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1 6. 나 좀 가만 내버려 둬요 =========================
우리는 가볍게 팔짱을 낀 채 정문을 통해 정원으로 나갔다. 정원 한 가운데에는 원형의 공간, 아까 로타리라고 불렀던 것이 있었고, 그 안에는 잘 깎인 잔디 한 가운데로 분수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 분수를 중심으로 정원은 네 곳으로 나뉘어 있었다.
“기리인 경, 이 쪽으로 가요.”
그녀는 나를 왼쪽으로 당겼다. 여전히 손은 내 팔꿈치 위에 올려진 채였다. 정원에서 작업을 하는 사용인들의 안 보는 듯 보는 시선을 보며 우리는 아르논 양의 걸음에 보조를 맞추어 천천히 걸어갔다.
풀에서 나는 향기와, 양 옆의 잘 정리된 장미 덤불에서 나는 향기가 너무 향긋했다. 우리는 조용히, 아무 말 없이, 장미와, 팬지들이 잘 피어 있는 덤불들 곁을 걸어갔다.
“고향에서도 이런 건 본 적이 없는데... 정말 대단하군요.”
“처음에 제일 좋은 걸 보여드리고 싶었거든요. 이곳이 봄 꽃들이 모여있는 곳이에요.”
“아...”
그러고 보니 저쪽에 겹겹이 베고니아도 보인다. ...여자와 많이 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꽃 몇 종류를 구분할 수 있는 심미안 정도는 생긴다. 덤불 너머,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들이 높이 솟아 있었다. 사용인들이 그 나무 곁에 사다리를 가져다놓고 가지치기를 하며 나무의 모양을 관리하고 있었다.
“기리인 경은...”
“네?”
“정말 대단하세요.”
“공작가의 레이디 앞에서는 미천할 뿐입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나는 움찔하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르논 양은 내가 그녀를 만난 이래 처음으로 힘주어 말했다.
“저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을 뿐이에요. 그저 기초적인 교육과 사교계 교육을 받고, 사교계에서 활동하다가, 아버지가 정해주는 남자와 결혼하게 되어, 귀족가의 안주인 노릇을 하며 살아가겠지요. 그에 비해, 기리인 경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일궈내셨잖아요. 황제 폐하도 그렇고, 아버지도... 경을 높이 사시고 계시잖아요.”
뭐라 말해야 할까. 우리 둘은 말없이, 베고니아 덤불 곁을 지났다. 로터리에서 길이 길게 뻗어나와 우리 앞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길 끝에는 파티오(patio) 같은 원형의 공간이 있었다.
“기리인 경, 잠시 앉았다 가시겠어요?”
“네, 그렇게 하시지요.”
나는 그녀와 함께 파티오로 걸어갔다. 쿠션이며 의자들을 매일 관리하는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나는 (비록 바지 차림이라 해도) 아르논 양을 먼저 앉힌 후 그녀의 건너편에 앉았다.
마침 화제도 애매한데 잘 됐다.
“아르논 양께서는, 그럼, 현재 자신의 처지에 대해 불만이신 건가요?”
아르논 양은 고개를 저었다.
“단 한번도 가문이나 아버님에 대해 불만을 품은 적은 없었어요. 아버님 덕에 좋은 음식, 예쁜 옷과 보석, 화려한 파티 등을 누리면서 자라 왔으니까요. 레이디라면 마땅히 가문의 요구에 따라야 하는 법이죠.”
“그런데 저를 부러워하시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아서... 결례였다면 죄송합니다.”
약간은 툭 던진 말이었는데, 착한 그녀는 이렇다 하지 않고 대답해 주었다.
“아뇨, 맞게 보셨어요. 기리인 경. 저는 경이 부러워요.”
“어떤 게 부러우십니까?”
“저도 한 번쯤은 아르논 나스프가 아닌 데임(dame) 아르논처럼 불려보고 싶었거든요.”
