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3 6. 나 좀 가만 내버려 둬요 =========================
“공작님, 지금 그 말씀은...”
“음? 아, 오해하지 말게, 자네에게 내 딸을 꼬셔내어 달라거나, 약간 더럽혀 달라거나 하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니까.”
“공작님께서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어떤 의도로...”
공작님은 한 번 헛기침을 한 후 말했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부탁으로 들어주게.”
“부탁...이십니까.”
“그래. 기리인 경, 아까 황태자의 비 추천 이야기 기억하는가?”
“기억합니다. 아마 추천했다가는 추밀원에서 들고 일어날 거라고 하셨지요.”
“그래. 우리 가문이 황후를 배출한 것도 맞고, 지금 위세가 높은 것도 맞지만, 그 때문에 부자유스러운 것도 있다네.”
그렇겠구나... 황제 폐하도 그렇고, 높으신 분들은 자유스러운 게 거의 없구나.
“실은 때가 되면 아르논을 시집보내고, 가문의 일원으로서 임무를 다하게 할 생각이네. 하지만 아버지 입장에서는 막내딸이 좀 더 아비의 곁을 지켰으면 하는 생각도 있지. 그런데... 아르논은 남자 경험이 없어도 너무 없어. 하지만 내 입장에서, 귀족가의 아무 자식이나 사귀게 내버려 둘 수도 없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아까 자네가 ‘제가 어찌 감히’라고 했던 것처럼, 보통 귀족가 남자들은 아르논을 생각하기 전에 나스프 가문을 먼저 생각해 버리지.”
“저라고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오히려 자네라면 괜찮을 듯 하네만? 내 앞에서 그정도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초임 기사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
아, 당신까지 왜 이래요...
“그리고, 기리인 경. 황제 폐하가 자네를 고른 이유 중에 분명, 로그푸스 가를 제외하고는 어느 가문과도 연관이 없는 게 확실한 인물이라는 이유도 있다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공작님.”
“나도 그 점을 높이 사고 싶군. 물론 로그푸스 변경백가와 연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겠지만, 자네가 로그푸스 가의 소속이 아니니 괜찮을 걸세.”
헐... 나는 간만에 너무 당황해버려 더듬거리며 물었다.
“공작님,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만... 저를 어찌 믿으시고... 제가 아르논 양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혹 만에 하나... 속된 표현 죄송합니다만...”
“‘먹고 버리면’ 어쩔 거냐고?”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나를 향해 공작님은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 그럴 건가?”
“절대 그러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럼 된 거 아닌가.”
이 아저씨가... 왜 이러세요... 다행히 그런 말장난으로 설명을 마칠 생각이 아니었는지 공작님은 웃으면서 덧붙였다.
“어제 나와 린베크 경이 이야기 나누는 것을 듣지 않았나? 나는 린베크 변경백이나, 로그푸스 가의 구성원과 다소 친분이 있다네. 당연히 에아임 로그푸스 경과도 안면이 있지. 기리인 경은 알지 못하겠지만, 에아임 경은 ‘사람보는 눈’으로 유명하다네. 물론 자신의 직감만 믿지는 않지만, 이상하게 그의 통찰이 결국은 맞았던 적이 많지. 그가 수사 기사로 승승장구해온 것도 그 안목의 힘이 크다네.”
그랬구나... 형은 도통 자기 얘기는 잘 안 하니까...
“그런 에아임 경이 자네를 보고 ‘의형제’를 맺었으니, 자네의 인품 역시 어느 정도 보장이 된다고 보는 것이 무리만은 아니겠지.”
아. 진퇴양난이구나. 저 말을 긍정하자니 공작님의 ‘부탁’을 덥석 받아들이는 것이 되겠고, 부정하자니 나는 나쁜 놈이고 형은 안목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하는 게 되겠고...
“기리인 경, 걱정 말게. 내가 자네보고 내 딸과 사귀라거나 하는 얘기가 아니야.”
“그럼 제게 하시는 부탁이라는 것이...”
“자네 적어도 제도에 1년은 있을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네, 아까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 1년간만, 아르논의 친구가 되어주지 않겠나?”
‘띠링!’
<서브 퀘스트 – 아르논의 ‘남자’ 친구>
<공작은 아르논 양이 남자를 대한 경험이 너무 적은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대책으로, 공작은 당신이 아르논 양의 친구가 되어 줄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퀘스트 의뢰자가 공작입니다. 의뢰의 성격상 퀘스트 거절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차후 나스프 공작가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추천하지 않습니다.>
<공작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세요.>
“친구...라 하셨습니까?”
