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6 6. 나 좀 가만 내버려 둬요 =========================
“기리인 경...”
참, 쉬운 사람이다. 금세 울상이 된 이브 씨를 보며 나는 약간은 짓궂고 약간은 어두운 상상을 떠올렸다가, 금세 털어버렸다. 악행은 신의 천칭에 올라간다. 언젠가는 돌아오는 법이다. 그러지 말자. 안 그래도 나는 지금 위험한 시점이니까.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대신전도 그렇고, 대도서관도 그렇고, 제가 협력해야 할 당위에 대해서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하지만, 리에나 왕비께서도 말씀하셨잖습니까.”
“이익과 명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그 제안을 따르면 명예를 얻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제가 아카데미의 제안을 따르면 저는 명예도 잃지 않으면서 이익을 가져갈 가능성이 더 커집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마법 자체의 연구는 아직 대도서관 쪽이 아카데미를 따라가지 못했을 겁니다.”
“하, 하지만, 대도서관이 당신을 돕지 않으면, 당신은 고대 문헌을...”
나는 약간은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제 선생님이 그 도서관에 가서 선다면, 어떻게 될까요?”
“!”
그건 생각하지 못했는지 이브 씨는 그 자리에서 턱 하고 굳어버렸다. 도서관은, 그때 그 사람이 가장 찾고자 하는, 혹은 도서관 마법진이 판단하기에 가장 필요로 하는 자료를 찾아준다고 했지. 그렇다면?
“선생님이 가서 그 마법진 위에 서신다면, 그리고 선생님의 안식년 연구 주제가 저의 상태에 대한 원인 파악과 해결책이라면, 도서관은 열심히 자료를 찾아다 줄 것 같은데요?”
“아아...”
새하얗게 질려버린 이브 씨. 하아... 이 여자 멘탈이 왜 이렇게 약해. 나는 가볍게 손뼉을 짝! 하고 쳤고, 그러자 이브 씨는 가볍게 “꺅!” 소리를 내며 펄쩍 뛰었다.
“기, 기리인 경! 장난이 심하세요!”
“실례했습니다만, 정신을 조금 차리시는 게 어떨까요? 늦은 밤에 협상하자고 이렇게 오셔서 그렇게 당황해 버리면 될 일도 안 되지 않겠습니까?”
이브 씨는 내가 그녀를 만난 이래 처음으로 얼굴을 붉혔다. 까마득히 어린 애한테 지적받으니 좀 부끄러운 모양이지? 어쨌든, 나는 이쯤에서 이브 씨를 몰아붙이는 걸 멈춰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밀어붙였다가는 울어버리거나 반발할 테니까... 아무리 나라도 여자가 우는 건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
“이브 씨.”
“네, 기리인 경...”
“이브 씨를 보낸 사람들이 있을 거 아닙니까? 도서관의 높은 분이라거나, 학계의 높은 분이라거나... 그 분들이 이브 씨에게 목표를 정해주지 않았습니까?”
“목표요?”
아 나 진짜.
“협상하러 보내면서 목표도 정해주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그만큼 저희 쪽이 절박하다고 이해해 주세요. 늘 황실이 주는 지원금을 마탑에 뺏기고 자금이 별로 없는지라... 이번 일을 무조건 성공시켜야 해요.”
“그건 절박한 게 아니고... 하아.”
멍청한 거죠, 라고 덧붙이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대놓고 비난해봐야 좋을 것 없다. 협상하러 전권대리인을 보내면서 1차 목표 2차 목표 이런 거 얘기 안 해줘? 상대가 무조건 내 요구를 다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는거야? 미친 거 아냐? 어쨌든, 이야기를 마무리짓자. 이 길고 긴 하루를 얼른 마무리하자.
“아직 제가 아카데미의 입장을 들어보기 전입니다만, 지금 이렇게 나오는 걸 보니 아카데미라고 해서 다를 바는 없을 것 같네요. 당연히 자신들에게 전적으로 협력하라고 나오겠죠.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네?”
“어차피 한 곳에서 독점할 수는 없을 것 아닙니까. 아카데미가 주가 되지만, 학계에서도, 교계에서도 참여하는 여남은 명의 그룹을 만들면 괜찮지 않을까요?”
번쩍. 이브 씨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그룹이라고 하셨어요?”
“네. 모두가 연구에 참여하면, 제 선생님은 안식년 연구주제를 조금 더 편하게 쓰실 수 있을 거고, 아카데미에서는 독점하지 못해 좀 아쉽겠지만 어쨌든 연구의 주를 맡았으니 체면은 선 거고, 신전에서는 형식상 아카데미와 대도서관을 중재한 셈이 되니 어쨌든 체면이 서죠. 그리고 이브 씨 쪽은... 당장 목적했던 것, 즉 저를 독점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음, 그렇죠, 어쨌든 우리도 공동 연구로 참여하는 것이니, 부족하지만 우리도 연구 성과를 얻을 수 있고, 그걸로 연구 자금을 청구할 수 있겠지요. 게다가 아카데미나 대신전과 같은 반열에 섰다는 명예도 얻을 수 있고요.”
