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7 6. 나 좀 가만 내버려 둬요 =========================
“기리인, 잘 할 거라고 믿지만, 조심해라. 너가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훅 하고 말려드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으니까. 알았지? 가능하면 혼자 보내고 싶지 않지만, 내가 가면 공작님도 부담스러워할 거야.”
형의 신신당부가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그 집 딸내미 꼬시지 말고!”라는 어이없는 말을 남기고, 톨라츠 아저씨가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주며 마차는 떠나갔다.
“하아...”
요즘들어 한숨을 쉬는 일이 잦아지는 느낌이다. 일이 정리가 되지 않고, 오히려 점점 쌓이기만 하는 느낌이다. 진짜 형 말대로 내가 사건을 끌어당기는 운명을 타고 났나? 대체 왜... 오늘 간 대신전만 해도 그렇다. 멀쩡하고 경건하게 잘 있는 것 같던 사제님들이 왜 갑자기 내 앞에서 둘로 나뉘서 싸우냐고.
“하아...”
“오셨습니까, 기리인 도련님?”
오레즈 할아버지가 정원에서 빗자루질을 하다가 나를 보며 말했다.
“네, 할아버지. 별 일 없나요?”
“별 일 없지요. 있다가 티타임 가시기로 하셨지요?”
“네, 그 집에서 마차를 보내 줄 거라고...”
“그럼 그 때까지 잠시 방에서 쉬시겠습니까? 식사는 하셨지요?”
“네. 누님이랑 뢰다는요?”
“뢰다가 이제 내년이면 유치원을 갑니다. 그것 때문에 알아보러 함께 나가셨어요.”
“아...”
벌써 그렇게 됐나... 나야 부모님 모두 일하셨으니까, 북부군에서 그런 사람들을 위한 탁아소 비슷한 것을 운영했었지. 거기서 열심히 놀고 배우기도 했지. 학교갈 때까지. 뢰다가 가는 곳도 그런 비슷한 데인가 보다.
“기리인 도련님, 주무시면 안 됩니다. 마차가 오면 바로 나가셔야 하니까요.”
“아, 네...”
이것저것 다 잊고 잠시 자고 싶었는데, 뜨끔했다. 여행중일 때가 그립다. 자고 싶으면 자면 그만이었는데. 하아. 나는 열쇠로 별채의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갔다.
황태자 저하가 왔다 갔을 때와 방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단 하나, 편지 한 통이 놓여있었던 것 말고는 말이다. 편지에 쓰인 글씨를 읽기도 전에 내 몸은 먼저 그 편지의 향기를 눈치채고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익숙한 그 향기. 요안나 선생님이 보낸 편지였다. 나는 황급히 필통에 꽂힌 레터나이프를 집어 편지를 개봉했다. 개봉하자 그 향기가 확 하고 내 얼굴 쪽으로 뿜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물론 착각이겠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애정하는 기리인에게.
어젯밤 결국 한 숨도 못자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어. 이런 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말야. 너와의 입맞춤이 두 번째였지? 그 두 번의 입맞춤은 마치 번개처럼 내 머릿속에 파고 들어와서는,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고 자꾸만 생각나게 하고 있어.
기리인. 내가 너에게 못할 짓을 하는 걸까? 네가 괜찮다고 했으니 괜찮은 걸까? 그래도 그래서는 안 되었던 걸까? 이렇게라도 너를 잡고 싶은 건 내 욕심인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모든 것들을 뛰어넘어서, 나의 제약이 풀리는 그 날 너와 함께 하고 싶어. 너를 잡고 놓지 않고 싶어. 그때 네가 내 곁에 있다면 말이야.
아... 쓰려던 말은 이게 아니었는데. 오늘이 금성의 날이고, 내일 모레가 트리클의 날이지? 그 다음날 오후에 시간을 좀 내 주지 않겠니? 전에 내가 약속했었지? 제도에 가면 맛있는 집들을 안내해 주겠다고. 그리고... 너하고 손잡고 걷고 싶기도 하고. 그날 오후에는 경비 교대식도 있는데, 이번이 5중대 차례거든. 진귀한 광경을 보게 될 거야. 광장 한가운데 보면 기념탑이 하나 있어. 거기에서 정오에 만나자.
