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6 8. 시궁창에서 꽃은 필 수 있을까 =========================
“......”
에아임 형이 해 준 이야기를 폐하에게 모두 해 드리자 폐하는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렇군... 아직 확정된 바는 없는 것이지?”
“네, 폐하. 확인되지 않은 정보이나 알고는 계셔야 할 것 같으니 꼭 말씀드리라고, 그렇게 에아임 경이 말했습니다.”
“그래...”
황제 폐하는 다시 재개한 행군 속도에 맞춰 말을 걷게 한 채 생각에 잠겼다.
“아직 배신감을 느끼기에는 이르다. 융파트 가가 서운함을 느끼는 것이야 당연하겠지만, 그리고 그들이 제국의 다른 구성원들과 이리저리 불꽃을 튀겨 온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야.”
“네, 폐하.”
“아바마마께서 늘 말씀하셨지. 믿어야 한다. 안 믿어서는 아예 대화나 일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완전히 믿어서도 안 된다. 상대의 신뢰를 전제하고 일을 추진해서는 안 된다.”
나는 피식 웃었다.
“꼭 연애 얘기 하는 것 같군요.”
“연애 얘기?”
“실례했습니다, 폐하. 그저, 어떤 여자의 마음을 얻을 때, 온전히 그녀에게 내 마음을 다 내주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아예 조금도 마음 없이 그저 계산과 말로만 행동해서도 한계가 있다는... 개인적인 경험이었습니다.”
이번에는 폐하가 피식 웃었다.
“기리인, 너 없을 때 에아임 형님하고 얘기하다가 들었다. 너를 최악의 바람둥이라고 하던데? 여자에게 늘 진심으로 대해서, 여자가 미워하게도 못 한다고 말야.”
과장되게 좌절하는 내 모습을 보며 폐하는 큭큭 웃었다. 그 때였다.
“삐-익!”
호루라기 소리가 크게 울렸다. 동시에 전령이 경호원들의 대열 밖에 달려와 외쳤다.
“모스 백작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다녀오겠습니다.”
폐하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전령을 따라 황급히 대열의 앞쪽으로 달려갔다. 대열의 앞쪽에는 선두에서 행군을 선도하던 다르임 형님과 참모들이 있었다.
“기리인, 왔냐?”
“네, 형님.”
다르임 형님은 한 쪽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정찰을 맡은 장교가 달려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나에게 망원경을 내밀며 말했다.
“두시 방향입니다.”
“약간이나마 눈을 피하기 위해 돌아온 모양이군요?”
나는 망원경을 눈에 가져다댔다.
“그런데 저 바보들, 마법사를 아주 소모품으로 아네... 아니면 그냥 저 마법사가 바보인건가. 하늘을 날 때는 옷 색깔에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모르나...?”
“아니면 아무리 눈에 띄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일지도 모르지.”
“하긴, 그렇겠군요. 이 거리에서 자신이 공격받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요.”
번다한 말을 싫어하는 다르임 형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진 밖으로 나가지는 마라. 네가 관찰되어 역저격의 대상이 되는 걸 원하지는 않는다. 이 자리에서 주변을 비워줄 테니까, 이 정도면 괜찮겠지?”
“네. 감사합니다.”
“모스 백작의 저격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변을 비워라.”
주변 사람들이 나를 피해서 전진하는 동안, 나는 등에 메고 있던 활을 내렸다. 디오틀라 님의 ‘컴파운드 보우’는 한 번 개조를 거친 후 훨씬 더 강력해졌다. 지금 저 마법사와의 거리는 대략 500보. 보통의 활은 바람이 도와줘야 간신히 닿을까 말까한 거리이지만, 이 활과 내 마불살이 더해진다면 보고도 피할 수 없을 정도의 저격이 가능하다. 공중에 부는 거친 바람조차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마수목 화살을 하나 꺼내어, 윌로우(willow)를 하나 결합한다. 지금은 미늘촉 같은 갑옷을 찢는 살보다는 속도가 필요하니까.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쉰다. ‘시스템’, 스킬을 발동하겠어.
‘띠링!’