‘모두가 약간씩 손해보는’ 해결책이지, 이게. 어차피 대도서관, 아카데미, 대신전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다들 약간씩 손해보면서 모두의 명예와 이익을 약간이라도 충족시킬 수 있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한 쪽을 죽이면, 그 쪽에서 분명 반기를 들고 나올 테니까... 예를 들어 대신전을 배제하면 ‘이단의 위험이 있어 조사가 필요하다’ 하면서 붙들고 늘어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이 방법의 단점은 모아놓으니 서로 싸우다가 죽도밥도 안 될 수도 있다는 점인데... 뭐, 선생님을 믿는 수밖에. 그리고 안 되면 내가 ‘싸우면 안 할거야!’라고 하면서 통제를 노려볼 수도 있겠지. 뭐... 안 되면, 다 때려쳐! 선생님이랑 나랑만 할 거야! 그래도 될 거고.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이브 씨가 뭔가 성과로 가져갈 만한 것이 될까요?”
“그럼요.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다는 백 배 낫지요. 완고한 돌대가리 교수들도 어느 정도 납득할 테고요. 감사해요, 기리인 경.”
“뭘요.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이브 씨는 한숨을 쉬고, 남은 차를 들이킨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무 늦기 전에 돌아가야겠군요.”
“저 앞까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기리인 경은 신사시네요. 감사해요.”
문을 향해 돌아서려던 이브 씨는, 아, 하고 나를 향해 섰다.
“기리인 경, 한 가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말씀해 보세요.”
“기리인 경은 지금 마법이 먹히질 않죠?”
“네.”
“경도 마법사 교육을 받으셨으니, 모든 생명체의 내부의 움직임에 마나가 함께 한다는 건 알고 계시죠?”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럼, 경의 겉이 아니라, 몸 안... 예를 들면 입 안에서 마법을 시전하면 어떻게 될까요? 경이 살아 있으니, 경의 몸 안에는 마나가 있는 거잖아요. 그러면 그 안에서는 마법이 걸릴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흐음... 흥미롭네요. 그렇게는 실험 안 해 본 걸로 아는데.”
“기리인 경, 괜찮다면 지금 한 번 시험해보시지 않으시겠어요?”
나도 마법사 지망생이었고, 마법사들은 호기심이 생기면 함정일 가능성이 있어도 머리를 일단 디밀고 보는 족속들인지라... 그리고, 설마 살상 마법을 쓰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기리인 경, 입을 벌려 주세요.”
내가 입을 벌리자. 그녀는 “실례할게요.” 하면서 내 혀의 안쪽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으으. 나는 혹시라도 혀를 움직여 그녀의 손을 핥는 결과를 낳을까봐, 혀를 움직이지 않게 조심했다.
“할게요.”
그녀는 눈을 감고 마법 회로를 돌리는 것 같더니, 주문을 읊었다.
“매혹(charm).”
뭐라고? 이 여자가 진짜! 가만 뒀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쳐? 와, 진짜 화난다. 감히 매혹 마법을 걸어? 매혹은 의지가 있으면 이겨낼 수 있는 거 모르지? 와...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거칠게 잡아 뺐다.
“하아...”
그녀는 내 손에 손목을 붙잡힌 채, 나를 풀린 눈으로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그녀의 흐릿한 눈에 공포가 떠올랐다.
“신뢰를 이런 식으로 되갚아요? 정말 적이 되려고 하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면 다에요?”
“죄송합니다...”
그녀의 몸이 힘없이 허물어지듯 아래로 내려가 무릎을 꿇었다. 내 손에 여전히 손목을 잡힌 채, 그녀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뭐라고?!
나는 황급히 손목을 놓고, 뭔가 더러운 것이나 위험한 것을 피하듯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그녀는 숫제 신전에서 엎드려 경배하듯 무릎꿇은 채 엎드렸다.
“주인님, 죄송합니다... 감히 제가... 죽을 죄를... 용서를...”
그녀의 띄엄띄엄 나오는 말은 이게 무슨 미친 말인가 싶은 그런 말이었다. 고위 마법사가 다 미친다고 그러더니 이 여자가 진짜로 미쳤나.
“아, 닥쳐요 좀.”
그러자 그녀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뭐야... 이거. 이봐, ‘시스템’. 혹시 너는 이 현상의 원인을 알겠어?
‘띠링!’
<당신 같은 현상에 유래가 없다 보니 본 시스템으로서도 그에 관한 지식은 없습니다.>
그냥 모른다고 한 마디만 할 것이지... 나는 의자를 끌고 와서 그녀의 앞에 앉았다. 그동안 그녀는 그대로, 무릎꿇은 채 납죽 엎드려 있었다.
“일어나세요.”
그러자 그녀는 몸을 일으켰지만, 여전히 무릎은 꿇은 채였다.
“주인님...”
“아, 진짜! 왜 그래요! 그만 해요!”
