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10 8. 시궁창에서 꽃은 필 수 있을까 =========================
선두, 다르임 형님 옆의 기사가 삐익- 삐익! 하고 호각을 불었다. 작전 전에 들어서 기억한다. 한 번 짧게는 집결, 길게는 즉시 흩어져라... 그리고 두 번 짧게는 대형을 정비해라. 나는 내 양 옆의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두 기사들이 내 곁을 떠나지 않으며 나를 인도했다. 다르임 형님을 중심으로 다시 화살촉 모양으로 기사들이 늘어섰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를 따라오던 궁수대와 마법사대가 망가진 숙영지의 문을 통해 빠져나오고 있었다. 마법사대가 잔뜩 분탕을 쳤는지, 숙영지에서 불길이 확 치솟고 있었다. 달이 뜨지 않은 밤하늘이 어느새, 나와 마법사대가 지른 불길로 인해 환해져 있었다.
‘띠링!’
<메인 퀘스트(4) - 진흙탕>
<#3. 야습 - 업데이트!>
<1차 목표. 생환하세요.>
<2차 목표. 적에게 의미있는 전략적 타격을 주세요. - 완료>
<적 부대의 말들을 여럿 살상시켰습니다. 적의 기마전력의 1/10이 이탈되었습니다.>
<3차 목표. 적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세요. - 완료>
<막사의 화재와 혼란으로 인해 적 병사의 1/12가 전투력을 상실했습니다.>
<생환 시 퀘스트가 완료됩니다>
휴. 다행이다. 일단은 목표는 달성했구나. 돌아가기만 하면, 오늘의 모험도 끝이다. 저들은 혼란에 빠져 있고, 우리를 추격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가슴에 넣은 선생님의 편지를 쓰다듬었다. 얼른 돌아가서, 씻고, 이거 읽고,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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챙!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 퍼엉! 마법이 시전되고, 그 마법을 막기 위한 마법이 시전되며 허공에서 폭발하는 소리, 으아아아! 기합인지 고함인지 공포에 질린 소리인지 모를 소리.
이미 모든 게 난전이 되었다. 우리는 진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고, 우리를 포위하기 위해 회피기동을 하는 자들을 간신히 견제하는 게 고작이다. 야습을 위해 전원 기병으로 구성했던 것이, 돌파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짐이 되고 있다. 그나마 전원 마나 에지(mana edge)를 사용 가능한 실력자들로 구성된 황실 기사단의 기사들이라 밀리지 않는 거지, 세 배는 되어보이는 병력에서 뒤의 궁수대와 마법사를 지키기만도 벅차다.
나는 다시 화살을 활에 재고, 당긴다. 내 화살은 소모품이고 저격용이다. 아무렇게나 막 쓸 수 없다. 그러니, 가치있는 목표를 골라야 한다. 예를 들면... 저기! 두 기사의 사이로, 중장갑을 한 적의 기사 한 명이 할버드를 집어넣었다! 나는 그 놈의 머리까지 마나 레일을 이은 후 그대로 릴리즈를 놓는다. 톡. 스르르륵. 마나 레일을 벗어나지 않은 채 날아간 화살은, 아무런 소리 없이 갑자기 나타난다. 그리고,
퍽.
보통의 화살처럼 그저 꿰뚫기만 하는 게 아니다. 소리보다 빠르게 날아가는 내 화살은 마나 레일을 벗어나는 순간 엄청난 충격파를 만들며 지나간다. 당연히, 지금 할버드를 휘두르며 대열을 뚫기 위해 난입했던 적의 기사의, 머리가, 마치 수박의 안에 폭발물을 심은 것처럼 퍽 하고 터져나간다. 나는 그 날, 황태자 저하가 황제 폐하가 되었던 날을 떠올린다. 마치 돼지 오줌보가 터지듯 터져나가며 핏물과 살점과 뼛조각을 마치 무기인 것처럼 사방으로 흩뿌리던, 엘프의 지저분한 마법에 당한 사람들. 나는 이를 악문다. 또 그런 일이 벌어지게 내버려둘 소냐.