“그래, 친구. 애인이 아닌 친구 말일세.”
“그런 거라면 확실히 부담이 적군요. 제가 아르논 양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아도 되고...”
“‘거짓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먼저 말해 주는군? 내 눈도 그렇게 틀리지는 않은 것 같구만.”
“저... 공작님, 부탁하신 일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고, 한 가지만 여쭙고 싶습니다.”
공작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말해보게.”
“공작님께서 저를 너무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르논 양에 대해 공작님이 걱정하시는 것도 이해가고, 아르논 양과 친구가 되는 것에 대해 불만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저, 레이디들 중에는 다양한 경험을 지닌 사람도 있지만, 경험이 없는 레이디들도 분명 있지 않습니까?”
“그래, 그렇네만.”
“그렇다면 꼭 남자 경험이 없다 해서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아는 아버님들은 따님에게 남자가 붙는 것을 오히려 더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았는데...”
“하하하! 그래, 내가 좀 이상한 제안을 했지?”
공작님은 하늘을 보며 크게 웃었다. 잠시 후 웃음이 진정된 공작님은 설명을 시작했다.
“자네 천연두에 대해 알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를 리가 없다. 각 영지의 지배자와 트리클 교단, 마탑이 모두 눈을 번뜩이며 주시하고 있는 전염병 중 하나이니까. 한 번 그게 걸렸다 하면 군대, 교단, 마탑 등 동원할 수 있는 세력들이 총출동하여 치료한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앓아눕는 무서운 질병이다.
“그거 아는가? 남부에서는 ‘소젖짜는 처녀는 역신이 피해간다’는 말이 있다네.”
“무슨 말입니까?”
“목장에서 소를 키우는 사람들은 유독 천연두에 잘 안 걸리네. 내 할아버님께서 왜 그런지 원인을 조사해 봤더니, 소가 앓는 우두에 옮아 며칠 가볍게 앓은 소 젖짜는 처녀들과, 그들에게서 옮아 역시 우두에 걸린 사람들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더군.”
“아...”
“물론, 사제나 마법사를 동원해 치유를 펼치면 되고, 천연두를 예방하자고 소 옆에서 일부러 지내는 것도 우습고, 그래서 이 방법은 널리 퍼지지 못했다네. 하지만, 재미있지 않은가? 일부러 약한 질병을 앓으면, 나중에 강력한 질병에서 몸을 지킬 수 있다는 것 말일세.”
아... 그런 뜻인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공작님은 웃으며 덧붙였다.
“자네를 질병에 비유하는 건 아닐세. 오해 말게.”
“딸 가진 아버님들은 사실 딸의 남자친구를 모두 그렇게 보더군요.”
“하하하! 부정하지는 않겠네만, 자네는 예외로 하겠네.”
역시, 공작위는 카드놀이해서 딸 수 있는 건 아니구나...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매력 84에 언변 86은 역시 그냥 보아넘길 수치가 아니구나.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한 가지 꼭 더 물어봐야겠다 싶어 질문했다.
“저, 공작님.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이니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무슨 심각한 얘기를 하려고 그런 소리를 하는가?”
웃으며 ‘질문해보게’ 하는 식으로 손을 내젓는 공작님. 내 질문에 화내시지는 않겠지?
“저, 만약에 말입니다, 제가 아르논 양과 친구 관계가 되어 지내다가... 갑자기 두 사람이 서로 죽고 못사는 사이가 되어 혼인시켜달라고 요청하면, 남녀 사이라는 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그러면? 혼인 시켜야지.”
“네에?!”
이제야말로 나는 크게 놀라버렸다. 공작님은 나를 보더니 피식 웃어버렸다.
“뭐 그까짓 정치적 이익이나 상속 같은 것, 아르논 분은 포기해도 그만이야. 우리 공작가가 그런 것에 목숨 걸어야 할 정도로 약하지는 않네. 그리고, 기리인 경. 나는 자네가 무슨 일을 하든, 능력을 발휘할 거라고 믿고 있어. 예를 들어 자네가 에아임 경처럼 수사기사에 투신한다 하면 자네는 분명 고위직까지 올라갈 거라고 믿네. 게다가 로그푸스 가의 인물과 의형제를 맺고 있으니 배경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일세.”
아까는, 제가 가문 소속이 아니라 의형제라서 괜찮다면서요... 너무 왔다갔다하시는 거 아닙니까? 저를 좋게 봐 주시는 건 너무 감사한 일이지만...
“그리고 아비로서 딸이 행복해지면 그것도 좋은 일이지.”
모르겠다. 나는 에아임 형처럼 사람보는 눈이 좋지만은 않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공작님의 표정이나 말에서 거짓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말이다.
