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5 8. 시궁창에서 꽃은 필 수 있을까 =========================
“어째, 맨날 얼굴 보면서도 이야기하기는 전보다 훨씬 더 어렵냐?”
형은 푸념하듯 나에게 의자를 내주며 말했다. 나도 의자에 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아이고, 형. 저도 죽겠어요. 폐하 곁에서 떠나는 게 쉬워야 말이죠. 좀 멀리 갈 때면 꼭 허락 받고 가야 하고...”
“그러게 누가 그렇게 그 때 선황제 폐하의 곁에 가까이 있으래.”
나는 그저 웃기만 할 뿐, 입을 다물었다.
어느 누구의 인생이 안 그렇겠냐만, 내 인생에도 족쇄가 여럿 걸려 있다. 사슬이라고 해도 좋고, 인간관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서로를 완전히 붙이지도, 그렇다고 서로에게서 완전히 멀어지게도 하지 않는 요안나 선생님과 나 사이의 서로의 구속이 그 중 대표적인 족쇄일 것이다. 아니면, 마법 아카데미를 다닌 4년간, ‘나보다 더 큰 나 자신’을 느끼는 그 놀라운 감각이 나에게 지금 족쇄로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나는 지금 마법과 하등 관계없는 인생을 살 수 있으면서도 계속 마법사로서의 자신을 찾으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걸린 족쇄. 선황제 폐하의 유언. “아제트를 잘 부탁한다”는 그 유언. 당금의 황제 폐하의 곁에서 같이 들어버린 그 유언은, 나를 아제트 황제 폐하의 곁에 묶어버렸다. 나는 도저히 죽어가던 자가 남긴 마지막 유언을 저버릴 수 없었고, 그 대상이 황제 폐하라 더더욱 그러했다.
“먹을래?”
형은 노란 껍질의 과일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이게 뭐에요?”
“이렇게 먹는거야.”
형은 손으로 껍질을 죽 벗겨내더니, 안에 든 하얀 과육을 덥석 베어물었다. 나도 형을 따라 껍질을 손으로 벗겨내었다. 약한 향이 있는데... 음. 씨도 씹히고, 뭐랄까. 약간 단 맛이 도는 향나는 감자 같다.
“이게 뭐에요?”
“그래, 너는 이거 본 일이 없을 것 같더라. 이건 바나나라고 해. 남부의 열대 수림에서 나는 과일이야. 남부 사람들이 농사가 안돼서 먹을 게 없을 때 이걸 대신 먹는다더라. 여름에 채취해서 말려놨다가 겨울에 먹기도 한다는데, 그래서인지 그 사람들은 거들떠도 안 본다더라. 이번에 보급품 들어왔길래, 같이 먹자고 불렀다.”
“맛있네요. 고마워요, 형.”
“뭘. 힘들게 일하면서 쉬지도 못하는 동생을 형이 안 챙기면 누가 챙기겠냐.”
나는 더 고맙다는 말을 하는 건 형에게 오히려 실례가 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그저 웃기만 했다.
나와 에아임 형의 사이가 돈독하다는 건 제도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황제 폐하가 즉위했을 당시 황제 폐하는 행정 경험도 많고, 모두에게 능력을 인정받고는 있었지만, 그를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즉 ‘믿을만한’ 신하가 한 명도 없었다. 유일한 예외가 나였다. 무임소 비서관이 된 지 며칠 안 된, 하지만 선황제 폐하의 유언을 들은 두 명 중 한 명. 그리고, 내가 없을 때부터 서로간에 친분이 있었던 로그푸스 가와 황제 폐하는, 나라는 매개체를 통해 새 황제 폐하와 더욱 밀접해졌다. 로그푸스 가가 발벗고 나서자, 제도의 귀족가들의 혼란 역시도 가라앉을 수 있었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형을 좋아하고 따르며, 형은 나를 아낀다. 형이고, 동생이니까.
“형, 그냥 바나나 먹자고 부른 건 아니죠? 뭔 일이 있죠?”
“역시 척하면 척이구나. 일단 너 개인적인 용건.”
형은 노끈으로 묶은 묶음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뭐긴. 편지들이다. 이제 검열 끝났으니까 봐도 돼.”
나는 밝은 표정을 숨기느라 애쓰며 편지들을 받아들고 이름을 확인했다. 우리 요안나 선생님에게서 두 통, 아르논 양, 리미, 뮤리나 누나...
“너 진짜, 보낸 사람들이 전부 여자라는 건 좀 문제 있는 거 아니냐?”
“편지를 써 줄 남자들이 없는 건 크게 문제라는 생각은 안 드는데요.”
“...그게 아니고 임마. 아무튼 처신에 조심해라. 니가 잘 알아서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든다만.”
나는 피식 웃으며 답변을 피했다. 형은 들고 있던 바나나를 한 입에 털어넣고, 탁자 위에 있던 쇠 물병을 집어들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킨 후, 하아- 하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공적인 용건.”
나는 무의식중에 자세를 바로 했다. 형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황제 폐하에게 조심스럽게 전하라는 얘기다. 공식적으로 보고할 수는 없지만, 알고는 계셔야 할 것 같은 정보니까 말야. 확인되지 않은 정보라고 꼭 말씀드려야 한다.”
“네, 형.”
“음...”
