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9 6. 나 좀 가만 내버려 둬요 =========================
“들지.”
“네.”
향이 좋은 홍차다. 나는 티타임을 평소 가져본 적도 없고, 향을 맡아서 홍차의 종류를 구분하거나 좋은 홍차인지 알 수 있는 소양도 없다. 하지만 부모님께 배운 게 있다면, ‘내가 좋다고 판단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것, 그리고 ‘좋은 걸 좋다고 말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점이었다. 한 모금. 약간은 시큼한 듯도 하지만, 화사한 향이 그대로 맛으로 옮겨와 있었다.
“좋군요.”
부지불식간에 나온 내 말에 공작님과 아르논 양 모두 미소를 지었다.
“차에 대해 소양은 없지만 향이 좋고 화사한 느낌입니다.”
그렇게 덧붙이자, 공작님은 웃는 표정 그대로 한 모금 맛본 후 말했다.
“실은 나도 차에 대해 소양이 별로 없다네. 그냥 주는 대로 마실 뿐이지. 오늘의 차는 약간 시큼한 맛이 있군. 스콘과 잘 어울리겠어.”
그러면서 손수 스콘을 집어서 잼을 발라 한 입 물었다. 음. 귀족가는 왠지 스콘도 예의바르게 포크와 나이프를 쓸 것만 같았는데. 일부러 나를 편하게 해 주려 그러는 건가... 했는데, 의외로 아르논 양도 쿠키를 손으로 집어들었다. 너무 고위 귀족가라 오히려 그런 건 신경 안 써도 되는 건가?
잠시, 아무 말 없이 차와 스콘과 쿠키를 즐기고 있다가, 공작님이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말을 시작할 사람은 공작님밖에 없었으니까.)
“그래, 어떤가? 제도는?”
나는 황급히 씹던 것을 삼킨 후 대답했다.
“다행히 다들 친절히 대해주셔서, 정신없지만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가? 재미있군. 자네도 제도의 깍쟁이라는 말은 들어보지 않았나?”
“아... 그 말이 남부에서도 쓰입니까? 저희 북부에서도 많이 씁니다.”
“남부에서도 많이 쓰지. 내가 젊을 때, 제도로 처음 올라왔을 때는 사람들이 내 뒤에서 그렇게들 많이 수군거리곤 했네. 남부 촌놈이라고 말야.”
“그럼 제 뒤에서도 분명 북부 촌놈이라고 수군대고 있겠군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웃자, 공작님과 아르논 양 역시 가볍게 미소지었다. 공작님이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다시 말했다.
“기리인 경은 남부에 와 본 적이 없지? 남부는 농산물이 풍성하게 나는 땅이다 보니 굶어죽을 걱정, 얼어죽을 걱정들을 덜 해.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많이 너그럽고 느긋한 편이라네. 반면 제도에서는, 조금만 손해를 봐도 뒤로 밀려나는 일이 잦으니, 사람들이 자신의 손해와 이익에 민감하지.”
“치르낙 대왕의 부인이셨던 리에나 왕비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르는군요.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두 가지...”
“이익과 명예다.”
아르논 양이 끼어들어 말을 완성했다가, 자신이 레이디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는 걸 알고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수그렸다. 공작님은 껄껄 웃었고 나는 웃으면 민망해할까봐 그냥 미소만 지었다.
“그래. 아무튼 그러다보니 제도에 처음 왔을 때는 적응이 안 되었지. 공작가의 후계자인데도 말일세. 지금이야 공작위를 계승받고 좀 낫지만, 젊을 때는 참... 사람을 믿기 힘들었다네.”
나는 가볍게 고개만 주억거렸다. 잠시 차와 스콘에만 집중하던 시간이 지나고, 공작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방에서 초청이 많이 오지?”
“네, 이름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분들도 초대장을 보내시더군요. 새벽에 많이 당황했습니다.”
“하하, 그럴테지. 내 기억을 돌이켜봐도 지난 30년 안에 자네만큼 사교계에 화려하게 데뷔한 사람이 없다네. 평민일 때부터 대공가와 공작가를 중재하는 어마어마한 공을 세우고, 사람 보는 눈이 날카롭다는 에아임 경과 친해져 의형제를 맺지를 않나, 첫 등장이 황제 폐하로부터 명예 기사직을 수여받질 않나, 그 날 오후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길이 남을 활 솜씨를 보여주지를 않나... 무엇보다, 절세의 미남 아닌가.”
“과, 과찬이십니다, 공작님...”
아니 그러니까 왜 아르논 양이 얼굴을 붉히냐고요...
“그러니,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네, 기리인 경. 어디에서 이런 인물이 혜성같이 나타난 건가? 배경은 어떤가? 무슨 일을 겪었나? 궁금한게지. 내가 자네를 초청한 것도 그런 이유라네.”
