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2 7. 황태자의 암살을 막아라...?! =========================
곧 그 빨간머리 주근깨 여자와, 문 뒤에서 우르르 뛰쳐나온 웃통을 벗은 여러 건장한 대장장이들이 뛰쳐나와 간신히 나를 질식사, 아니 교사(絞死)의 위기에서 건져주었다. 콜록콜록대며 내가 그 디오틀라라는 대장 – 나중에 들으니 ‘대표 장인’의 줄인말이란다. 참나. -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디오틀라 씨는 케이스를 열어 활을 쓰다듬고 있었다. 내가 어제 선생님을 사랑스럽게 쓰다듬던 손길과, 아침에 형이 뢰다를 쓰다듬던 손길을 섞어놓으면 저런 손길이 될까.
“저, 죄송합니다. 저희 대장님이 원래 이런 분이 아닌데, 몇 가지 일에는 이성을 잃으셔서...”
“말씀 안 하셔도 잘 알 것 같네요.”
내가 한 마디 받아치자 그 주근깨녀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뭐... 당신이 무슨 죄겠어. 갑자기 달려들어 내 멱살을 잡은 저 사람이 잘못이지. 쪼그리고 앉아서 활을 쓰다듬고 시위를 퉁겨보던 디오틀라 씨는 일어나서 말했다.
“저 활이 어떤 활인지 아나?”
“안다 한들, 내가 왜 당신에게 말해야 합니까.”
멱살을 잡았으면 사과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마음에 내 대꾸는 약간 불퉁하게 나갔다. 디오틀라 씨는 자신도 면목이 없는 건 알고 있는 듯 약간은 멋쩍게 대답했다.
“딸이 어느 남자와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다른 남자의 손에 이끌려 아비를 찾았으면, 그 아비가 그 남자에게 물어보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나.”
나는 약간 화가 풀리는 걸 느꼈다. 아직 잡힌 목은 아프지만, 뭐랄까... 그래, 뢰다랑 놀다가 뢰다가 나를 때렸다고 해서 내가 진심으로 화를 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하얀 머리 할아버지를 뢰다랑 비교해서 좀 웃기지만, 디오틀라 씨는 그만큼, 오로지 장인의 길 외길을 판 사람만큼 순진해 보였다. 그래서일까, 내 화가 좀 풀린 건.
“제 목숨을 여러 번 구해 준 멋진 활입니다.”
나는 그 말로, 내가 이 활을 여러 번 썼고, 그래서 이 활을 잘 알고 이 활에 익숙하며, 내 목숨을 구해 준 좋은 활이라는 걸 다 담아 말했다. 디오틀라 씨의 얼굴이 환해졌다.
“활 들고, 이리 오게. 네라야, 차를 준비해다오.”
빨간머리 여자가 그 말에 고개를 숙이고는 한 쪽으로 달려갔다. 내가 활을 챙기고 있자니, 나와 디오틀라 씨를 말리기 위해 달려온 사람들이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며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하이고... 고생들 많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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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공방의 분위기인 바깥과는 달리, 디오틀라 씨가 사무실로 쓰는 방 안은 완전히 학자의 방 같았다. 저건 도면인가. 도면들이 온통 방을 점령하고 있었다. 돌돌 말린 두루마리들이 책장과 항아리들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그도 모자라 디오틀라 씨의 책상과 탁자에도 도면과 스케치들, 그리고 그 도구들이 널려 있었다. 디오틀라 씨는 개의치 않고 대충 도면들을 슥슥 치운 다음 나에게 자리를 권했다.
“활을 보여주게.”
나는 군말없이 케이스를 넓은 탁자 위에 올려놓고, 활이 디오틀라 씨 쪽으로 가게끔 해서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화살통을 끌러 그 옆에 내려놓았다. 디오틀라 씨는 다시 활을 쓰다듬었다.
“디혼이 자네에게 이 활을 줬다고...?”
“네.”
“미안하네만, 디혼과 어떤 관계였는지 알려줄 수 있겠나?”