부끄러워 하지 않지만, 아쉬워하는 태도로 그녀는 고개를 약간 오른쪽으로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기사는 가문에 수여받는 작위를 받은 것이 아니므로, 이름에 경을 붙여 경칭한다. 내가 모스 경이 아닌 기리인 경이라고 불리는 것, 에아임 형이 로그푸스 경이 아닌 에아임 경이라고 불리는 것이 좋은 예이다.
“제가 별 능력이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나스프 가문의 외동딸 레이디 아르논이 아닌, 나 자신을 보아주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했어요. 물론 불가능하겠지요. 하지만 기리인 경을 보니, 부러워졌어요. 찬란하게 빛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어요.”
눈에 열기마저 담고 아르논 양이 말했다. 아. 큰일이다. 중증인데, 저 정도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대로 두면, 더 빠져버리는 거 아닌가 몰라...
“아르논 양. 그저께까지만 해도 제가 평민 신분이었던 것은 아까 들어서 아시지요?”
“네, 어제 어전에서 기사 서임을 받으시기 전까지는...”
“고향에서 같이 아카데미를 다니던 사람 중에, 백작가의 영애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나는 리미 얘기를 꺼냈다. 그녀는 ‘얘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러나’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제 자랑 같아서 말씀드리기 부끄럽습니다만, 저는 계속 수석을 놓치지 않았지요. 지방에서는 그 정도 되어야 그랜드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으니까요. 반면 그 영애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결코 잘 하는 수준이라고는 할 수 없었어요. 마법사라면 응당 해야 하는 마법 회로 단련도 게을러 다른 이들보다 서클 수도 낮고, 학문적인 공부도 썩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요. 아마, 제 운명이 이렇게 큰 격변을 겪지 않았다면, 저는 제도로 와 그랜드 아카데미를 다녔을 테고, 그녀는 마찬가지로 제도에 와서 사교계에 데뷔할 준비를 하게 되었겠지요.”
“네...”
“그런데 아르논 양. 저는 그녀가 많이 부러웠습니다.”
“네? 경은 수석이셨다고 하시면서 왜...”
“뒤가 있다는 것이, 제 2의 기회가 있다는 것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아...”
“저는 물론 합격을 의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유 같은 것은 없었지요. 돌아가신 저의 부모님은 그저 군에서 일하시는 분들이셨고, 생활이 모자라지는 않지만 아들을 제도로 유학보낼 만큼 넉넉한 삶은 아니었으니까요.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랜드 아카데미의 장학생이 되어야 했죠. 다행히 그렇게 되긴 했지만, 너무나도 무서웠습니다. 실패하면 어쩔까. 우리 집안 살림에 나를 유학 보낼 수는 없을 텐데. 그랜드 아카데미에서 다른 일을 찾아봐야 하나...”
아르논 양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법을 잃은 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상단에 끼어서 여행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 몫을 해야 하기 때문에, 토할 정도로 달리고, 매일 몇백 발씩 활 연습을 했지요. 버림받으면, 다른 사람에게서 민폐라는 말을 들으면 저는 버림받을지도 모르니까요.”
물론 과장이 잔뜩 들어가 있지만, 이야기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이 정도 양념은 괜찮겠지.
“여러가지 공훈을 세웠던 것도, 어떻게든 힘이 되고 싶다, 마법이 없이도 내가 가치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몸부림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저는 사실 아직도 그 친구가 부럽습니다. 아르논 양이 부럽습니다.”
“제가 왜요?”
“이런 멋진 정원을 매일 보고 지내시지 않습니까.”
나는 웃으며 두 팔을 벌려 보였다. 역시, 별로 우습지도 않은 말에 그녀는 웃어주었다.
“어릴 적에, 서로 상대방이 든 빵이 더 크다며 계속 바꾸기만 하다가 끝내 쫄쫄 굶은 바보 두 형제 이야기 들어보신 적 있으시죠?”
