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11 8. 시궁창에서 꽃은 필 수 있을까 =========================
“아아아아악!”
언어도단적이라는 말이 있다. 너무나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광경을 일컫는 말인데, 말이 얼마나 허망한지, 힘이 부족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지를 나타내는 거라고 하겠다.
내 산탄(散彈) 화살이 만들어낸 광경이 그랬다. 전선에서 일시에, 쇠 부딪히는 소리와 고함 소리가 멎었다.
“아아악!”
“으으어어어억!”
나는, 일렬로 늘어선 우리 기사님들을, 약간만이라도 부담을 덜어주면 – 그러면 여력을 약간 모아서, 마법과 내 화살의 지원을 받아가며, 앞으로 돌파구를 뚫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뒤로 물러나면 하나둘씩 끊기며 후퇴가 아닌 도주가 된다는 것 정도는 군사작전에 문외한인 나도 아니까 말이다.
그런데... 공중에서 피하지도 못하게 어마어마한 속도로 내리꽂힌 수천 수만발의 가느다란 못과 금속조각들은, 우리 기사님들을 거칠게 밀어붙이고 있던, 한배 반 정도 되는 적의 기마 병력들을... 일거에 반 이상 무력화시켜 버렸다.
“끄아아악!”
머리나, 목, 가슴 등의 위험한 부위를 맞은 사람들은 바로 절명했다. 그 뿐만 아니다. 위에서 화살만큼 빠른 속도로 낙하한 못들은 사람 뿐만 아니라 사람이 타고 있던 말까지 꿰뚫었다. 이곳저곳에 구멍이 뚫려 피를 흘리며 말과 사람이 한 덩어리가 되어 이리저리 쓰러졌고, 그 위에... 목숨에는 위험하지 않지만 당장 칼을 들거나 움직이기 어렵게 된 사람들과 말들이 뒹굴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세상에...”
“트리클이시여...”
그걸 지켜보던, 내 옆의 궁수대나 마법사들마저 저런 소리를 했을 정도였다. 나는 이 전장에 있는 모두가 나를 바라보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을 받았다. 내 안의 반골 기질이, 선황제 폐하 앞에서도 할 말은 하게 했던, 그의 숨겨진 연인을 언급해서라도 그를 이기려 들었던 기질이 꿈틀거렸다. 뭐. 그래서 뭐. 내 활에 뭐 문제라도 있어?
적의 기병들이 쓰러진 저 뒤에, 2진으로 대기하고 있던 기병들이 보인다. 그들은 너무나 언어도단적인 광경 앞에 할 말을 잃은 채였다. 그리고, 그 기병의 선두에... 조금 더 좋은 갑옷을 입은 것 같은 사람이 보인다. 거리가 멀어 표정까지는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투로 그는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거리는... 대략 200보 정도 되는 것 같다.
그래, 빌어먹을 것, 어차피 나를 괴물로 보는 시선에는 아주 익숙하다. 기왕 그럴 거라면, 무서운 괴물이 되어주마! 나는 천천히, 마수목 화살을 하나 꺼내어 활에 재고, 활을, 평소보다 약간 천천히 당기기 시작했다. 빠아아아아아. 오늘 내 부름에 여러 번 응답하며 내 목숨을 구한 충직한 활은 금속의 비명을 지르면서도 충실히 휘어지기 시작했다.
그 때, 다르임 형님이 재미있는 행동을 했다. 형님은 손가락을 들어, 내가 보고 있는 그 남자 쪽을 가리켰다. 잠시 기다려볼까. 곧, 적병이 모두 이 쪽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적진이 소란스러워진다. 어떻게든 대응을 해 보려는 거겠지. 그 전에, 먼저 한 발 먹어라! 나는 이미 150보 정도까지 뻗어나가 있던 마나의 레일에 화살을 부드럽게 올린 후, 시위를 놓았다. 톡. 스르르르륵. 아무 소리 없이 150보 정도를 날아간 화살은, 꽈앙! 오늘 수십 번은 피었던 흰 꽃을 피워내며, 그대로, 화살같지 않게, 직선으로 날아가서...
퍼억!