아까보다 진정한 디오틀라 씨는, 이 방의 인상처럼,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보다는 새로운 물건을 그려내는 학자 겸 예술가에 가까워 보였다. 아까 내 멱살을 잡던 기세는 어디로 가고,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지만 억세지 않고 오히려 섬세한 성격의 사람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이라서 이런 파격적인 활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건가.
“그 전에 제가 먼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뭘 말인가?”
“디혼 님과 디오틀라 님의 관계 말입니다.”
“그 놈은 내 아들이다.”
역시...
“그 놈, 성을 뭘 쓰고 있던가? 혹시 바크라고 하진 않던가?”
“네, 맞습니다.”
“그래... 그랬군.”
그 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네라라는 아까의 빨간머리 여자가 들어와, 말없이 차를 내려놓고는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나는 찻잔을 집어들어 한 모금 마셨다. 요즘 황궁이며 공작가에서 내놓는 차들에 길들여져 있었는지, 보통의 차가 오히려 반갑게 느껴졌다. 예전에 집에서 마시던 차 생각이 나서. 디오틀라 씨는 차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내 이름은 이르코. 이르코 디오틀라라고 하네. 디혼은 내가 본 첫 아들이야. 바크는 제 어미의 성이지.”
“아...”
“흔한 이야기다. 일에 정신팔린 데다가 물건을 만드느라 치료에 적기를 놓쳐 디혼이 열 살 때 아내가 죽었다. 내 잘못이고, 디혼은 결코 용서해 주지 않았지. 나를 따라 장인의 길을 걷겠다고 하던 녀석이 그 때부터 엇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만드는 칼이나 활을 들고 나가 무예를 닦던 녀석은 성인이 되자마자 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칼 한 자루와 저 활, 그리고 화살을 들고 사라졌다.”
디오틀라 씨 이야기대로, 흔한 이야기다. 흔히 결말을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내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실존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에게 누가 될까봐 나는 계속 주의를 다해 경청했다.
“칼에 비해 활은 다루기 어렵지. 그래서 나는, 칼은 녀석이 계속 쓰더라도, 활은 누군가에게 팔지 않을까 했다. 그래서 계속 수소문을 했다. 시장에 특이한 활이 나오지 않는가 하고. 하지만 20년이 다 되도록 그런 일은 없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이 활은 워낙 특이한 활 아닌가.”
“그렇지요. 누군가 팔았다면, 디오틀라 님에게 물어볼 법 합니다.”
“그래서 오늘 누군가 디혼에게서 활을 받았다고 한 사람이 나타났다기에 황급히 달려왔는데, 자네는 돈이 많아서 이런 활을 살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단 말이지. 그래 마음이 급해 실수를 했네. 미안하이.”
“아닙니다. 디혼 선생님도 저에게 아버님이라고는 말씀 안 하시고... 그냥 제도에 가면 디오틀라 님을 찾아가 보라고만 하셔서.”
“선생님이라고?”
“아, 네. 지금 디혼 바크 선생님은 북대공령의 기사 아카데미 교관으로 계십니다.”
순간 나는 디오틀라 씨의 얼굴에서 온갖 감정이 차례대로 스쳐지나가는 것을 봤다. 놀람, 애달픔, 순간적인 분노, 그리고... 마지막은 안도감이었다.
“건강한가? 결혼은?”
“어느 누구보다 건강하시고 결혼은 아직입니다.”
“그렇군...”
마치 디혼 본인인 것처럼 활을 어루만지던 디오틀라 씨는 나에게 물었다.
“이 활을 어떻게 얻게 된 건가?”
그래서 나는 요즘 자주 그랬듯 내 이야기를 해 주었다. 원래는 마법사였다는 이야기. 마법을 잃고, 제도에서 원인을 찾기 위해 호신의 수단을 찾았다는 이야기. 훈련을 지도하던 바크 선생님에게서 활 실력을 인정받아, ‘명궁에게는 명기가 필요하다’는 말과 함께 활을 받은 이야기. 그 활로 여러 위기를 거쳐나온 이야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야기군. 그러고 보니 요즘 제도에 명궁이 한 명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그 사람 이름이...”