나는 칭찬에 당황하면서도, 나스프 공작의 말솜씨가 탁월하다는 생각을 새삼 했다. 초대가 많지 않나 -> 네가 대단해서 그렇다 -> 사람들이 궁금해한다 -> 나도 궁금하다 -> 그러니 말좀 해봐라. 저런 게 유도인가?
‘띠링!’
<좋은 관찰입니다. 공작은 오랜 단련을 통해 저런 화술을 습득했다고 보입니다. 당신도 노력하기 바랍니다.>
그래, 그래. 노력해야지.
“경은 원래 마법사 아카데미 졸업 예정이었다고?”
“네, 저는 원래 북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제도의 그랜드 아카데미에 입학 허가를 받아놓은 상태였습니다...”
그 뒤로 나는 한참 내 얘기를 했다. 마법을 잃고 부모님도 돌아가신 얘기, 지도교사와 1년간 연구하기로 한 얘기(내 몸 상태 얘기는 뺐다), 내려오던 배에서 에아임 형을 만난 얘기, 우연히 얽혀들어, 살인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다가 보니, 북대공가와 융파트 공작가의 대립을 중재한 얘기(이것도 상세한 사항을 빼느라 좀 힘들었다), 레카 시에서 격투기 대회를 통해 북부와 남부의 대립을 중재한 얘기...
이야기가 끝났을 때 공작님과 아르논 양은 내 얘기에 푹 빠져 있었고 찻잔은 비어 있었다. 나는 이야기하느라 입이 마른 걸 깨닫고 찻잔을 들었다. 식은 찻물을 넘기자, 어느새 우리 곁에 서 있던 남자가 다가와 찻잔을 채워주었다. 처음 우려낸 차처럼 향긋하고 따뜻했다.
“세상에...”
아르논 양이 짧게 감탄하고, 공작님도 놀란 빛을 감추지 못했다.
“자네는 대륙의 절반을 지나오면서 끌어모을 수 있는 사건은 죄다 끌어모았군. 이제 막 성인이 된 청년에게 신께서 왜 이런 과중한 일들을 주셨을까...”
나는 뭐라 대답할 말이 없어 차만 홀짝거렸다. 공작님은 하늘을 보더니, 아차, 하고 말했다.
“기리인 경.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은데, 혹 시간이 괜찮다면 저녁 식사도 함께 하고 가면 어떤가? 아르논도 기뻐할 걸세.”
마지막 말을 공작님은 일부러 짓궂은 표정으로 했고, 아르논 양은 “아버님도 참...” 하며 레이디답게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이 상황에서 거절하면 내가 나쁜 놈이 되겠지?
“기꺼이 그리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저녁을 준비하라고 이르겠네. 아르논, 해가 질때까지 기리인 경과 정원을 산책하는 게 어떠니? 우리 집의 정원을 잘 아는 아르논 네가 안내해 드리렴.”
“아... 네, 아버지. 기리인 경, 잠시 실례할게요.”
아르논 양은 고개를 숙인 후 안으로 들어갔다. 산책이라... 저 옷을 입고는 못 하겠지? 옷 갈아입으러 들어가는 건가. 아르논 양이 사라지고, 공작님은 옆에 서 있던 사용인을 불러 테이블 위의 찻잔과 접시들을 치우게 했다. 그 남자가 물건을 정리해 카트에 담는 동안 나는 새삼 긴장했다. 이제, 본론이 나오겠구나.
공작님은 그 남자가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나에게 말했다.
“미안하네. 듣는 귀가 적어야 할 이야기를 좀 할까 하네만.”
“경청하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약간 격식이 없더라도 양해하게. 자네 내 여동생이 황후인 건 알지?”
어우, 이렇게 훅 들어와도 되나.
“네,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아무래도 황궁에 우리 쪽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건 짐작할 수 있겠군?”
“네, 그것도 들어 알고 있습니다.”
공작님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잠시 팔짱을 낀 채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똑 똑 똑 두드리다가, 나를 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알게 됐네만, 이런 얘기를 하는 걸 용서하게. 자네가 에아임 경과 함께 황제 폐하를 만났다는 걸 알게 되었네.”
역시나... 그것 때문에 아르논 양을 자리를 피하게 한 거군.
“그리고 나서 자네와 에아임 경은 바로 기사단 예복을 맞추러 갔을테지. 그러지 않고서야 다음 날 아침에 망토를 두르고 나타날 수는 없었을 테니까.”
“옳게 보셨습니다.”
“그럼 기리인 경, 그날 아침에 무슨 얘기를 했는지, 이야기해 줄 수 있는 부분을 좀 말해주면 좋겠는데.”
어우. 잠시 오늘 아침에 내 방에 왔던 황태자의 생각이 났다. 비르히가 뿜어내던 위압감. 분명 나스프 공작에게 스킬은 없었는데. 위압감이 장난 아니다. 나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심호흡을 한 번 했다. 하지만, 내 의지력은 대륙 최강이란 말이다. 그 정도에 기죽을까보냐. 황제 폐하 앞에서도 할 말은 다 한 나다.