기리인. 보고싶어.
요안나가>
나는 편지를 조용히 접어 가슴에 대었다. 선생님을 안을 수 없으니 편지를 대신 안는 것처럼 말이다. 아직 미미하게 남은 그 향기가 내 가슴 속으로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안다. 선생님이 나라는 물고기가 어장을 못 벗어나게 관리하고 있다는 것쯤은. 내가 유일한 물고기라 해도 그건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사랑하는’이 아니고 ‘애정하는’이라고 서두를 뗀 거 봐라.
하지만, 설사 그래서 내가 어장을 잠시 벗어나 다른 여자들을 만나거나 심지어 섹스를 한다 해도, 결국은 이 편지의, 이 향기의 주박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갈 것 같다, 는 느낌이 들었다.
내 안의 반발심을 담당하는 부분이 ‘기왕 이렇게 된 거 다른 여자들하고 한 번 자 보지 그래?’하고 말하고 나섰다. ...으으. 거기에 솔깃하는 내 자신의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게 정말 싫다. 더더군다나 여기에는 자칫 잘못 잤다가는 뒷탈이 우려되는 여자들밖에 없으니까... 으으... 만약 잘못했다가 탈이라도 나면...
에잇, 그런 생각 하지 말자. 나는 편지지를 꺼내어 답장을 적었다. 간단하고 명료하게.
<애정하는 선생님.
저도 보고싶어요.
그 날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일정을 비울게요.
다음 달의 날 정오에 광장에서 봐요.
기리인>
나는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고, 요안나 선생님의 봉투에서 주소를 베껴적었다. 있다 나갈 때 할아버지한테 부쳐달라고 해야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 심호흡. 심호흡.
당장이라도, 모든 걸 다 때려치우고, 그랜드 아카데미로만 달려가고 싶어하는, 자꾸만 선생님에게로 달아나버리는 사고를 붙잡기 위해, 나는 지금 메인 퀘스트의 내용을 다시 떠올렸다. 나에게만 보이는 반투명한 버튼을 눌러 ‘퀘스트’ 창을 불러올렸다.
<메인 퀘스트(3) - 황태자의 암살을 막아라>
<#12. 점입가경>
<1) 황태자가 당분간은 암살 위협이 없다고 안심시키세요. - 성공!>
<2) 황태자가 정보가 새어나간 경로를 조사하게 하고, 그걸 당신에게 알려주게 하세요. - 부분 충족>
<3) 황태자와 협력하여 그 경로를 추적하여 조직의 실마리를 잡으세요. - 부분 충족>
<퀘스트 보상 : 황태자의 전폭적인 신뢰, 연계 퀘스트로 이어집니다.>
아, 나, 진짜... 이 정도의 단계까지 왔는데 아직도 연계 퀘스트가 남았다고... 미틱 시에서 연계 퀘스트에 골머리 앓던 건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 하아. 와중에 황제 폐하에게 보고도 해야 하는데 말이지. 형에게 말해야 하나... 그리고 황제 폐하에게 대놓고 말해야 하는데, 내가 그럴 수 있을까?
그리고, 만약 그 조직의 실마리를 잡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나 혼자서 추적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나는 내 능력을 그렇게까지 신뢰하지 않는다. 아마 혼자서 또는 다른 사람 한 명과 갔다가 푹찍악 당하겠지. 그럼 이것도, 형에게 말해야 하나? 그럼 형은 형과, 톨라츠 아저씨와, 에빌로 누나와, 그리고 나까지 합쳐서 데려가려나? 기사단 전체를 동원할 수는 없겠지...
“하아...”
아... 복잡하다, 복잡해. 아직 밝혀진 것도 없고, 시스템이 좋은 보상을 줄 거라지만, 그리고 내가 퀘스트를 거부하지 못해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 당장은 나에게 아무 것도 떨어지지 않는다. 하아. 나는 그냥, 내 몸에 일어난 증상에 대해 알아보고, 그걸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찾아보려던 것 뿐인데...