내 화살은 머리를 수박처럼 터트리고도 힘을 잃지 않는다. 쐐애애액! 하고 날아간 화살은 두어 명을 더 꿰뚫은 후에야 간신히 세 명째의 몸에 박힌다. 자그마한, 내 새끼손가락 두께나 될까말까한 화살은, 그러나 사람 한 명이 지나가고도 남을만한 너비의 길을 만들어냈다. 그 길은 뇌수와 핏물과 뼛조각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 위에, 언어도단적인 것을 본 적 기사들이 잠시 굳은 모습을 보인다. 화살에 머리가 뚫려 죽는 게 아니고 ‘터져서’ 죽다니. 터진 이후에도 몇 명을 더 죽일 수 있다니.
“좋다!”
전체적인 전황 파악을 위해, 궁병대가 있는 2선까지 와 있던 다르임 형님이 외쳤다.
“조금만 더 버텨라! 지금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지원병이 오고 있을 것이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우리를 독려하는 다르임 형님.
하지만 나는 왠지 좀 비관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 병력이 어디서 왔을까? 숙영지에 있는 병력이 과연 전부였을까? 또, 우리가 파악하고 있던 상대 병력이 그게 전부일까? 내가 적장이라면, 우리가 보낸 전령을 중간에서 자르기 위해 준비해놓지 않았을까? 아니면, 병력이 더 많다면... 우리가 아무리 저들이 우리를 뚫거나 우회하는 것을 막으려 애쓰건 말건, 이미 우리를 뒤에서 치기 위해 다가오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내가 그런 얘기를 하는 순간 사기를 뚝 떨어트릴 테니까. 다르임 형님이 내가 짐작한 것들을 짐작하지 못할 리가 없으니까.
“기리인.”
소리를 낮춰 나를 부르는 다르임 형님.
“네, 형님.”
“상황이 썩 좋지 않다.”
역시. 나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화살은 얼마나 남았냐?”
“마수목 화살이 스무 발 남짓 남았습니다. 원통달린 화살은 대략 열다섯 개 정도입니다.”
“그래... 너도 알겠지만, 지금 우리 궁병대와 마법사들은 적보다 많다. 하지만 적의 대열이 우리 기사단을 뚫고 들어오는 것을 막는데 그 여력이 모두 쓰이고 있다. 그리고 우리 기사단은 일자 대형을 유지하며 양 날개가 포위되지 않게끔 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지원군은 언제 올지 모른다. 그래서,”
형님은 나를 향해 돌아섰다.
“지금 전황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너밖에 없다. 뭔가 수가 없겠냐?”
‘띠링!’
<전황이 변화하여, 메인 퀘스트(4)의 #3. 야습이 #4. 활로 로 변경됩니다.>
<메인 퀘스트(4) - 진흙탕>
<#4. 활로 - NEW!>
<분명 야습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귀환하는 길에 상대가 예비한 대규모의 병력에 휘말려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원병은 언제 올지 기약이 없고, 지금 지휘관은 예비 병력이 없어 수를 낼 수가 없습니다. 유일하게 전장에 변화를 줄 수 있는 것은 당신밖에 없습니다.>
<목표 : 부대의 절반 이상을 살려 숙영지로 귀환하세요.>
<절반 이상이 살아남을 경우, 살아남은 사람이 많을수록 공훈이 증가합니다.>
<난이도 : S>
<위험도 : A+>
미치고 팔짝 뛰다가 환장해서 돌아가시겠구만. 나는 다르임 형님에게 말했다.
“저, 주제넘은 소리일지 모르지만...”
“예의는 신경쓰지 마라.”
다급한 말투.
“예비 병력을 약간만 만들어주실 수 없겠습니까?”
“얼마 정도?”
“기사 10명, 마법사 2명이면 됩니다.”
“그 정도면 어떻게든 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어떻게 할 작정이냐?”