<마나 배치가 발동합니다. 마나 배치의 현재 레벨은 Lv. 3입니다.>
<저격을 위한 원통형 직선 배치를 시작합니다. 현재의 스킬 레벨로 가능한 거리는 대략 150보 정도입니다.>
마불살을 많이 쐈더니 마불살의 기본이 되는 내 몸 밖의 마나를 밀어넣는 기술이 3레벨로 늘었다. 그만큼 이제는 마나를 익숙하게 배치할 수 있게 되었다. 가끔씩, 아무도 안 볼 때 나는, 발치에 마나를 쌓아 발판 비슷하게 만들고는, 허공을 밟고 서 있듯 그 발판을 밟고 올라가 있고는 했다. 이 능력이 언제 사라질지는 모르겠지만, 있으면 무궁무진한 이용이 가능할 것도 같다. 이 전쟁이 끝나면 여러 가지 활용방법을 찾아보자.
“저기...”
내가 손을 들자, 내 한 걸음 뒤에 서 있던 아까 망원경을 준 정찰 장교가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백작님?”
“눈에 망원경을 좀 대 주세요.”
나는 한 번 심호흡을 한 후, 활시위를 당겼다. 빠아아아아. 시위를 오른손에 찬 릴리즈에 걸고는, “지금요.” 라고 장교에게 말했다. 장교가 조심스럽게, 활에 얽히지 않는 곳으로 다가와 내 뜬 왼쪽 눈에 망원경을 대 주었다.
“조금 더 오른쪽이요. 좀 더 위로, 옳지... 됐다. 지금 저 정도면 거리는 어느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사람이 저 정도 보이면 대략 500보 정도의 거리입니다.”
오오. 전문성이 느껴지는 발언.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제 됐어요. 물러나세요.”라고 말했다. 그 장교가 황급히 아까의 위치로 돌아가자, 나는 이미 만들어진 마나의 원통을 화살 끝에 닿게 하고, 그 원통을 지금 허공에 떠 있는 마법사에게 향하게 한다. 자... 조준이... 됐다.
톡.
나는 부드럽게 릴리즈에 걸린 시위를 놓는다.
화살은 아무런 소리 없이 쭉쭉 상승하기 시작한다. 마나의 원통에 의해 보호받는 화살은 속도를 전혀 잃지 않고, 아니, 오히려 나에게서 멀어질수록 원통형의 레일(rail)을 타고 더 빠르게 날아가는듯한 느낌이다.
나는 활을 내리고, 왼손을 내밀었다. 눈치빠르게 정찰장교가 나에게 망원경을 다시 내밀었다. 나는 망원경을 통해 화살의 궤적을 쫓았다.
갑자기, 허공에 새햐얀 꽃이 피었다. 여러번 마불살을 쏴 온 나는 저게 뭔지 안다. 화살이 어느 정도 이상의 속도로 날아가면, 마치 허공을 찢듯 충격파를 만든다. 그리고 마법사로서 나는 저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 소리에도 속도가 있다. 그래서 멀리서 나는 소리는 광경보다 소리가 늦게 온다. 번개 뒤에 천둥이 오는 것처럼 말이다. 화살이 소리의 속도보다 빠르게 날아가면 저런 현상이 생긴다. 그리고, 하나를 채 세지 못한 시점에서.
꽈꽝!
갑자기 굉음이 울렸다. 화살이 공기의 장벽을 찢고 날아가는 소리다.
이-히히히힝!
근처에서 행군하던 말들이 갑자기 들린 굉음에 놀라 날뛰고, 그 말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주변의 병사들이 황급히 달려드는 소란이 들린다.
쐐애애애애애액!
마불살로 쏜 화살은 다른 화살과는 날아가는 소리가 다르다. 다른 화살이 쉬리리리릭- 하는 소리가 들린다면, 마불살로 공기를 찢으며 날아가는 화살은 그 공기를 찢는 듯한, 마치 잘 드는 가위로 두꺼운 천을 길게 가르고 지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새하얀 꽃 너머로, 화살답지 않게 전혀 흔들리지 않고 날아간 화살은, 내가 망원경으로 보고 있는 가운데, 내가 목적했던 대로, 허공에 움직이지도 않고 둥둥 떠 있던 마법사의 오른쪽 다리를 꿰뚫었다.
