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164화 (164/309)

00164 6. 나 좀 가만 내버려 둬요 =========================

마차가 형의 집 앞에 도착하고, 마부가 문을 열어주었다.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 마부는 “좋은 밤 되십시오.” 라고 모자를 들어 인사하고는, 마차를 돌려 공작가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형의 집 담장에 기대어 서 있는, 이브 씨를 발견했다.

“이브 씨.”

“기리인 경!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거에요!”

“죄송합니다. 공작가에서 불러서 저녁식사를 하고 오느라...”

“대체, 밤에 온다고 했으면 몇 시에 오라고 확실히 말했어야죠!”

이 여자 보게. 처음부터 몰아붙이는 걸 보니, 밀어붙여서 주도권을 잡고 갈 심산이군? 안 그래도 짜증나 죽겠는데, 한 번 당해볼래? 어?

“죄송합니다. 저는 이브 씨가 저에게 시간을 묻는 서신이라도 보내실 줄 알았죠.”

“아니...! 오라고 한 쪽에서 보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이브 씨가 어디 있는 줄 알고 보냅니까?”

“대도서관으로 보내면 될 것 아니에요.”

“그럼 그렇게 말씀을 하셨어야죠. 제도에 처음 온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어떻게 압니까. 그리고, 오늘 하루만 해도 예상하지 못한 일정이 세 개나 생겼는데, 제가 잘도 일정을 확정해서 이브 씨에게 얘기해 줬겠습니다? 네?”

“...!”

자신도 화가 나 있지만, 내가 도리어 짜증을 부리니까 오히려 말을 잃어버리는 이브 씨. 안다. 내가 진짜 못되게 굴고 있다는 걸. 하지만 안 그랬다가는 이 여자한테 오히려 돌돌돌 말려서 끌려가게 될 거다. 그렇게 둘까보냐.

“너무하시네요...”

두 손을 얼굴에 대고 고개를 숙이는 이브 씨. 안 속는다. 어디서 눈물 연기야.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레이디를 늦은 시간까지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고, 늦은 시간밖에 시간이 되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제가 마차를 잡아드릴 테니 오늘은 돌아가시고, 다음에 제가 좋은 시간에 다시 모시겠습니다.”

“하...”

역시나, 손을 뗀 이브 씨의 눈은 말라 있었다.

“정말 이러기에요?”

“뭘 말입니까?”

“선수끼리 어설픈 수작은 치우죠.”

“누가 어설픈 수작을 먼저 했는데 그러십니까. 눈에 뻔히 보이는 거에 당해주라고요?”

이브 씨는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참 나... 내가 항복 선언을 몇 년만에 하는 지 모르겠는데, 그게 이제 갓 성년식 한 사람이라니... 아무튼, 졌어요. 미안해요.”

빠른 항복 선언을 보고, 나는 다시 한 번 이 여자에 대해 경계심을 가졌다. 쉽게 말해 우리가 지금 뭘 한 거냐 하면,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라는 여자한테, ‘미안, 나 원래 그래’ 라고 뻔뻔하게 남자가 대답한 거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자신의 전략이 안 통하면 당황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남자가 뻔뻔하게 저렇게 나오면, ‘그래서, 나랑 헤어질거야?’라고 묻는 거나 다름없고, 여자는 그렇게 하든지 자신이 굽히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내가 많이 써먹어 본 방법이고, 물론 그 후에 저렇게 나쁜 남자였다는 걸 잊게 해 줘야 하는 단점은 있다.

그런데 저 여자는 ‘미안, 내가 지나쳤던 거 같네, 우리 이제 사소한 사항은 치우고 본격적으로 얘기해보자’고 나온 거다. 물론 연인 관계에서는 할 수 없는 이야기긴 하고 협상이니까 고를 수 있는 자세지만, 초반 약간의 불리함을 감수하더라도 저렇게 나온다는 건... 분명,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은 협상에 있어 가장 덜 중요한 것이다’라는, 협상의 대원칙을 잘 알고 있는 거겠지.

나는 이브 씨의 정보를 다시 떠올렸다.

<이름          : 이브 오르테

나이          : 27

HP           : 1395/1395

힘            : 66

민첩          : 72

지력          : 96

마나친화력    : 80

매력          : 91

지구력        : 73

특수          : 언변 90

스킬          : 매혹 Lv. 2, 정통마법 B0(4서클)>

<젊은 제국 대학의 교수입니다.>

다시금 나는 경각심을 더 높였다. 요안나 선생님보다 지력이 높은 여자다. 매력도 91이나 되고 언변도 90이나 된다. 정말 전력을 다해 상대해야 한다. 다행히 아까 공작님이랑 차를 마셔서 술도 깼고, 정신 차리자.