나는 손으로 그림을 그려보이며 작전을 설명했다. 다르임 형님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해 볼만 하겠군. 지금 우리가 흰 빵 검은 빵 가릴 처지가 아니니까 말이야. 에닌! 지금 계획을 들었겠지? 그대가 10명과 마법사 2명의 지휘를 맡는다. 언제든 차출이 가능하게 분대장에게 가라. 기리인, 준비되는 대로 바로 시작해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허리에 매단 전통의 위치를 매만져, 원통이 달린 화살을 좀 더 뽑기 쉬운 위치로 옮겼다.
이 작전이 성공한다면, 일시에 적과 우리가 격돌하고 있는 전선의 압력이 확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10명의 특공대가 한 점을 돌파하고, 나머지 기사들이 그 점을 따라 적진을 그대로 뚫고 나간다. 한 번 뚫으면 저들은 우리를 따라잡을 수 없을 거다. 아니, 그렇게 만들겠다!
후우.
나는 심호흡을 한다.
너무 흥분해서도 너무 긴장해서도 안 된다. 진짜 ‘집중’을 찾는다.
그 집중상태로 나는, 아까 적의 숙영지를 돌파할 때 몇 번 연습해 본 대로, 허공으로 올라갔다가 떨어지는 마나의 레일을 그린다. 모두 10개. 하지만 모두 같지는 않다. 처음 쏘는 레일은 좀 더 높이, 그리고 갈수록 레일의 높이가 점점 낮아지게. 완전히 같은 시간은 아니라도 비슷한 시간에 떨어질 수 있게끔.
동시에 10개의 마나의 레일을 만드는 건 내 능력의 최대치까지 뽑아내는 느낌이다. 머리가 아프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아니, 실제로 아프다. 내 코에서 뭔가 팍 하는 느낌이 들더니 미지근한 무언가가 아래로 흐른다. 이건 코피인가. 몸이 건강해지고 나서는 처음인데.
쉬익! 챙!
뭔가 눈 앞에서 번쩍했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쓸 여유가 없다. 나는, 활에 원통달린 화살을 재고, 마나의 레일에 물린 다음... 당기고, 다음 화살을 잰다. 물리고, 당기고, 잰다. 물리고, 당기고, 잰다. 물리고... 당기고... 재고... 그렇게, 마지막 10번째 화살이 내 손을 떠났을 때, 나는 핑 하고 눈 앞이 흐려지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다. 아까 에아임 형에게 했던 말대로, 대륙에서 나는 뭔가를 견디거나 참는 걸 제일 잘 하는 사람이니까.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마수목 화살을 꺼낸다. 말 위에서 나는 등자를 꽉 밟은 채 일어선다. 두리번거리며 다음 화살을 쏠 사람을 찾는다.
그 때.
꽈꽈꽝!
다행히 시간에 큰 차이 없이, 내가 쏜 10발의 화살은 마나의 레일을 비슷한 시간에 벗어났다. 허공에 촉수의 가지를 뻗어가는 흰 꽃들이 열 송이 피어나고, 거기에서, 수백 수천, 아니, 수만개의 날카로운 못들이 마치 비처럼, 흰 촉수를 달고, 적 병력의 머리 위로 흩뿌려진다.
“아아아아악!”
============================ 작품 후기 ============================
그렇게 쉽게 기리인에게 요안나의 편지를 읽게 둘 수는 없죠.
(사망플래그를 만들 수야 없겠지만요.)
찾아서 읽어주시고, 선작/추천/코멘트/쿠폰 주시는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제가 글 쓰는 원동력입니다.
락샤샤 님, eastarea 님, 스타크&판타지 님, 화이트프레페 님 // 그래서 너프는 안 하기로 했습니다. 괴물 활이라고 불리는 그날까지!
hasj12 님 // 아뇨,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메인 퀘스트인데요. 단지 지금은 전쟁 중이니까요.
쓰굴 님 // 그걸 포기하면...... 큰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