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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203화 (203/309)

00203 8. 시궁창에서 꽃은 필 수 있을까 =========================

덥다.

이미 여름이 된 지 오래다. 갑옷을 제대로 챙겨 입어야 하지만, 이런 날씨에 그렇게 하라는 건 너무나 가혹한 요구이다. 애초에 대열의 한가운데서 말을 타고 걸어가고 있는 황태자 저하, 아니, 아니. 이제 즉위하신지 두 달이나 됐는데 아직 이러면 안 되지. 황제 폐하께서도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는지 브레스트 아머(breast armor)와 투구 정도만을 걸치고 있었다. 그나마 투구의 눈가리개마저도 위로 젖혀놓고 있었다.

나도 뭐 별 다를 게 없다. 북대공께서 예전에 미틱 시에서 주셨던, 가볍고 튼튼한 미스릴 브레스트 아머만 걸치고 있다. 나는 빠른 움직임이 요구되는 궁수라 무거운 갑옷 같은 걸 입을 수 없으니까 별 수 없지. 대신 언제든 대응할 수 있게끔 활은 상자에서 빼내어 등에 메고 있었고, 화살통은 내 허벅지에서 뚜껑이 닫힌 채 덜렁거리고 있었다.

이런 더위는 정말 난생 처음이다. 남부의 여름은 북부에서 겪었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북부 출신인 나로서는 추위에는 그런대로 익숙한 편이다. 잘 견디기도 하고. 하지만 더위는, 견디는 것과는 별개로, 세상의 모든 것을 늘어지게 만드는 불쾌함을 가지고 있었다. 몸에서 흐르는 땀은 덤이고 말이다.

물론, 황제 폐하의 옆에서 내가 불만을 표시할 수는 없다.

‘띠링!’

<전방에서 말을 탄 사람 한명이 빠른 속도로 접근중입니다.>

그동안 꽤 많이 적응해서인지 시스템의 ‘자동 정보확인’은 내가 잊어버리고 있을 때면 꼭 나타나 나를 도와주고 있었다. 저 멀리서 점 하나가 약간의 먼지를 피우며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건... 전령이구나. 아까 아침에 파견한 전령 중 한 명이구나. 나는 말을 몰아 폐하의 옆으로 다가갔다.

“폐하.”

폐하는 힘들어는 하지만 짜증은 내지 않는 눈으로 나를 돌아보고는 말했다.

“어, 기리인. 말해라.”

“전령이 도착한 것 같습니다.”

“어디?”

나는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폐하는 눈 위에 손을 대고 한참 앞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기는 아직 유효한 건가?”

“그럼요. 저는 적들이 지금까지의 태도를 버리고 느슨한 연합군 형태를 구성하고 누군가를 독립 지휘관으로 내세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융파트의 님크 기사단과 나스프의 에아뉘 기사단, 물론 그 중 일부만이 떨어져 나와 형성한 병력이라 해도 중부군과 남부군이 공동 작전을 펼친다는 것 자체가 상상도 못 할 일이야. 서로 매일 잡아먹을 듯이 굴었던 사람들인데. 나는 지금까지처럼 1:1을 두 번 하거나, 무식하게 두 집단 다 달려들 거라고 예상한다.”

“내기의 금액은...”

“언제나처럼 1드로그.”

폐하는 피식 웃으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즐길 거리 없는 진중에서 어떻게든 이런 거라도 해야지.

물론 사령관님 주변에 있는 사람들처럼 밤에 짬짬이 포커를 치거나, 어떻게든 책을 구해 책을 읽는 사람들도 있지만, 황제 폐하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그럴 수 없다. 그리고, 그런 황제 폐하 곁에서 한 사람이라도 봐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해서, 나도 별다른 시간보내는 취미를 만들지 않고 있었다.