“그럼, 잠시 여기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집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바로 돌아오겠습니다.”

“네. 오래 기다렸으니 얼마 더 기다리는 건 문제되지 않을 거에요.”

하. 이 여자 보소.

나는 본채로 걸어가 문을 두들겼다. 문을 열어준 것은 오레즈 할아버지였다.

“아, 기리인 도련님. 오셨군요. 주인님, 마님. 도련님이 돌아오셨습니다.”

“기리인, 잘 갔다 왔냐? 별일 없었어?”

소파에서 뢰다가 종이에 뭔가를 막 그리고 있는 것을 보아주던 형이 큰 소리로 물었다.

“네, 별 일 없었어요! 저, 지금 손님이 와서...”

“어, 그래, 알았다. 손님 보내고 바로 자. 내일 아침에 얘기하자. 뢰다야, 삼촌한테 잘 자라고 인사해야지.”

“응. 삼촌! 안녕히 주무데여~”

쪼르르 달려온 뢰다가 혀짧은 소리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유, 귀여워라. 나는 뢰다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다음, “형도 잘 주무세요! 형수님도요!” 하고 외쳤다. 두 부부가 “그래! 너도!” 하고 쌍으로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피식 웃었다.

“차 같은 건 필요없겠습니까?”

“어... 있으면 좋긴 하겠네요. 별채에는 다기고 뭐고 없어서...”

“당연히 저희가 갖다드려야죠. 들어가서 기다리고 계세요.”

오레즈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식탁에 앉아 뭔가를 하고 있던 에노 할머니가 나를 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나는 웃으며,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별채로 걸어갔다.

“생각해보니 손님을 맞는데 아무 것도 없어서 차를 좀 달라고 했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려요.”

일부러 과장되게 인사하는 이브 씨. 하. 재미있네, 재미있어.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 등에 불을 켰다. 방 안은 내가 급하게 나갔음에도 상당히 정리되어 있었다. 의자와 테이블은 모두 제 자리로 돌아가 있었고, 필기도구도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까 내가 황태자 저하와 이야기할 때 끄적거렸던 종이들도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고, 내가 받은 편지들은 편지꽂이에 차례대로 놓여 있었다. 오레즈 할아버지가 내가 나간 이후 방을 정리해 준 모양이다.

“좋네요. 아담하고. 아늑하네요. 본채도 비슷한 양식이겠어요?”

“아쉽게도 건물의 양식에 대해서까지 지식은 없습니다만, 그런 것 같더군요. 이 쪽으로 앉으시죠.”

나는 테이블의 의자를 빼 주었다. 이브 씨는 테이블의 의자에 앉으며 피식 웃었다.

“아까까지는 잡아먹을 것처럼 굴더니, 그런데도 의자는 빼주네요?”

“적이 아니잖아요? 상대가 누구건 예의는 지켜야 하는 법이죠.”

그 때,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내가 가서 문을 열자 두 손으로 쟁반을 받쳐든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나는 얼른 쟁반을 받아들었다.

“아이구, 도련님, 안 그러셔도 되는데...”

“늦은 밤에 차 타달라고 한 것도 미안한데 이건 아무것도 아니죠. 손님 보내드리고 제가 문 잠그고 잘테니까 할아버지도 얼른 쉬세요.”

“네, 도련님. 좋은 밤 되세요.”

“할아버지도 좋은 밤 되세요.”

쟁반을 들고 테이블로 돌아와, 찻잔을 오르테 씨의 앞과 건너편의 내 앞에 내려놓고 찻주전자에서 차를 따랐다. 아까 공작가에서 마셨던 최고급 차 만큼 좋은 향이 나는 건 아니지만, 마음은 훨씬 더 편안했다. 편안한 향이었다. 오르테 씨는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 향을 맡더니, 한 모금 마셨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향이군요. 국화차네요.”

“그렇군요. 저는 차에 대해서 잘 몰라서.”

“긴장을 풀어주고 뭄과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효과가 있다고 하죠. 유달리 좋은 향이네요.”

별달리 대답할 필요가 없는 말 같아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 좋다.

“기리인 경, 저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으신다 하셨죠?”

“저를 적대하신 적이 없으니 제가 적대할 이유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저는 적대당하는 느낌이 들까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자는 건가?

“이브 씨가 맨 처음에 저를 보셨을 때 어떻게 했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제가 어떻게 했는데요?”

“이브 씨는 저를 아무 것도 모르는 청년으로 보시고, 저를 유혹하려고 드셨지요. 쉽게 넘어가면 그 다음부터는 자기 입맛대로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 뒤로도 이브 씨는 나를 동등한 협상의 상대로 대한 적이 없어요. 어떻게든 남녀 관계의 틀에 묶어놓고 대하려고 했지요.”