형은 그러고도 의심스러웠는지 주변을 둘러보더니 나에게 손짓을 했다. 내가 형의 입 근처로 귀를 가져가자, 형은 소리를 한껏 낮춰 속삭였다.
“지금의 반란이 원래는 님크 반에 에아뉘 반이 서로 상대방 영지에서 분탕질친 거잖아.”
“그렇죠...”
“그런데 에아뉘의 반은 님크의 반을 막으려고 애쓰지만, 님크의 반은 에아뉘의 반을 못 막고 있지.”
“그거야, 북부에게서 탈환한 미틱 시나 융파트 공작령을 경비하기 위해...”
“그래,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정보가 들어온 거지. 이중으로 확인은 했다. 신빙성이 있는 정보야.”
나는 긴장하며 물었다.
“그게 아니라면...?”
“융파트는 막는 시늉만 하고 있다는 이야기일 수 있지.”
“그럼 융파트가가...?”
“물론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아. 그게 아직 사실인지도 모르고, 융파트가의 동기는 더더욱 모른다. 가만히 놔두면 나스프 공작가는 위세를 잃을 수밖에 없어. 그러니 기다리고만 있어도 반사 이익이 저절로 올 건데, 왜 융파트 가는 더 어려운 길로 가는 것일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정보가 너무 부족하네요. 혹시 파라 경이 외부로 검열되지 않은 서신이나 마법 통신을 하는 모습은 없었나요?”
형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다른 전달 방법이나 서신의 암호가 있을 수도 있지만, 검열에서는 아무 것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렇군요...”
형은 길다란 육포 띠를 나에게 내밀며 말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아. 하지만, 기사단의 정보 조직은 아직 융파트에도 살아 있다. 그 조직에게 융파트 공작령의 정보를 모아보도록 했다. 만약 지금의 적군이 그 말도 안되는 보급을 받는 곳이 바로 융파트라면, 그리고 우리가 단순히 인질로만 생각해 진영에 대충 데려왔던 파라 융파트경이 군사 기밀을 밖으로 유출하는 중이었다면 - 우리는 위험해질 수도 있을 거다.”
나는 육포를 한 입 뜯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파라 경은 ‘지역사령관’이라는 위치 때문에, 꼬박꼬박 아까같은 작전 회의에 참석하곤 했다. 그런 정보들이 새어나갔다면 위험할 거다.
“어쨌든, 일단은 내일이나 내일 모레 있을 회전을 준비하는게 우선이다. 기리인, 정찰오는 놈들 잡는 것도 정보에 아주 중요하다. 잘 해주라.”
나는 형이 준 육포를 씹다가,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한두번 해보는 일도 아니고.”
형은 다가와, 정말 오랜만에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이 단순한 동작이 나는 사무치도록 반갑고 그리웠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아직 스물도 안 된 사람이 너무 큰 짐을 지는 것 같아서 좀 안쓰러워서 그런다.”
나는 짐짓, 밝게 웃어보였다. 걱정하는 형을 둔 동생들은 흔히 그러지 않던가? 잘 모르겠다. 나는 외동이라 형을 가져본 게 처음이라서.
“걱정하지 마세요, 형. 제가 뭔가를 견디는 건 대륙에서 제일 잘 할 걸요.”
형은 피식 웃었다. 내가 흰소리를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시스템이 객관적으로 평가한 걸 가지고 말하는 건데.
“알았으니까, 이제 얼른 돌아가라. 곧 출발할거다. 여기도 이제 출발할 준비 해야 해.”
“네, 형.”
“아. 너 점심 못 먹었으니까 이거 하나 더 가져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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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을 가볍게 걷게 한 채, 바나나를 우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융파트라. 사실 나스프 가가 이전에 황비를 배출한 가문이라는 사실 때문에 떵떵거리는 큰 위세를 발휘하다가, 프그단을 추천한 것이 나스프 가라는 사실 때문에 좀 빛이 바래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약간 쓰라린 정도의 일이라면, 그 나스프 가 때문에 내내 치인 융파트 가가 입은 타격은 그에 비할 정도가 아니었다. 그걸 어떻게든 돌려놓고 싶어할 만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의 영지마저 혼란으로 몰아넣는 짓을 자행한다고? 반란군에게 보급을 대준다고? 대체 왜?
“어이, 기리인.”
화들짝 놀란 나는 어느새 말이 황제 폐하의 옆 자리까지 나를 데려온 것을 깨달았다.
“정신 좀 차려. 잠이 부족한가?”
빙글빙글 웃고 있는 황제 폐하.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소신 지금 들은 이야기가 있어 생각하느라...”
“고삐도 안 잡고 있는데 말이 알아서 데려다주는 걸 봐. 자넨 여자들에 이어 말에게까지 사랑받고 있는 게 틀림없어.”
“폐하... 제발...”
왜 내 주변 사람들은 나를 못 놀려서 안달인 걸까. 내가 파닥파닥대는 걸 보며 즐기는 걸까.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주변의 듣는 귀를 확인한 후, 황제 폐하에게 말을 바짝 붙이고는 입을 열었다.
“폐하, 에아임 경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옵니다만...”
============================ 작품 후기 ============================
간신히 짬을 내서 이렇게 예약 걸어둡니다.
대댓글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바나나는 우리가 생각하는 지금처럼 되기 전까지는 많은 역사가 있었다고 하죠.
찾아서 읽어주시고 선/추/코/쿠 주시는 여러분들 덕에 힘내서 썼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