“공작님, 말씀드리기 전에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만일 제가 황제 폐하와 있었던 자리에서 나눈 이야기를 거짓으로 꾸며 말씀드린다 해도, 공작님은 모르시지 않겠습니까?”
공작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 그리고 설령 자네가 이 자리에서 사실을 말하더라도, 나는 전부 믿지는 않을테지.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밝혀질 기회를 기다리겠지.”
“그 말씀이 더욱 무섭군요.”
“자네도 만만치 않은 배짱이군.”
“황제 폐하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공작님은 허허, 하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래, 말해줄 수 있겠는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은 말씀드리겠습니다.”
전부 다 말해주는 것도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여기서 만에 하나 거짓말을 했다가 나중에 밝혀지면 나스프 공작가는 나의 적이 된다. 그 뿐이랴, 황제 폐하와 공작이 대립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둘 다 용납할 수 없는 사태이지. 그러니, 중간책을 택하자. 적절하게, 말해줄 수 있는 부분만 말해주자. 어차피 공작님도 그렇게 말하기도 했고...
============================ 작품 후기 ============================
후우, 여기까지... 9연참이네요.
참 뿌듯하고 흥미있었지만, 정말 힘들기도 했습니다.
두 번 하려면 좀 더 에너지를 축적해야 할 것 같습니다. ^^;;
많은 분들이 성원해주셔서 그래도 보람을 느끼며 간만에 재미있게 글을 썼습니다.
연참 기간동안 리플이 좀 달린 편인데, 이걸 편별로 묶기는 어렵고,
달아주신 분과 편수를 명시하고 리리플 하겠습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151) // 묘사는 충실하지만, 전개는 빠르게!
얼룩야옹이 님 (151, 152) // 너무 일찍 일어나신 것 아닌가요 ㄷㄷ 감사합니다!
eastarea 님 (151, 152, 153, 154, 155, 156, 157, 158) // 크으, 국밥에는 쏘주 한 잔 꺾긴 해야죠 ㅎㅎ 매 편마다 리플 달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큰 힘이 되었습니다.
akins 님 (154) // 감사합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쌜 님 (1, 5, 14, 17) // 65를 평균 생각했거든요. 평균 밑이면 아무래도 빌빌대니까... 인공이는 법사 출신이라 아무래도 겁이 많죠 ㅎㅎ 아 그리고, 시르티가 누군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고보니 한 번 이름 만들고 잊어버렸네요 그 캐릭터는 ㅎㅎ;;
백은빛 님 (1) // 감사합니다. 사실 제목 안티라는 말은 처음부터 계속 들었어요. 그런데 바꾸면 바꿀수록 평이 안 좋아지는 기적이...
쩌비 님 (17, 127) // 감사합니다. 기리인 의지력 얘기는 말씀이 맞긴 한데, 얘가 지금까지 차인 적이 한 번도 없다가 처음 맞은 거니까 그럴수도 있다... 정도로 봐주세요 ^^; 요안나는 좀 미스테리한 캐릭터가 맞죠?
GoodYear 님 (92) // 그 정도는 돼야 닳고 닳은 사람들한테 공통적으로 인정받지 않겠습니까? ㅎㅎ 감사합니다.
인비 님 (157) // 응원해주셔서 1000을 넘겼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지적해주신 부분은 수정했습니다. 다음에도 이런 연참 하려면... 좀 회복하고 나서야...ㅎ;;;;
코모에 님 (158) // 흥미진진하게 읽어 주셔서 축날뻔 했던 몸이 나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쓸게요!
mightandmagic 님(2, 14, 16, 32) // 우선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2편의 편수 부분은 나중에 따져보고 수정하겠습니다.
16편 제가 과거에 멘붕한 후기 지적 감사합니다. 후기는 대체하도록 하겠습니다.
32편... 기리인이 지능 100에 영재 학교에서 교육받았을텐데 왜 저런 걸 모르느냐는 지적에 대해서, 영재 학교에다 하나의 특화 과목에 대해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학교에서는 저런 것들을 잘 가르칠 리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불어, 기리인은 아무리 천재라 해도 이제 갓 성년이 된 사람에 불과합니다. 영어에서 어릴 적부터 재능을 발휘하는 사람을 신동, 영재라는 뜻을 가지는 prodigy라고 하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천재 genius라고는 잘 부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과물로 말하는 거죠. 그리고 기리인은 분명 지능은 대륙 최고 수준입니다만. 아직 지식이나 경험이 부족해 지혜 측면에서는 갈 길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점에서 겸손하게 굴지 않으면, 버릇없는 어린 천재들 캐릭터처럼 되어버릴 우려도 있고요.
Shadow3932 님(107, 110, 113, 116, 123, 131) // 추리 편을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트릭 생각하느라 골머리를 많이 앓아서 제게는 소중한 편들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기리인을 굴릴 예정이니 재미있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ㅎ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