왜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 걸까. 가만히 놔두었으면 좋겠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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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도련님!”
어, 어? 나는 퍼뜩, 깨어났다. 어느새 내가 졸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차가 왔어요. 제가 잠들면 안된다고 당부를 드렸는데...”
“아, 죄, 죄송해요, 이걸 어쩌지...”
오레즈 할아버지는 내 꼴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옷걸이가 괜찮아서 괜찮겠네요. 머리만 좀 손질하죠.” 하더니 서랍에서 빗을 하나 꺼내와 내 약간 눌린 머리를 급히 처치해 주셨다.
“됐네요. 아마 공작님도 그 영애님도 기리인 도련님 얼굴만 보느라 머리 눌린 건 모르실 겁니다.”
“그 정도로 심해요?”
“농담입니다. 다행히 뒷머리 안 대고 잘 주무셨네요. 목은 괜찮으십니까?”
“네, 뭐... 옷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 어제 입으셨던 예복을 깨끗이 세탁해 놨습니다요. 망토는 안 두르셔도 될 겁니다. 어디 보자... 오늘 날씨가 따뜻하니까. 이 드레스셔츠라면 충분할테고... 여기, 에아임 도련님이 쓰시던 예복용 벨트를 가져왔습니다. 셔츠를 전부 펴서 입지 마시고, 소매를 한두 번만 걷으시죠. 네.”
할아버지는 귀족가에서 오래 지내신 경험이 헛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듯, 순식간에 척척 준비를 도와주셨다. 할아버지가 내 꾸미는 것까지 도와주실 줄은 정말 몰랐는데. 나는 할아버지의 지시대로 옷을 갈아입고, 앞에 가벼운 금속 부조가 붙어 있는 벨트를 차고, 어제 예식 때 신었던 구두를 신었다. 구두도 할아버지가 닦아놓으신 듯 반짝반짝 광이 났다.
“그리고, 여기.”
할아버지는 문간에서 나에게 꽃다발을 하나 건네셨다.
“이건...?”
“나스프 공작에게는 딸이 하나 있죠, 아마? 기리인 도련님보다 약간 나이가 많을텐데.”
역시 귀족가의 집사.
“네, 그럴 거에요. 어제 왈츠를 같이 췄었는데...”
“역시! 아마 도련님을 티타임에 부른 것 중에 그 이유도 있을 겁니다요. 레이디에게는 꽃을 드려야죠.”
꽃다발은 정원에서 꺾은 것인 듯, 정말 생생했다. 노란색의, 아직 완전히 피어나지는 않은 장미가 다섯 송이 있었다. 그 장미꽃이 흰 색의 얇은 종이로 둘러싸여 있었다.
“...”
나는 불현듯, 고향에서 리미에게 마법의 장미를 만들어주던 일을 떠올리고 순간적으로 회한에 젖었다. 그 때는 마음만 먹으면 바로 마법의 꽃을, 화려하게 물결치듯 빛나는 꽃을 만들 수 있었는데. 이제는 이렇게 직접 준비해야 하는구나...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부탁한 후, 바깥에 나가자 마차가 서 있었다. 대륙에서 최고의 위세를 자랑하는 공작가답게, 마차마저도 호화스러움이 뚝뚝 묻어나는 그런 마차였다. 옷을 잘 차려입고 중절모까지 잘 쓴, 콧수염을 기른 마부가 모자를 벗으며 인사를 해 왔다. 내가 마주 인사하자 마부가 말했다.
“기리인 모스 경이시죠? 저는 나스프 공작가에서 나왔습니다.”
“아, 네. 반갑습니다.”
“타시죠. 공작가의 저택은 좀 더 바깥쪽으로 가야 합니다. 약 10분 정도 걸리실 겁니다.”
마부가 문을 열어주었고, 나는 손에 꽃다발을 약간 어색하게 든 채 마차에 올랐다.
============================ 작품 후기 ============================
요안나 장면을 쓸 때마다 이 캐릭터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 늘 걱정합니다.
언제나 읽어주시는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