아, 나도 하는 게 없진 않다. 단 하나 하는 게 있다면, 나는 열심히 적고 있었다. 편지를 적을 때도 있고, 일지를 적을 때도 있고, 무엇보다 이 전쟁의 시작부터 나는 매일매일 그 날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나마 적고 있었다.

편지는 다양한 사람에게 보냈다. 지금도 보고 싶은 요안나 선생님, 전쟁으로 인해 제도행이 미뤄져 불만을 갖고 있는 리미, 여전히 연구에 여념이 없다는 아르토 누나, 모두가 잘 지내고 있으며 자신도 할 일을 찾아보고 있는 중이라는 뮤리나 누나, 내가 아주 유용하게 쓰고 있는 이 만년필을 선물해 준 아르논 양. ...어떻게 전부 여자냐. 내가 생각해도 내가 좀 심하다 싶다.

진중에서 서신은 검열되기 때문에 직접적인 묘사나 위치, 전략전술 등은 전혀 적지 않았지만, 그녀들에게 내가 무사하다는 걸 알리고, 어찌저찌 전해져 오는 답장을 받는 것만으로도 나는 피로가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갑자기 병사 한 명이 이 쪽으로 뛰어와 말했다.

“모스 백작님! 사령관님의 전갈입니다!”

“알았다. 폐하, 린베크 사령관이 전령을 보내왔습니다.”

바로 옆에 있는 폐하에게 이게 무슨 짓인가 싶지만, 황실은 법도를 깐깐히 따지는 곳이니 이런 일을 할 때는 지켜야 한다.

“들라 하라.”

내가 전령을 바라보자, 전령은 황제 폐하를 둘러싼 한 겹의 경비대원들이 벌려주는 틈새로 들어와, 폐하에게 무릎꿇고 인사한 후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폐하, 린베크 사령관이 전령병의 보고를 들은 후 폐하를 빨리 모셔오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전령병이 보고한 사항을 검토할 때, 전황에 상당한 변화가 예상된다고 말씀드리라고도 했습니다.”

전황에 변화라...

“그래, 알았다. 지금 가겠다.”

“모스 백작도 함께 참석했으면 하는 분부도 전해 왔습니다.”

“...뭘 새삼스레. 언제는 함께 가지 않은 적이 있었나.”

전령은 군례를 올린 후 다시 사령부 쪽으로 달려갔다. 황제 폐하는 나를 보며 말했다.

“모스 백작, 가세.”

“네, 폐하. 소신이 앞장서겠사옵니다.”

나는 타고 있던 말에게 가볍게 고삐를 휘둘러 지금까지보다 약간은 더 빠르게 말을 걷게 하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 역시도 내 뒤를 따라 말을 걷게 하고 있었다. 폐하의 주변으로 전쟁 전에는 궁내부원이었다가 지금은 전쟁터까지 따라와 폐하의 시중을 들고 있는 시종 세 사람이 황급히 따라붙고 있었다.

대열은 서서히 행군을 멈추고 있었다. 우리에게 전령이 보고하는 동안, 아마 행군을 잠시 멈추고 쉬라는 지시가 내려온 것 같았다. 이 대평원에 그늘 같은 것이 마땅하지 않은 게 문제였지만, 다들 어떻게든 앉아서 서로 수통을 비우며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곧 건조한 육포와 퍽퍽한 비스킷, 그리고 물이 병사들에게 배급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점심 시간이로군?”

“네, 폐하. 걸으면서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점심식사가 배급되는 걸 보니 행군이 빨랴야 하는 상황은 아닌듯합니다.”

“음.”

나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황제 폐하. 어느새 우리는, 간단하게나마 기둥을 세우고 포장을 내린 린베크 사령관의 천막에 도착했다. 우리가 말에서 내리는 동안, 궁내부원이 황급히 달려가 천막 앞의 병사에게 뭐라 말하자, 병사는 즉시 천막을 걷고 외쳤다.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곧 회의실 안에 있던 적지 않은 숫자의 사람들이 부스럭거리며 일어나려 했지만, 폐하는 얼른 손을 들어 앉혔다.