“맞췄습니다.”
“역시...! 정찰대, 돌격! 저 마법사를 생포해와야 한다! 화살도 반드시 챙겨오도록!”
내 뒤에서 정찰장교가 명령을 내리는동안, 나는 활을 갈무리하고,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 툭툭 털고는 돌아섰다.
“고생했다.”
“아닙니다. 언제든 기꺼이 달려오겠습니다.”
다르임 형님에게 인사한 후, 나는 원위치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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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내가 저격을 성공시키고도 약 세 시간을 더 걸어간 우리는 적절한 숙영지를 찾아서 하룻밤을 보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병사들과 마법사들이 정찰과 경계 임무에 나서고, 다른 병사들이 목책으로 숙영지의 외곽을 구분하며 텐트를 치고 있는 동안, 나는 황제 폐하의 천막을 궁내부원들이 설치하는 것을 확인한 후 적절한 위치를 골라 내 개인 텐트를 펼쳤다.
이제는 하도 많이 해서 익숙하다. 기둥을 적절한 위치에 배열하고, 천막 천을 그 위에 덮은 다음, 안에서부터 기둥을 세우고, 텐트 벽을 만드는 네 개의 작은 기둥들을 사방에 끼운다. 이어 밖으로 나가 네 귀퉁이에 묶인 줄을 팽팽히 당겨 사방에 박으면 끝난다. 처음에는 주변을 지나던 병사들의 도움을 받고도 반 시간 가까이 낑낑대야 했지만, 매일 이 짓을 반복하다 보니 이제는 혼자서도 10분이면 할 수 있다.
텐트를 팽팽히 세운 나는, 황가의 짐수레들이 모인 곳으로 다가가 내 짐들을 짊어지고 텐트로 돌아왔다. 익숙하게, 야전용 침대를 펴고, 모포를 깔고, 야전용 책상과 의자를 놓고, 마력등 두 개를 꺼내 텐트 천장에 하나 걸고 책상에 하나 놓았다. 이것으로 오늘 밤을 날 준비는 모두 마쳤다.
“후우...”
나는 땀을 닦고는 의자에 잠시 앉았다.
무려 백작위까지 수여받은 주제에, 나에게는 황제 폐하께서 주는 월급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텐트까지 내가 직접 쳐야 할 정도로 말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내가 아직 아랫사람을 부리는 데 익숙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지금 황제에게 가장 가까운 인물인 주제에 내가 위세까지 부리면 평판이 아주 안 좋아질 거라는 계산도 있었다. 다행히, 다른 귀족들은 몰라도, 병사들은 내가 텐트도 직접 치고 짐도 내가 나르고 하는 걸 보고는 ‘어린 놈이 되바라졌다’ 따위의 평가를 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렇게 의자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데, 누군가 텐트 밖에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모스 백작님?”
“네, 무슨 일이죠?”
“황제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같이 저녁 식사를 하자는 부름이십니다.”
“지금 가겠습니다.”
나는 전령의 뒤를 따라, 황제 폐하를 위해 세워진, 이 숙영지에서 가장 큰 천막을 향해 다가갔다. 텐트를 젖히고 들어가니 이미 음식이 차려지고 있는 듯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훅 하고 풍겨왔다.
============================ 작품 후기 ============================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네요.
다행히 늦지 않게 한 편 완성해서 올립니다.
이번 챕터에서는 전쟁과 관련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겠습니다.
대규모 전쟁씬과, 거기에서 기리인이 보고 겪는 것들이 주가 될 것입니다.
언제나 찾아서 읽어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시는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제 힘입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진짜로 암말로 설정했다는 게 포인트(...) 기리인은 승마 경험이 많지 않아서 종마를 주면 다루지 못할 것 같았거든요.
jin-matient 님 // 지금 바나나종에 치명적인 전염병 같은 게 돌면 세계의 바나나가 일시에 멸종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습니다. 덜덜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