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2 6. 나 좀 가만 내버려 둬요 =========================
그러고 보니... 나는 단 한번도 아르논 양의 정보를 확인해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한 번의 왈츠 상대, 그리고 정보를 캐내는 상대로만 생각했지, 이렇게 다시 만나리라고는, 그 뒤로도 얽힐 가능성이 있다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으니까... 이거 방심이라고 봐야 하나?
‘정보 확인.’
<이름 : 아르논 나스프
나이 : 21
HP : 1214/1214
힘 : 64
민첩 : 82
지력 : 81
마나친화력 : 68
매력 : 85
지구력 : 66
특수 :
스킬 : 사교술 A->
<나스프 공작의 외동딸입니다. 사교계에 데뷔한지 3년째입니다. 당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사정상 남자 경험이 별로 없습니다. 주의를 요합니다.>
그래, 그럴 거 같더라... 간단한 칭찬에도 얼굴을 붉히는 걸 보면 말야. 공작가의 딸이라 칭찬에는 익숙할 줄 알았는데, 별로 그런 게 아닌 건가? 아니면... ‘젊은 남자’에게 칭찬을 받은 게 별로 없어서 그런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처럼 나를 꽉 붙든 건, 그녀로서는 꽤 용기낸 행동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구나...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어색하게 대하지도 말자.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나는 몸을 바싹 붙였지만 오히려 얼굴을 붉힌 채 아무 말도 못하는 아르논 양이, 약간 귀엽다 라고 느끼면서(연상녀에게서 귀여운 면을 발견하는 건 내 특기인가?)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아까 지나온 곳이 봄 꽃들이 모여있는 곳이라고 하셨죠? 그럼 이 곳은 어떤 곳인가요?”
“아아... 이 곳은 여름에 꽃이 많이 피는 곳이에요. 나무들이 많이 있죠?”
“그러고 보니... 꽃봉오리들이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하는군요. 저 쪽의 화단은...”
“화단에는 나팔꽃들이 피어요.”
“아...”
나는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르논 양, 나팔꽃 좋아하십니까?”
“네, 예쁘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오후에 보면 마른 꽃들이 시들어 떨어져 있는 건 별로 보기 좋지 않았어요.”
“저는 어릴 적에 어머니께 그것 때문에 혼이 많이 났지요.”
“네?”
“저희 집 앞에 조그만 화단이 있었거든요. 거기에 어머니께서 심심풀이 겸 집에서 먹을 요량으로 여러 가지를 심으셨지요. 제일 기억나는 건 여름에 토마토네요. 아침에 갓 딴 토마토를 한 입 깨물면 입 안으로 상큼한 맛의 과즙이 푹 밀려드는 게 정말 맛있었죠. 그러다가 옷에 토마토 물 묻혀서 혼나기도 많이 했구요.”
그녀는 내 팔을 잡은 채, 나를 약간 올려다보며 생글거리면서 내 얘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나팔꽃을 심으신 적이 있었지요. 감성이 무딘 남자가 봐도 꽃은 예쁘지 않습니까? 그래서 시키시는 대로 열심히 물도 주고 그랬지요.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께서 이렇게 시키시더군요. 떨어진 꽃이 보기 좋지 않으니,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계속 주우라고 말입니다.”
“아...”
“어떻게 됐을지 아시겠죠? 맨날 어머니한테 혼났어요. 안 주웠다고 말입니다. 짜증도 나고 해서 저딴 꽃 누가 보냐고 다 뽑아버리라고 바락바락 대들었다가 아버지한테까지 혼났죠...”
“푸훗!”
웃긴 얘기가 아닌 것 같은데, 내 표정이 우스워서였을까? 아르논 양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 뒤로 저는 나팔꽃을 참 싫어했어요. 그걸 보면 항상 꽃을 주워야 했던 그 때가 떠올랐거든요. 지금 생각하니 그것도 참 추억인데...”
“아아...”
괜히 얘기했다. 부모님 생각나네. 아르논 양은 내 팔을 꼭 잡아왔다.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 위로, 서서히 지기 시작한 석양의 빛이 덮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은빛 머리가 주황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원래의 나 같으면 여기서 입맞춤을 시도했을텐데, 지금의 나는 이 상황이 위험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여기에서 내가 그렇게 했다가는... 빼도박도 못하고 물려버리는 수가 있다. 상대는 대륙 최고의 위세를 자랑하는 공작가의 레이디이다. 감히 불장난 할 상대가 아니다.
“서서히 해가 지는군요.”
