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155화 (155/309)

00155 6. 나 좀 가만 내버려 둬요 =========================

식사 후 우리는 식당을 나와 거대한 본관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식사 중에는 별 말 없이 대사제님부터 톨라츠 아저씨, 그리고 형까지 모두 말없이 먹는데 집중했다. 그러고 보면 몇백 명이 동시에 식사를 할 수 있을 그 커다란 식당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소박한 음식이었지만 그런대로 맛있었다. 여러번 먹을 생각은 안 들었지만 말이다.

“기리인 경.”

대사제님이 말을 걸어오셨다.

“네, 대사제님.”

“식사 맛있게 했나요?”

“네, 맛있었습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분명. 대사제님은 내가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허허 웃더니 말씀하셨다.

“오늘 기리인 경을 식사에 초대한 것은... 기리인 경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어서예요.”

“저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고요...”

“말투로 보아 이미 어떤 사람들인지 짐작한 것 같군요?”

이 분에게는 잘못 숨기다가는 큰일날 수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저의 상태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대사제님은 인자하게 웃었다. 근데 그 웃음을 봐도 왜 안심이 안 될까?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요. 어이쿠, 기리인 경, 왜 이리 표정이 굳었나요?”

나는 애써 굳은 얼굴을 풀며 웃으려 했다. 네벨레 대사제님은 손을 뻗어 내 어깨를 다독여 주셨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기리인 경. 신의 천칭이 가장 엄정하고 늦건 빠르건 나에게 되돌아온다는 건 신의 종들이 가장 잘 아는 바지요. 삿되이 이용하려 드는 신의 종들은 없을 거에요.”

그 말씀을 들으니 약간 안심은 되었지만, 아까 식당에서 들어가기 전에 생각했던 게 생각났다. 모두가 대사제님같지는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내 걱정에는 아랑곳없이 모두의 발걸음은 대신전의 활짝 열린 정문으로 향했다. 그 거대한 대신전에 다가갈수록 점점 크기에 대한 현실 감각이 없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들어가기 전 고개를 다시 뒤로 최대한 꺾어 위를 올려보았지만, 계속 이어지는 돌벽만이 보일 뿐이었다. 내가 고개를 뒤로 꺾는 것을 보고 몇몇 주교님들이나 사제님들이 부드럽게 웃으셨다. 다행히 좋게 봐주시는 모양이다. 나 같은 애들이 많이 있는 모양이지?

신전의 안에서 내가 받은 인상은 아까 식당과 매한가지였다. 수수하고, 별다른 장식이 없었다. 신의 축복을 받은 건물에 깨끗이 청소까지 하는지 먼지 하나 없이 반짝거릴 정도로 깨끗했다. 단아하고 깔끔한, 고도의 정제된 미가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어마어마하게 높은 천장 자체가 이 공간을 내리누르며 장식하고 있었다. 압도하거나, 짓밟는 느낌은 아니었다. 마치, 그래... 엄하지만 사랑으로 지켜봐주는 부모님 같은? 약간은 위축되지만 그래서 오히려 마음이 편안한 느낌이었다.

“아아...”

내가 다시 천장을 보며 감탄하자 모두들 잔잔하게 웃었다. 내가 왜 그러는지 안다는 분위기였다.

“저도 이 대신전에 처음 들어왔을 때가 생각나는군요. 예배에서 경전을 드는 시동 역할로 처음 대신전에 들어왔는데, 한동안 천장을 보며 고개를 내리지를 못했죠. 이게 신의 사랑인가, 잘못하면 혼나겠지만 잘하면 사랑받겠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내 뒤에 다가와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린 톨라츠 아저씨의 말에 나는 저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럴 것 같다. 이런 공간이라면 정말 경건하게 살게 될 것만 같다.

우리는 바닥에 깔린 카펫을 밟으며 – 다행히 카펫은 질 좋은 것이었다. 먼지날리면 안 되니까 그런가 – 안으로 들어갔다. 스테인드 글라스로 멋지게 천칭 모양을 만들어넣은 거대한 유리문은 본당으로 들어가는 통로인가보다. 우리는 거기가 아니라 오른쪽으로 꺾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기다란 복도가 나타났다.

역시 조명은 있으나 별 장식이 없는 심심하지만 단아한, 하지만 엄청 긴 복도를 지나니 여러 방들이 나타났다. 대충 예배당 뒤쪽 공간인가보다. 실제로 여러 사무실들이 있는 공간인 것 같았다. 우리는 약간 걸어, ‘소회의실’이라고 적힌 방 안에 들어갔다. 방에 불이 밝혀지고, 동그란 원탁에 우리는 둘러앉았다. 내가 문을 등지고 앉자, 형은 내 왼쪽에 앉았다. 대사제님은 내 건너편에 앉으실 줄 알았더니, 나에게서 두어 칸 건너 오른편에 앉았고, 내 건너편에는 두꺼운 안경을 쓴 어느 주교님이 앉으셨다. 톨라츠 아저씨가 내 오른편 의자를 채우자, 주교님이 입을 열었다.