“...민망하지만 그게 저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제 이름은 기리인 모스라고 합니다.”
“그 쪽이 기리인 모스 경이오?”
“...말씀 낮추십시오. 제가 오히려 곤란스럽습니다.”
“이름은 많이 들었지. 아무리 외진 공방이라도 소문은 꽤 빨리 들려오거든. 어느 날 사교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로그푸스 가의 아들의 의동생. 엄청난 미남인데다가, 어전에서 펼쳐진 궁술시합에서 묘하게 생긴 활을 들고 나타나 엄청난 실력을 보였다고. 이미 여러 귀족가에서 그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고 하던데... 적어도 얼굴에 대해서는 그 소문이 오히려 부족함이 있군.”
“...민망합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랬군... 디혼은 나에게 이 활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군. 아버지의 활을 잘 가지고 있다, 나는 잘 지낸다, 라고. 이 무뚝뚝한 아들놈 같으니. 편지라도 한 장 쓸 것이지.”
무덤덤한 타박이었지만 그래서일까, 더 절절하게 들렸다. 잠시 눈을 감고 감정을 삭이던 디오틀라 씨는 “밖에 누구 없나?” 하고 외쳤다. 곧 네라 씨가 들어오자, 디오틀라 씨가 말했다.
“오늘 오후는 일을 쉬겠다. 모두 정리하고, 마당을 비우도록 해라.”
“하지만 내일까지 해 줘야 할 것이...”
“하루쯤 미뤄도 괜찮아. 돈이야 물러주면 그만이다.”
약간 불만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았지만, 네라 씨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밖으로 나갔다. 곧 밖이 시끌시끌해지는 동안, 디오틀라 씨는 말했다.
“사실 그 활은 아직 미완성품일세.”
“네에? 이렇게 좋은 활이 미완성품이라고요?”
“이 활이 좋다고 하는 걸 보니 자네는 이 활의 가치를 아는구만. 게다가 익숙해졌고 말이야.”
자신의 작품이 칭찬받은 것이 기쁜지, 디오틀라 씨는 담담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이런 활을 컴파운드 보우라고 이름붙였네. 20년 전에 신의 도움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우연으로 간신히 완성했고, 그 뒤로 온갖 노력을 다 해봤지만 필수적인 재료를 구할 수 없어서 두 대밖에 완성하지 못했다네. 게다가, 사람들이 도통 쓰려고 해야 말이지. 그냥 공방에 걸려있는, ‘디오틀라의 괴벽’ 중 하나로만 취급받았는데, 이렇게 이 활을 높이 평가해 주는 사람을 만나니 너무 기쁘군.”
“아닙니다. 좋은 활을 만들어 주셔서 제가 오히려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그 활은, 쏘는 사람에 맞추어 좀 더 조정해야 한다네. 그리고, 지난 20년동안 연구하며 몇 가지 더 덧붙일 것도 있고 말이야. 오늘 이렇게 왔으니 내가 그 활을 손봐주겠네.”
============================ 작품 후기 ============================
으아.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전에 너무 졸려서.;;;
오늘 자정까지 설문조사를 마감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제목도, 형태도 지금처럼 유지하자는 의견이 다수네요.
자정에 결정되는 대로 여러분의 의견을 따르겠습니다 ㅎㅎ
읽어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시는 여러분들 덕에 저는 글을 씁니다.
판타지zz 님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계룡산도인 님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melontea 님 // 아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화이트프레페 님 // 그러니까 최고의 바람둥이감인 거죠. 자기가 잘못하는줄도 모르는 ㅋ
시오니아 님 // 비슷하긴 한데 약간 다르게 갈까 싶어요 ㅎㅎ 감사합니다~
eastarea 님 // 원래 지나친 달달함은 주변인으로부터 반발을... 아 이게 아니고. 암튼 감사합니다~ 당분간은 달달 전개로 갈까 싶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