나는 고개를 돌려 석양 쪽을 바라보며 화제도 돌려버렸다. 잠시 그녀의 표정이 실망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가 – 허이구. 위험했네 정말로. - 다시 다정하게 말해왔다.
“저 쪽의 정원을 마저 구경하시고, 안으로 들어가요. 저녁 식사가 준비되어 있을 거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다시 정원의 나머지 부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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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테이블 한가운데에, 공작님과 아르논 양이 나란히 앉고, 내가 건너편에 앉았다. 집사장 에크네익스 씨가 옆에 시립하고 있었다.
“프일, 오늘의 요리는 뭐지?”
에크네익스 씨가 대답하는 걸 보고서야 나는 그게 에크네익스 씨의 이름이라는 걸 깨달았다.
“두 종류의 생선 구이입니다. 한 종류는 강에서 난 농어이고, 다른 한 종류는 저 바다에서 수송해 온 바다생선입니다.”
뭐?! 바다 생선을, 구이로 먹기 위해서, 바닷가에서 수송해 왔다고? 와... 마법사가 동원되었든, 인력이 많이 동원되었든, 미친 짓이구나...
“흐음. 기리인 경, 한 잔 하겠나?”
“네, 주신다면 기꺼이 마시겠습니다.”
“그럼 프일, 맥주를 주게.”
그러더니 공작님은 나를 보며 웃었다.
“이 사람, 귀족들은 전부 와인만 마실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군?”
“아...”
나는 내 실태를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아르논 양은 입을 가리며 푸훗 하고, 실례되지 않는 범위에서 웃었고, 공작님도 껄껄거리며 웃었다.
“흔한 오해 중 하나라네.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은 먹는 것 자체가 다를 거라고 보는 시각 말일세. 우리도 같은 인간인데 그럴 리 있겠는가? 같은 것을 맛있게 느끼고, 같은 것을 즐긴다네. 나도 맥주를 좋아하고 어릴 적에는 길거리에서 흔한 설탕범벅 간식들도 많이 사 먹었지. 제도에서 공부할때는 더더욱 말야.”
“아... 실례했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자주 있는 일이라네. 오히려 자네가 초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하게 되는군. 하하하!”
그때 에크네익스 씨가 카트를 밀고 와서는 우리 세 사람에게 유리잔을 내려놓고, 나무 통을 기울여 맥주를 따라주었다. 음? 별로 시원하지가 않네? 맥주는 시원하게 해서 먹는 게 좋을텐데, 마법사나 마력석이 모자란 집이 아닐텐데...
“그럼 건배할까?”
공작님은 잔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젊은이들의 즐거운 인생을 위해.”
...왠지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건 나 뿐인가?
“공작님과 아르논 양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아르논 양은 별 말 하지 않았고, 우리 셋은 곧 잔을 부딪혔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돌린 후, 잔을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마셨다. 응? 다시 한 모금. 우, 우와!
이게 맥주야? 보통 우리가 마시던 맥주는 탄산이 많이 들어가 따갑고, 차게 마시지 않으면 미적지근한 그냥 물맛이 나는 그런 맥주였는데, 이건... 맥주에서 꽃 향기가 난다. 마치 풍성한 화단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는 느낌.
내 표정을 보고 공작님은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어떤가?”
“아... 지금까지 제가 마셨던 맥주들을 저속한 비유 죄송합니다만 소변 맛으로 만드는군요...”
“하하하! 이 친구 말을 재미있게 하는군. 이건 에일(ale)이라고 부른다네. 기존 자네가 마셨던 맥주와는 다르지? 우리 남부에서 조금씩 유행하고 있는 방식이라네.”
“아... 저는 처음에 잔을 잡았을 때 차갑지가 않기에,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 잘 보았네. 이 맥주는 따뜻해도, 아니 약간 상온에서 더 맛있게 마실 수 있는 맥주야. 향이 풍부하지? 자네가 있는 북부와는 달리 남부에서는 물건을 차게 보관하기가 쉽지 않다네.”
“아... 공작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견문을 넓혔습니다.”
공작님은 흐뭇하게 웃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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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저트로 나온 푸딩까지 다 먹자 더 이상 먹으라고 해도 먹기 힘든 지경까지 왔다. 게다가 맛있어서 홀짝홀짝 한 에일 때문에 약간 취기도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긴장하자, 긴장해. 여기는 나에게 우호적이기만 한 곳이 아니다.
“기리인 경, 맛있게 먹었나?”
공작님도 약간 얼굴이 붉어져서인지 아까보다는 말이 약간 편하게 나오는 것 같았다. 어색하지는 않았다. 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인데 뭐. 내가 여기서 그걸 불편하게 여겨봐야 불편해지는 건 나 뿐이지.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초대 감사합니다.”