“알겠습니다. 아르논 양의 친구가 되겠습니다.”
‘띠링!’
<서브 퀘스트 – 아르논의 ‘남자’ 친구>
<공작은 아르논 양이 남자를 대한 경험이 너무 적은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대책으로, 공작은 당신이 아르논 양의 친구가 되어 줄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보상은 공작에게 요청하세요.>
“고맙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겠지? 뭔가 바라는 건 없는가? 직위든, 인맥이든, 보물이든, 원하는 것을 말하게.”
이해타산에 앞서 그건 좀 싫다, 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안 그래도 같은 입장이 아니라 시작부터 쉽지 않은데, 공작님께 보상을 받게 되면 저는 이것을 친분이 아니라 임무로 생각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저 친구 한 명을 사귀는 것으로 족합니다.”
‘띠링!’
<무형의 보상을 선택한 당신, 탁월한 판단이었습니다. 공작의 호감도가 크게 증가합니다.>
“역시, 내 눈도 아직 죽지는 않았군. 믿어도 되겠어.”
...이게 정답이겠지? 이해타산에서 나온 말은 결코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호감도를 쌓아 놓아야 나중에 아르논 양과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번은 보아넘겨 주겠지? 그때 문이 열리며 약간은 풍성한 나이트드레스로 갈아입고 땋아올렸던 머리를 풀어 핀으로 뒤를 고정한 아르논 양이 들어왔다.
“아버님, 마차가 준비되었어요.”
“오, 그래. 기리인 경, 가지.”
우리는 2층의 식당에서 나와 중앙 홀의 원형 계단으로 1층으로 내려왔다. 공작님과 아르논 양은 조각상 앞에서 멈춰서서 나를 향해 인사했다.
“기리인 경,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네. 자네를 알게 되어 참 좋군.”
“오늘 저녁 감사합니다. 저 역시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공작님.”
그리고 나는 아르논 양이 수줍게 내민 손등에 다시 입을 맞추고 인사했다.
“기리인 경,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또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네, 아르논 양. 저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저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
웃으며 아르논 양을 바라보자, 그녀는 어제 내가 헤어지며 말했던 ‘편지를 어디로 보내라’는 말을 기억하고 탄성을 냈다가, 곧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숙였다.
“공작님, 아르논 양. 그럼 가보겠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살펴가게. 멀리 안 나가네.”
“좋은 밤 되세요, 기리인 경.”
나는 그대로 저택을 나와 앞에 주차되어 있던 예의 그 호화스러운 마차에 올라탔다. 하아... 신경쓸 일이 또 하나 늘어버렸다. 대체, 나라는 놈을 왜 이리들 가만 두지를 않는 거냐... 아침에는 황태자, 점심에는 신전, 저녁에는 공작님... 그러다가 나는 밤에 일이 한 건 더 있다는 걸 깨닫고 머리를 싸쥐었다. 있다가는 이브 씨를 상대해야 하는구나...
============================ 작품 후기 ============================
템포를 회복하기 위해 애쓰는 중입니다.
다행히 연참을 준비할 때도 하루 2~3편은 썼으니 어렵지는 않군요.
대신 그 때보다 분량을 조금 늘리려고 노력중입니다.
제목이 안티라는 의견이 정말 많군요. 사실 저도 절감하고 있습니다.
제목과, 그리고 게임 시스템에 대한 내용을 설문란에 올렸습니다.
설문조사에 많이 참여해 주시고, 좋은 제목 의견이 있으면 추천도 부탁드립니다.
제목으로 선정되신 분께 제가 딱지 50장 선물해 드리겠습니다. 부탁드려요!
mightnmagic 님 // 지금 정도의 전개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셨어요?
eastarea 님 // 공작 정도 되면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겠죠? 안에 구렁이가 몇십마리...
도마뱀DX 님 // 데스노트!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아으동동다리 님 // 팩트라서 더 아프네요 ㅠㅠ 좋은 제목 있으시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니코틴 님 // 팩트 이연타 ㅠㅠ 좋은 제목 있으시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oa77 님 // 팩트 추가타까지 ㅠㅠ 좋은 제목 있으시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DJ스누피 님 // 칭찬 감사합니다. 힘내서 열심히 쓸게요!
화이트프레페 님 (152, 153. 154, 155) //
152 / 반갑습니다! ;)
153 / 가만히 있어도 사건이 쏟아지는... 사건 자석...
154 / 사실 그런 축복이 있으면 좀 치트같긴 해요 ㅋ
155 / 그럼요. 당연히 댓가를 받아내야!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