 일렬로 놓여 있었다. ‘같은 신의 자녀’라는 말은 여기서도 통하는 듯, 바닥은 모두 같은 높이였고, 의자도 모두 같았다.
새삼, 신전의 규모와는 다르게 모든 것이 검소하다는 느낌이었다. 테이블보도 실크가 아닌 그냥 뻣뻣한 천이고, 의자도 아무런 장식이 없는 그냥 나무 의자였다. 하물며 의자에는 쿠션조차 없었다. 그냥 모두가 같은 나무 의자에 앉아, 역시 별다를 것 없는 투박한 그릇에 담긴 식사를 하고 있었다.
흐음... 트리클 교는 제국의 국교이고, 신자들의 헌금이나 수입 중 일부분을 기부받는 것 이외에도 분명 제국에서 보조금도 받을 텐데? 왜 이리 빈한해 보이는 거지? 그때 내 앞쪽에 앉은 네벨레 대사제님이 말했다.
“기리인 경은 우리가 돈이 적지 않을텐데 왜 이리 불편함을 감수하며 가난하게 사는지를 궁금해하고 있군요?”
헐... 독심술이라는 게 저 정도였어? 부정해도 소용없겠지?
“그렇습니다, 대사제님. 송구합니다. 제가 촌뜨기라...”
“지나친 겸양이군요. 기리인 경의 고향에도 신전이 있었겠지요? 그 신전 사람들은 어떻던가요?”
“여기와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곳은 척박한 시골이고 여기는 제국의 중심인 제도인데...”
“하하, 신이 어디에나 계시고 신을 섬기는 것이 어디를 가든 같다면, 어디에서든 같은 것을 먹고 같은 잠자리에서 잔들 무슨 불만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제도라 해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리고 우리 신의 종들은 맛있는 음식, 좋은 잠자리에서 얻을 수 있는 쾌락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신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누리니 얼마나 좋은 일이겠어요.”
“그렇군요...”
나는 겉으로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과연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까? 모두가 당신처럼 성자처럼 살지는 못할 텐데? 아무리 트리클 신의 사제라 해도? 간신히 그 생각을 재빨리 깊숙한 곳에 묻어두고 있는 사이, 대사제님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아낄수록, 가난한 이들을 조금이라도 더 도와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부지불식간에 자세를 바로 했다. 이런 마음자세라면 존경받아 마땅하니까 말이다. 그때, 나보다 어려 보이는 아이들이 접시며 그릇이며 스푼이며 포크를 날라다가 모두의 앞에 놓았다. 내 앞에 놓인 요리는 접시에 담긴, 말린 고기 몇 점이 들어간 샐러드, 그리 진하지 않고 오히려 약간 묽은 편인 수프, 그리고 가운데 놓인 빵 바구니와 과일 바구니가 고작이었다. 에아임 형의 말을 알 것 같다. 이런 식사가 계속된다면, 아무리 하나하나가 맛있다 한들 ‘맛없는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도 신에 대한 감사요 수련의 하나’라고 할 만도 할 것 같다... 후우.
대신관님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펼친 후 짧게 기도하자, 온몸이 하얗게 물들더니 그 흰 빛이 동석한 모두에게 퍼졌다. 모두가 감사한 표정으로 스푼을 드는 동안 나는 ‘아까 대축복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하고 깨달았다. 확실히 이 축복이 있으면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 작품 후기 ============================
종교 얘기는 꼭 한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현실 종교를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종교 얘기 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트리클 교가 이상적인 면이 있지만 그런 면만 있는 건 아닌 이유도 그래서일 겁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