“허허, 만족했다니 다행이군그래.”
아닌게 아니라 정말로 맛있었다. 최고의 요리사들이 동원된 최고의 솜씨의 요리는, 심지어 양이 적지도 않았다. 아르논 양은 여러 가지를 생각해서 다 먹지 않았지만, 공작님도, 나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 주로 공작님이 아까 내가 티 타임때 했던 이야기를 보충해서 물어보시거나, 내 어릴 적에 어떻게 살았는지 여쭤보시고, 내가 대답하는 식이었다. - 그 요리를 다 먹어치웠다. 끝까지 맛있는, 정말 호화스럽고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였다.
“걱정입니다. 이제 집에 돌아가면 보통 식사에 적응하기 며칠 걸릴 것 같아서...”
“하하하, 걱정 말게. 종종 와서 함께 식사하면 되지 않겠나?”
으아. 이거 내가 답변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잖아.
“초대해 주신다면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공작님은 벽에 걸린 시계를 잠시 보더니, 아르논 양에게 말했다.
“밤이 늦었구나. 좀 더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고 오너라. 함께 기리인 경을 배웅하도록 하자.”
잠시 할 말이 있으니 비켜달라, 는 말이군. 내가 다시 긴장의 고삐를 확 죄는 사이, 역시 그 말을 알아들은 아르논 양은 두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잠시 실례할게요, 기리인 경.”
그녀가 나간 후, 에크네익스 씨가 따뜻한 차를 한 잔씩 따라주었다. 차를 마시니 약간 알딸딸했던 술기운이 가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실은 아까 멀리서 자네들을 바라보았다네.”
“아... 그러셨군요.”
“이 쑥맥 같은 친구야. 레이디가 입맞춤이라도 해 달라고 기다리고 있는데 그걸 그렇게 지나가나?”
...농담인가? 아냐. 빙글빙글 웃고 있지만, 눈은 완전히 웃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 그랬는지 이유를 궁금해하고 있다. 하아. 공작님의 속내를 모르겠다.
“죄송합니다.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아니지만?”
“아르논 양의 마음을 가지고 장난치는 결과가 될까 두려워서 그랬습니다.”
“정말 장난칠 의도가 있다는 생각은 아니겠지?”
“제가 어찌 감히...”
“그래, 그게 문제야.”
“네?”
놀라 되물은 나에게 공작님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대답했다.
“아르논은 내 막내 딸이라네. 저 아이를 낳고 얼마 안 있어 내 처가 신의 곁으로 돌아갔어. 그러다보니 내가 너무 애지중지 키웠나봐. 자네는 사교계 경험이 많지 않아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레이디들 중에는 의외로 자유연애주의자가 많다네. 나중에 결혼해도 남편도 아내의 과거를 문제시하지 않지. 어차피 가문간의 연대일 뿐만 아니라, 남편도 예전에 그런 경험이 많이 있기 때문일세.”
“아...”
그런 반응밖에 보일 수 없었다. 나스프 공작은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이었다.
“그러다보니 사교계에서 딸이 좀 겉도는 감이 없지 않아. 너무 순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나이기 때문이기도 해. 아까 자네처럼 ‘어찌 제가 감히’ 이렇게 나오기 때문이지.”
이 사람, 지금 나한테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야...
============================ 작품 후기 ============================
*추가 : 4/10 16:21* 글의 제목과 게임적 요소에 관해 설문조사를 하나 등록했습니다. 투표 부탁드려요! 그리고 제목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좋은 제목 추천해 주세요. 다시 투표를 통해 결정되신 분에게는 딱지 선물 드리겠습니다.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몇 번 썼다 고쳤다 하느라 늦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저 지금처럼 열심히 쓰겠습니다라는 약속밖에는 드릴 게 없네요. 감사합니다.
체크필통 님 // 사실 제가 먼저 죽창을 날리고 싶지만... 나중을 기대해주세요 언젠가는 정29현이 되는 날이 있겠죠 ㅎㅎ 감사합니다~
melontea 님 // 어이쿠, 쿠폰 감사합니다. 감기는 좀 괜찮으신가요?
eastarea 님 // 그럼요. 기리인이 사려야죠!
코모에 님 // 아마 정실부인으로는 공작가에서도 생각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해요. 전개를 기대해주세요~
박성빈 님 // 진짜 그 '야메룽다!' 이 짤방은 이제 제대로 된 번역 보면 오히려 이상...
akins 님 //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