“네, 있어요. 기리인 경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은...”
“가문도 능력이고 가문의 힘도 자신의 힘 아니겠습니까? 아르논 양이 그런 것을 배제한 자신만의 것을 찾는 건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긴 말씀 드렸습니다. 물론 아르논 양은 나스프 가의 레이디가 아니시더라도 충분히 지혜로우시고, 친절하고 상냥하시고, 아름다우시지만, 레이디이시기 때문에 그 매력들이 더더욱 빛을 발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르논 양이 약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제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여기서 부정했다간, 난리나겠지? 자신의 매력을 부정당한 여자는 상처입은 마수보다 무서우니까...
“네, 아르논 양은 충분히 매력적이십니다.”
“감사해요, 기리인 경...”
그녀는 다시 나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나는 좀 위험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그제야 했다. 아니, 아직은 괜찮겠지. 내가 아르논 양에게 뭐 약속을 한 것도 아니고, 육체관계를 가진 것도 아니고. 책임질 일을 한 것도 아니고 말야.
“기리인 경은 말씀을 참 잘 하시는 것 같아요.”
고급 언변 92 때문이죠, 라고 말할 수는 없지.
“과찬이십니다. 청자가 좋아서 말이 술술 나온 것이겠지요.”
“지나친 겸양이세요.”
그녀는 다시 배시시 웃고는 말했다.
“가실까요, 기리인 경? 정원의 나머지 부분들을 안내해 드릴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까처럼 그녀의 뒤로 다가가 의자를 빼 주었다. 내가 왼팔꿈치를 내밀자 그녀는 아까처럼 손을 가볍게 올려놓는 것이 아닌, 내 팔을 안다시피 하며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연인들처럼 바짝 붙은 자세가 되었다.
“어, 어...”
내가 그녀 쪽으로 확 쏠려서일까, 아르논 양은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옆으로 넘어지려 하였다. 나는 황급히 아르논 양 쪽으로 허리를 숙여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 다행히 그녀가 넘어지기 전에 잡을 수 있었다. 그녀는 뒤로 반쯤 누운 자세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와, 되게 민망한 자세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연인들이 문간에서 서로를 바로 쓰러트릴 것처럼 격한 입맞춤을 나누기 직전의 자세...라고 해야 하나. 이건 또 무슨 고전적인 코미디의 주인공들이냐... 이 자세로 오래 있다가는 무슨 사단이 나도 나겠다 싶어, 그녀가 무슨 말을 할 듯 우물쭈물대는 사이 나는 얼른 그녀의 허리를 당겨 그녀를 바로 세웠다.
“괜찮으신지요? 실례했습니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내가 다시 팔꿈치를 내밀자, 그녀는 아까처럼 내 팔을 안다시피 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그 동작을 대비하고 있었기에 나는 별 문제 없이 아르논 양의 몸을 받아낼 수 있었다. 얇은 셔츠와 바지 너머로 느껴지는 아르논 양의 몸은, 어제 춤 출 때 느꼈듯, 탄력있고 매력적이었다.
============================ 작품 후기 ============================
아. 졸립니다.
낮에 잤어야 했는데 못잤더니. 막 졸음이 쏟아지네요.
과연 아르논 양과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되기를 원하세요? ㅎㅎ;;;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셔서 아직도 얼떨떨하고 기분이 좋습니다.
모두 여러분들 덕분입니다. 열심히, 열심히 쓰겠습니다.
후원쿠폰 주신 계룡산도인님, 원고료쿠폰 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판타지zz 님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드보험 님 // 기리인은 정우성의 그 명언 '잘생긴 게 최고야'를 공감할지도요.. 쳇... 작가지만 부럽다...
eastarea 님 // 그 '꽃'길이 우리가 생각하는 '꽃길'일지는...ㅎㅎ;;
니코틴 님 // 좋은 평 감사합니다. 정주행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힘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