“...부정하지는 않겠어요. 그리고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그게 효과적인 전략이 된다는 점도 알아주셨으면 해요.”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통하지 않는 전략을 계속 쓰시려고 하니 좀 답답하군요. 좀 더 진전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좋아요. 그 전에 한 가지만 물어보지요. 이건 다른 의미 없이 순수하게 물어보는 거에요. 기리인 경은 제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질문에는 답변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빈말이 아니라 손꼽힐 정도로 매력적인 여성입니다, 이브 씨는.”

“그런데 왜 그리 나를 경계했었나요?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면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 좋지 않아요? 당신의 발치에 엎드려 몸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여자였는데.”

“그리고 저는 그 이후에 당신에게 휘말려 당신의 말을 듣게 되겠죠? 한 번의 욕정을 위해 앞으로의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열 아홉 살 맞아요? 세상에. 열아홉 청년이 저런 이야기를 한다는 걸 나보고 믿으라고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안 믿으면 어쩔 건데. 뭐... 내 나이의 젊은 청년이 이런 얘기를 할 수는 없었을 거다. 그간 여자, 그리고 섹스 문제와 관련해 여러 번의 트러블을 겪은 나였기 때문에, 그래서 뒤탈이 있을 법한 섹스는 나중에 반드시 후회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저런 대응을 할 수 있는 거지.

“하아... 정말이지, 쉽지 않네요. 이런 상대인 줄 알았으면 오히려 처음부터 정중하게 나갈 걸 그랬어요.”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편견 없이 대하기로 약속할 테니까, 정중하게 협상을 제의해 주세요. 그러면 저도 제가 드릴 수 있는 답변을 드리지요.”

“네. 그간의 무례를 사과드려요, 기리인 경.”

이제 이브 씨는 다시, 이지적인 학자의 이미지로 돌아왔다.

============================ 작품 후기 ============================

설문이 진행중입니다. 설문에 대답 부탁드려요!

그와는 별개로 여러분의 의견은 모두 소중하게 읽어보고 있습니다.

축구게임광 님 // 사실 저도 그 외전 쓰는 것도 꽤 재미있어해서 ㅎㅎ; 의견 감사합니다~

melontea 님 // 감사합니다. melontea님 같은 분들이 꾸준히 응원해 주셔서 계속 힘 잃지 않고 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감기 다 나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아으동동다리 님 // 사실 맨 처음 제목이 DEPTH였다는 반전이...ㅎㅎ;; 끈 없는 꼭두각시 괜찮아보이는 것도 같네요.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akins 님 // 언제나 감사합니다!

DJ스누피 님 // ㅎㅎ 그것도 방법이겠네요. 감사합니다!

화이트프레페 님(156~163편) //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156 / 파 명 짓기가 귀찮았... 나중에 손보든가 하겠습니다 ㅎㅎ;;

157 / 네 이미 무리죠.

158 / 많은 경험에서 나오는...

159 / 전에도 한 번 적었지만,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고, 적도 다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이러다가 입장이 안 맞으면 적이 되기도 하고... 그런 거겠죠.

160 / 만약 그렇다면 공작은 설계왕!

161 / 그러게요 매력에 언변까지 몰아줬더니...

162 / 넌 이미 넘어가 있다 뭐 이런...?

163 / '남자' 친구라는게 중요하죠. 일단은 어디까지나 남자사람 친구.

oa77 님(1편) // 베스트10이라니 아직 머나먼 꿈같은 이야기를... 과분한 칭찬에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멈추지 않고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셀라임 님(1편) // 추천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은빛의강 님(1편) // 칭찬과 추천 감사합니다!!

얼룩야옹이 님(162편) // 사실 저도 그게 고민이긴 해요. 애초에 겜판 형식만 빌려온 게 내용 전개를 조금 편하게 하자는 측면도 있는 거거든요. 그걸 다시 정석대로 고쳐써야 하겠죠? 든든한 말씀 감사합니다!

Beastic 님(25편, 62편) // 씬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네요. 어... 꼭 씬을 넣어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주인공이 여캐와 깊은 감정적 교류를 나누는 게 씬이 있고 없고가 차이가 많이 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자기합리화는 남자든 여자든 인간의 기본 패시브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요. 씬을 빼면 안 그래도 말싸움이 많은 이 소설이 너무 말만 서로 하게 될 것 같기도 하고... 외모에 언변에 착한 성격까지 쥐어줬는데 여자가 안 얽히면 이상하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씬을 꾸역꾸역 넣는 것 아니냐 하는 말씀에 대해서는 제가 전개를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소중한 의견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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