“기리인 경, 나는 신의 종이자 과분하게도 주교 직을 맡고 있는 니트로프라고 합니다. 담당은 교리 및 학술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나는 정중하게, 앉은 채로 고개를 숙이며 “반갑습니다. 기리인 모스라고 합니다.”라고 인사했다. 주교님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리인 경, 그대와 한 달 넘는 기간동안 함께 여행을 하였으며, 현재 10년 넘게 세속에서 수련중인 신의 종이자 우리의 어린 형제 톨라츠 미트리클이 그대를 친구라 하였습니다. 본 교단은 교단의 친구로 그대를 환영합니다.”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는 의도’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환대에 감사합니다.” 정도로 답했고, 이어 오른쪽을 돌아보며 톨라츠 아저씨에게도 감사의 눈짓을 했다. 아저씨는 예의 그 푸근한 미소로 답했고, 그걸 본 주교님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리인 경, 우선 안심하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본 교단은 경을 겁박하거나 원하지 않는 일을 시킬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그걸 알아줬으면 합니다. 치르낙 대왕께서 트리클 교를 국교로 인정한 이래, 우리 교단은 언제나 황권을 존중해 왔으며, 그러기에 황실기사단 명예기사인 경을 겁박할 의사도 없고 그럴 수도 없습니다.”

“네, 저는 트리클의 독실한 신자로 교단의 선의를 믿습니다. 그럼 오늘 저를 초청하신 것은...”

주교님은 옆의 사제 한 분을 돌아보았고, 사제복을 입은 한 분이 입을 열었다.

“먼저, 톨라츠 형제가 보고한 내용을 가볍게 확인하고, 그 후에 경의 몸에 나타난 상황의 연구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역시, 그럴 거라고 예상한 대로였다. 아직은 거부할 명분도 없고 이유도 없지만,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

“알겠습니다. 협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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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에빌로 누나가 거쳤던 과정을 똑같이 거친 후, 주교님 옆의 사제가 입을 열었다.

“기리인 경의 증상이 톨라츠 형제가 서술한 것과 일치함을 확인하였습니다.”

주교님은 고개를 끄덕인 후 대답했다.

“기리인 경. 경도 알고 있겠지만 지금 경은 제도의 귀족가에서 가장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뛰어난 재능, 비극으로 인해 그 재능과 가족을 잃었지만 노력해 다른 재능을 개발한 의지, 그 재능으로 세운 여러 빛나는 공적. 가히 젊은 영웅이라 말해 모자람이 없을 것입니다.”

뭘 어쩌려고 저렇게 띄워주시나... 약간 시큰둥한 내 반응에 주교님이 약간 당황해하는 게 보였다. 주교님은 황급히 말을 이었다.

“기리인 경, 경을 놓고 그랜드 아카데미와 제도 대도서관으로 대표되는 학계가 치열한 물밑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을 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실은 그랜드 아카데미에서 안식년을 맞아 제 상태에 대해 함께 연구하기로 한 제 은사님을 그제 어제 만났고, 대도서관 측에서 보낸 교수님 한 분도 어제 만났습니다. 오늘 밤에 또 만나기로 했고요.”

주교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요. 기리인 경, 제안을 하나 할까 합니다.”

제안이라니?

“사실 두 단체간의 대립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마법을 마학(魔學)으로 보아 편입하고 싶어하는 대도서관 측과, 5대 마탑을 등에 업은 그랜드 아카데미 측은 사사건건 부딪히고 있습니다. 경의 연구를 위해서는 두 단체가 협력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래서 그랜드 아카데미에서도 본 교단과 대도서관에 협조 요청을 하였습니다만... 대도서관 측에서는 경을 직접 연구하고 싶어하는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요?”

“그래서, 본 교단이 두 단체를 중재할까 합니다. 두 단체의 대립을 중재하고, 두 단체가 원만하게 협력하여 경의 상태를 연구하는데 최상의 결과를 내놓을 수 있게끔 교단이 나서고자 합니다.”

하아... 설마, 내가 이 정도 수작에 넘어가리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띠링!’

<냉철이 발동합니다.>

<고급 언변이 발동합니다.>

<고급 언변의 하부 기능인 ‘유도’가 발동합니다. 당신은 대화 상대에게서 이야기를 끌어내거나, 그 이야기를 토대로 당신이 원하는 쪽으로 협상을 전개하거나 할 수 있습니다. 유도의 스킬레벨은 현재 Lv. 2이며, 고급 언변 스탯 92의 보정을 받습니다.>

냉철의 도움일까. 나는 숨을 가볍게 들이쉬었다가 내쉬는 것만으로 머리를 차갑게 할 수 있었다. 화내고 소리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나는 입을 열기에 앞서,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제님들을 쭉 둘러보았다. 모두가 자신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는 듯 거리낄 것 하나 없는 표정이었다. 억지쓰는 줄 알고 약간 부끄러운 빛을 띄운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을 줄 알았더니. 단 한 사람, 네벨레 대사제님만이 이채를 띠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독심술이 발동한 걸까?

“우선... 귀 교단에서 후의를 보여주신 데 대해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그렇게 고개를 숙여보인 후 나는 가볍게 물었다.

“저를 도와주시겠다는 뜻은 감사히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저를 도와 두 단체의 대립을 중재하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귀한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나 그 과정에서 귀 교단에 돌아가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닌가 걱정됩니다.”

번역하면? ‘니네 뭐 떨어지니까 나선 거 아냐?’ 이거다. 역시, 대신전에서 주교 역할을 하는 사람은 범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내 고상한 야유를 바로 알아들었는지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 작품 후기 ============================

USB를 직장에 놓고 왔네요.

기억에 의지해서 써야 하는데 큰일이네요;;;

초반 연재분에 mightnmagic 님이 코멘트를 해 주셨네요.

좋은 코멘트가 많아서 저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밤 연재분에서 제 생각을 정리해서 밝히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읽어주시는 여러분들 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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