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158화 (158/309)

00158 6. 나 좀 가만 내버려 둬요 =========================

마차의 안도 호화스럽기 짝이 없었다. 푹신한 쿠션에, 내부에는 세밀하게 그려진 벽화까지. 와... 공작의 삶이란 게 이런 건가? 북대공님은 전혀 그래보이지 않았는데... 하긴, 나 요뢰브 백작가는 들어가 본 적은 있어도 성에 들어가 본 적은 없구나. 와... 지금 내 바지는 방금 할아버지가 빨아다 주신 바지인데, 이 바지가 쿠션 위의 빌로드 커버와 방석을 더럽히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이다.

말 그대로 좌불안석의 느낌으로 10분 정도 마차를 달리자, 앞 쪽의 창을 통해 넓은 저택이 드러났다. 어제 지나가다 본 보통의 집, 다세대 주택들이, 그리고 조금 전까지 있었던 형의 집이 떠올랐다. 형의 집도 정원이 있고 결코 좁은 편이 아닌데, 어제 보통 사람들이 있던 집보다도 두세배는 큰 집인데(일단 2층 단독주택에다가 2층짜리 별채도 있지 않은가!) 지금 공작의 저택은 형의 집보다도 훨씬, 훨씬 큰 집이었다. 별채가 형의 집보다 두 배는 큰 정도였다. 본채는 4층짜리 거대한 저택이 옆으로 쭉 펼쳐져 있었다. 어... 그래. 미틱 시의 시청 정도의 크기였다.

우와... 이런 집이 필요할 만큼, 사용인들이나 사람들이 많다는 거겠지? 게다가, 저 분의 본거지는 여기가 아니고 남쪽의 나스프 공작령이잖아. 본거지에는 어마어마한 성이 있겠지? 하아... 이런 게 진짜 ‘입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다’는 건가? 기가 죽는다...

저택의, 마차 두어 대가 한 번에 통과할 만한 널찍한 정문의 커다란 철문이 열리고, 마차가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마차의 열린 창문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았다. 자꾸만 형의 집과 비교하게 되어서 미안한데, 정원은 형의 정원보다 훨씬 넓었고, 훨씬 잘 가꿔져 있었다. 아니, 아예, 지금도 정원사들 몇 명이 가위 등을 들고 정원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정원사라니! 정원만 관리하는 사람이 그것도 몇 명이나 된다는 말 아닌가! 그 뿐이 아니었다.

정원 한가운데는 분수까지 있었다. 분수에는 동력이 필요할텐데, 저건 주변에 뭐가 없으니 마력석 분수겠구나.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기 위해 마력석을 쓴다고... 하아.

‘띠링!’

<냉철이 발동합니다.>

나는 눈 앞에 뜬 문구를 보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냉철이 발동해? 지금 그럴 상황인가? 냉철 덕에 곰곰이 자신을 되짚어본 나는, 내가 이 화려한, 어찌 보면 공적인 공간인 황궁보다 더 화려한 면이 있는 공작가의 저택과 정원에 압도되어 기가 죽어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짝!

나는 두 손으로 가볍게 내 뺨을 쳤다. 정신차려라, 기리인. 화려함에 감탄하는 걸로 족해. 화려함에 기가 죽어버리면 안 된다. 머리를 차갑게 해라. ...‘시스템’, 고마워.

<당신의 안전과 이익이 내 안전과 이익입니다.>

저렇게 말해주니 참 고맙군. 오히려 미사여구보다 훨씬 믿음이 간다. 나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아직 가슴은 두근거리지만, 마음은 아까보다는 편안하고, 어깨는 아까보다 가볍다. 좋아. 냉정하게, 냉정하게. 마차가 점차 느려지더니, 왼쪽으로 돌며 서서히 멈추었다. 마부가 뛰어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 마차 문이 열렸다. 나는 꽃다발이 망가지지 않게 조심하며 훌쩍 뛰어내렸다.

저택의 정문으로 올라가는 대리석 계단 앞에는 나이가 50대 정도 되어보이는,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빗어넘기고 역시 콧수염을 단정하게 기른, 약간 더운 날씨에도 얇으나마 재킷까지 정확하게 차려입은 사람 한 명이 서 있었다. 나스프 공작도 그랬고, 그 딸인 아르논 양도 그랬지만, 이 분도 약간은 피부색이 검은 쪽이었다. 남부인의 특징이라고 해야 하나? 흐음... 내가 내려가자 그가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나스프 공작가 저택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이 저택의 살림을 맡고 있는 에크네익스라고 합니다.”

“기리인 모스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공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드시지요.”

나는 공작가의 사용인들을 보며, 다시 한 번 공작가의 힘을 새삼 실감했다. 사용인이 많다거나 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대륙 최고의 위세를 자랑하는 공작가의 사용인이라면, 마치 드래곤이 사는 산의 여우가 자기가 드래곤인 양 위세를 부리듯, 약간은 거만한 빛을 숨기지 않을 것 같은데, 적어도 어제 막 기사가 된 나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대할 것 같은데, 그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모두가 공손하고, 모두가 친절했다.

사용인들 모두가, 사소한 상처가 곪아 큰 병이 된다는 것을, 공작가의 위명과 위엄은 그들이 친절하고 공손할수록 어마어마하게 커진다는 것을 잘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그들을 다스리는 공작의 능력과 위엄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용인들 하나하나에게 자신의 생각을 납득시킨 거니까 말이다. 그게, 강압이든, 위엄이든, 설득이든 말이다. 나는 내 안에서 나스프 공작에 대한 평가를, 그리고 위험도를 약간 올렸다.