“하지만, 주인님이시니까...”
하아... 미치겠다. 이 말도 안 되는 하루를 마무리하기에 결정적인 엿이구만.
“일단 좀 닥치고 있어봐요.”
그녀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얼굴이 약간 빨갛고, 숨은 아까보다 약간 가쁜 것 같았다. 가만히 있으려고 애쓰고 있지만, 몸을 약간씩 배배꼬고 있었다.
차분하게, 상황을 생각해보자. 어떤 상황에서도 생각은 할 수 있으니까. 자... 순서대로, 이브 씨가 내 입 안에 손가락을 넣고 매혹 마법을 썼고, 나는 그걸 알고 불같이 화를 냈고, 그러자 갑자기 그녀가 나를 ‘주인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지... 에? 잠깐. 일단 나한테 매혹 마법이 안 걸린 건 확실하다. 내가 ‘화를 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만약 매혹 마법이 걸렸으면 그렇게는 안 됐겠지. 나는 스스로 나 자신을 납득시켰을 거다. 어쩔 수 없었을 거다, 이브 씨는 좋은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왜 갑자기 저렇게 나오는 것일까? 뭐 하자는 거지? 당장 내 화를 피해보자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를 보니, 이제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온 몸을 꼬아대고 있었다.
“주인님...”
“그 주인님 소리 집어치우고, 그렇게 참기 힘들면 일어나요.”
그녀가 비틀거리며 간신히 일어나서 섰다.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짧은 시간동안 그녀의 로브의 아랫도리 부분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던 것이다. 촉촉한 정도가 아니다. 축축하게, 천박하지만 손으로 짜면 물이 나올 정도로 젖어 있었다. 너무나 황당한 사실들의 연속 앞에, 언제나 냉철을 유지할 수 있다고 자부했던 내 머리마저 멍해졌다. 단 하나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아. 이래서 가만히 못 있고 몸을 배배꼬고 있었구나.
“주인님... 여기가 뜨거워요...”
그녀는 자신의 아랫도리쪽을 가리키며, 나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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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연구하다가 알 수 있었다. 가끔씩, 나를 향한 마법이 되쏘아지는 경우가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사용했을 때, 그리고 정신 계열의 마법을 사용했을 때 그런 일이 많았다. 아무에게도 말은 안했지만 아마 내 의지력 때문에 그랬을 것 같기도 하다. 어지간한 현혹 마법에는 걸리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되쏘아지는 마법은 몇 배의 강도로 시전자에게 덮쳐진다. 에빌로 누나가 원래 잠순이였기는 하지만, 나를 만난 이후 한동안은 시간만 나면 잠들었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나에게 첫 날 걸었던 슬립(sleep) 마법이 되쏘아졌기 때문에. 그걸 아무도 몰랐다는 점에서 원래 누나가 잠순이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그리고 이브 씨도 마찬가지였다. 현혹 마법으로 나를 자신에게 홀려서 좀 더 어떻게 해보려고 했다가, 오히려 몇 배 큰 현혹 마법을 맞아버리는 바람에 가벼운 정신 지배(mind control) 마법이 걸린 거나 다름없게 되어버린 거다. 그리고 현혹 마법이 사람의 성(性)적인 부분을 건드려서 자극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엄청나게 강한 자극을 받아 순식간에 줄줄 흐를 정도로 흥분해 버린 거다. 춘약을 먹은 거나 마찬가지다.
물론, 그 때는 그 사실을 몰랐다.
============================ 작품 후기 ============================
이번 챕터를 마무리하는 씬입니다.
참고로 저는 SM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해봐야 볼기 정도 때리겠죠 뭐...
약간 억지스럽다고 느끼실 수도 있겠지만, 뭐랄까... 이번 챕터 제목이 '나 좀 내버려둬' 잖아요? 그에 가장 걸맞는 마무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씬이니까, 오후에 써지는 대로 올리고... 밤에는 오마케를 연재하겠습니다.
제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말없이 추천과 원고료쿠폰 주시는 분들께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설문조사에 참여해 주세요!
제목 추천해주셔서 채택되신 분께는 제가 딱지 50장 선물로 드립니다!
eastarea 님 // 그래서 좀 더 험하게 굴려봤습니다 ㅋㅋ;;; 감사합니다~
아인현석 님 // 정주행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카드보험 님 // 그 제목도 괜찮아보이네요. 고려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melontea 님 // 아... 네. 말씀하신 대로 제가 초심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소 다듬는 정도에서 그칠 생각이고 근본적인 변화는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힘내겠습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따지고 보면 얘 제도에 온지 며칠도 안됐는데 어느새 권력의 중심에 쑥 들어가 버렸네요. 저는 하도 답답해서 모바일에서도 그냥 모바일웹으로 접속합니다. 어플은 여엉...
|라랄라랄라| 님 // 감사합니다. 그때 연참해보라고 알려주신 덕을 본 것 같습니다.
|라랄라랄라| 님(160) // 으음... 나이스 보트 같은 외전도 한 번 써볼까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