“됐습니다. 경들과 내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전쟁을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그런 예의 같은 건 조금 줄입시다.”

그렇게 말하며 폐하는 상석의 오른쪽 자리에 앉았다. 황제 폐하의 친정(親征)이지만, 결코 멍청하지는 않은 우리 황제 폐하는 자신이 나서 지휘권을 틀어쥐거나 하지 않으려 했다. 전쟁이라는 건 복잡한 일이니, 평생 그들과 함께 한 사령관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고 하시며 말이다. 존경할 만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린베크 아버님, 이번 원정의 사령관 역을 맡은 아버님은 폐하가 앉는 것을 확인후 상석에 앉았다. 눈길이 여러 사람을 스치다가, 말석에 앉은 나에게 향했다. 아버님은 불현듯 미소지으며 고개를 까딱 했고,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폈다. 아버님의 옆에는 에아임 형이 앉아 있었다. 형은 군의 정보조직과 수사 기사단이 가지고 있던 정보조직을 전시에 한해 통합하여, 그 정보의 수집과 품질 유지, 통합 등을 담당하고 있었다. 형은 인사 같은 거 뭐하러 하냐는 듯 씩 웃었다. 나도 형을 보고 씩 웃었다.

“회의를 시작하겠소.”

린베크 아버님은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 큰 소리에 반응하여 자세를 고쳐앉는 사람들의 면면을 쭉 둘러보았다. 사령관 린베크 로그푸스 변경백 겸 황실기사단 단장, 그리고 내 의부(義父)님. 정보 담당관, 에아임 로그푸스 1급 수사기사, 그리고 내 형. 기병 사령관, 다르임 로그푸스 황실 기사단 부단장. 로그푸스 가의 세 인물은, 지금 융파트 공작과 나스프 공작이 가지고 있던 세력이 이번 반란의 영향으로 인해 약간 움츠러든 상황에서 지금 가장 위세가 큰 곳이 어디인지를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들이 전통적으로 황가의 방패이자 정치나 이권에 큰 관심이 없는 로그푸스 변경백가인 것이 그나마 반발을 줄여주는 요소였다.

그 옆에는 ‘관심은 없고 어차피 시키는 대로 하겠지만 황제 폐하의 앞이니 그나마 표정관리은 해야 한다’는 표정을 너무 티나게 얼굴에 띄우고 있는 마법사 부대의 지휘관인 황실 마법사 오클리프 엔데 경, 보급을 책임지고 있는 렛지 카라 상공부 장관, 그리고 보병을 대표해 참석한 사르임 장군. 사르임 장군은 이미 이 전략회의에 참석한지 몇 번째인데도 아직 어전에 서는 게 어색한 듯 약간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내 왼쪽에는 ‘지역사령관’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실은 인질로 잡혀와 있는 나스프 공작과 파라 융파트 경이 좋을 리 없는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융파트 경은 몰라도 나스프 공작은 내가 보기에도 좀 안됐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주 전장이 남부이다 보니 안 그래도 최근 몇 년간 작황이 좋지 않았던 남부에 걷잡을 수 없는 타격이 가해지고 있었다. 곡물 수입 계획도 뫼르말 가가 그 꼬라지가 난 이후 잠시 연기된 상황이라, 렛지 장관을 도와 보급을 맡아줘야 하는 나스프 공작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어두워지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8부 시작합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7부 끝에서 다소 시간이 흐른 상태입니다.

찾아서 읽어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시는 여러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이 제게 힘을 주시는 분들입니다.

얼룩야옹이 님 // 맞아요. 사람을 신뢰하기는 해야 하는데, 또 너무 믿으면 안 되니 참 적정선이라는게 어렵네요.

화이트프레페 님, melontea 님 // ㅋㅋㅋㅋ과ㅋ학ㅋ의ㅋ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센스 대박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astarea 님 // 다음에 또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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