문조차도 부조가 새겨진 화려한 것이었다. 어느 젊은 사용인이 열어주는 너른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자, 넓은 로비가 나타났다. 뒤쪽으로는 윗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벽에는 공작가의 문양 – 사자 모양인가? - 이 새겨져 있는 화려한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양 쪽 벽에는 척 보기에도 엄청난 솜씨의 명장이 그린, 내 키보다 큰 그림들이 걸려 있었고, 로비의 한가운데는 아름다운 여인이 사자의 등에 앉아 있는 조각상이 보였다.

그리고 그 조각상 앞에 공작님과 아르논 양이 서 있었다.

“오, 기리인 경. 와줘서 고맙네.”

나는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했다.

“공작님,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자. 그런 겸양은 적당히 하게. 제국의 젊은 영웅을 만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니 나에게도 유익한 시간이라네.”

이쯤에서 한 번 상대를 띄워줘야 할 것 같다.

“여기까지 오면서 공작가의 위명과 공작님의 위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영광입니다.”

“허허, 겸양은 됐대도.”

하지만 싫지 않은 표정. 먹힌 거겠지? 내가 과한 아부를 한 것도 아니고 말야. 나는 이어, 아르논 양을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아르논 양, 다시 뵈어 영광입니다.”

“반가워요, 기리인 경.”

그녀가 손을 내밀었고 나는 어제처럼 무릎을 가볍게 꿇으며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다시 일어나자 그녀는 어제 그랬듯, 배시시 웃었다. 은발머리, 은발 눈썹에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의 그녀는, 약간 어두운 색의 피부를 더욱 강조하는 새하얀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드레스에는 금색 자수가 놓여 있었다. 물론 드레스의 질도 최상급이었지만, 옷을 만든 사람의 안목이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차. 그녀를 감상하고 있을 시간이 아니지. 나는 가져온 꽃다발을 아르논 양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꽃을 받아들고는(공작가의 정원을 본 탓일까, 그녀가 꽃이 작다고 약간은 실망하는 표정을 지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향기를 들이마셨다.

“감사해요, 기리인 경. 오시기 직전에 꺾으신 건가 봐요? 너무 향기롭네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공작님은 흐뭇한 표정으로 – 에?! - 우리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자! 위로 올라가지. 햇살도 따뜻하고 봄바람이 좋으니, 2층의 테라스에서 정원을 내려다보며 티타임을 갖도록 하세.”

공작님께서 앞장서서 올라갔고, 나는 아르논 양을 바라보다가... 혹시? 하고 어제 춤출 때처럼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는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가볍게 맡기듯 올렸다. 어쩐지. 드레스 너머로 몸매가 드러난다 했다. 이런 드레스는 계단을 오르내릴 때 반드시 뭔가를 잡아야만 위험하지 않겠구나. 그리고, 이럴 때 레이디가 난간을 붙잡고 가게 두는 건 신사가 아닌 거지.

가벼운 장갑마저도 어제처럼 은색에 가까웠다. 어제도 잡아본 아르논 양의 손은 나긋나긋했고, 작았다. 이브닝 드레스를 입어 발을 넓게 벌리기 힘든 그녀를 위해 나는 그녀에게 맞추어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꼭대기에서는 공작님이 우리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은 분명 작위를 수여받기 전까지는 그저 마법사가 되기 위해 준비하던 평민이라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공작님.”

“그런데 어찌 그런 신사도를 발휘하는 건가? 신기하군 그래.”

이건 농담일까, 견제일까? 다행히 공작님은 웃으며, “자, 이 쪽으로 가세.” 하고 앞장서 걸어가셨다. 나는 잡아주던 손에 힘을 뺐고, 아르논 양은 한 템포 느리게 손을 빼냈다.

공작님을 따라 복도 끝까지 걸어가, 커다란 문을 지나자 넓은 테라스가 보였다. 널찍한 테라스에서는 정원 전체가 내려다보였다. 테라스의 한가운데에는 역시 호화스럽지만 천박하지 않고 품격있어 보이는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의자가 세 개 놓여 있었다. 공작님이 자연스럽게 뜰을 마주보는 가운데 자리로 가서 앉자, 나는 아르논 양이 공작님의 왼쪽에 앉게끔 의자를 빼준 후 – 흘깃, 공작님을 살펴보았는데, 공작님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계셨다. - 공작님의 뒤를 돌아 오른쪽으로 가 앉았다. 곧, 아까 보았던 에크네익스 씨 외 몇 명이 자그마한 카트를 밀며 우리 쪽을 향해 다가왔다.

카트 위에는 쿠키 접시와, 스콘(scone) 같은 빵바구니, 그리고 잼과 크림이 담긴 호화스러운 무늬가 새겨진 사기그릇들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역시 호화스러운 차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그 차주전자 바닥이 파란색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세상에, 차주전자에까지 마력석을 쓰다니... 차가 식지 않기 위해 그러는 거겠지... 여름에 냉차(冷茶)를 마실 때는 반대로 계속 차갑게 하기 위해 마력석을 쓰겠지? 새삼, 나와는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걸 느꼈다.

사용인들이 가져온 접시를 테이블 위에 놓는 동안, 에크네익스 씨는 공작님, 아르논 양, 그리고 나의 순으로 찻잔을 내려놓고, 차를 따랐다. 세팅이 끝나자, 한 젊은 사용인을 제외한 나머지가 인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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