그 좋은 갑옷을 입은 놈이 높은 놈은 높은 놈이었나보다. 소리보다 빠르게 날아간 화살은, 그 놈의 앞에서 방패를 들고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놈의 방패를 꿰뚫고 지나가... 목에 틀어박혔다. 그냥 나무 방패도 아니고 기사가 쓰는 카이트 실드(kite shield)였는데, 물론 기사가 비스듬하게 대야 하는 걸 잊고 정면으로 대긴 했지만... 방패를 꿰뚫어버리는 화살이라니. 나에게로 쏠려 있던 눈은, 그대로 절명한 그 놈에게 쏠렸다.
다르임 형님이 소리높여 외쳤다.
“다음은 누구냐! 목숨이 아까운 자는 나서라! 신궁(神弓)이 그대를 신의 곁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나는 웃거나 어이없어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대신, 조용히, 전통에서 화살을 하나 더 꺼내, 활에 물렸다. 그리고 조용히 시위를 당겼다. 빠아아아아.
“기리인, 지금 쏘지 말고, 적들이 한 걸음이라도 물러나면 그 때 쏴라. 아까 보니 너 마법 화살 가능한 것 같던데?”
“화염이 한 발 남았습니다.”
“그럼 그걸로. 에닌, 대열을 정비시켜라. 만약 저들이 혼란을 수습하고 쳐들어오면 그 때는 우리도 맞부딪힌다. 만약 도주하면, 조금만 쫓다가 돌아간다.”
“넷!”
나는 활을 당긴 채, 최대한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앞을 바라보고 있다. 활을, 슬쩍 왼쪽으로 움직인다. 그랬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움직인다. 내 사선(射線)의 끝에 놓인 적병들이 명백히 동요하고 있다. 그 동안, 눈에 띄지 않게 살살 접근한 에닌이라는 기사분이, 대열을 정비시키고 있다. 원래라면 정비되는 대열을 보고 저들도 대응을 해야 하지만, 저들은 내 활 끝에 정신이 팔려 있다.
“기리인, 한 번만 더 왼쪽 오른쪽으로 왔다갔다 하다가... 네 기준으로 왼쪽, 그러니까 적의 우익에 화살을 날려줘라. 지금 네가 만든 시체와 부상자들의 벽 때문에 정면으로 지나가기는 힘들 것 같으니까, 우측으로 우회해서 적의 좌익을 들이칠거다. 한 번 흩어놓은 후에 본진으로 귀환하는 거다. 알겠지?”
다르임 형님은 전혀 몸은 움직이지 않은 채, 입술만 움직여 저런 말을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의 손이 들려올라간다. 적의 좌익을 가리켰다가, 서서히 이동한다. 적들이 명백히 동요한다. 내 활 끝도 형님의 손끝을 따라 천천히, 천천히 이동한다.
“쏴, 쏴라!”
적이 보유하고 있던 궁병들과 마법사들이 황급히 내 쪽으로 화살과 마법을 날린다. 하지만 나처럼 마나의 레일로 날리는 게 아니다보니 급히 날린 화살은 정말 조준이 엉망이었다.
“대응하라!”
다르임 형님 옆에 있던 두 기사가 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내 쪽으로 쉬익! 하고 날아드는 화살을, 여유있게, 칼로 쳐낸다. 챙! 아, 아까 내가 활을 쏘다가 들은 소리는 그거였구나. 허공에서 화염구나 얼음덩어리, 뭔가 위험해 보이는 독안개 같은 것들도 다가왔지만, 우리 마법사들이 그 마법을 하나하나 받아쳐 허공에서 없어지고 있었다.
“지금이다, 기리인.”
나는 적의 우익을 겨냥한 화살을 톡 하고 놓았다. 스르르륵. 콰앙! 허공을 하얀 꽃을 매단 화염의 창이 날아가고, 전장의 모두가 보고 있는 가운데... 적의 우익 한가운데에 떨어진다. 퍼엉! 전에 내가 썼던 화염 화살은 여러 명이 탈 수 있는 마차 한 대를 불태울 정도였다. 지금은 그거보다는 약간 세어진 것 같다. 기병들이 서 있는 곳 한 가운데에 떨어진 불화살은, 아무도 죽이지 못했지만, 너비가 대략 대여섯걸음은 되는 큰 불길을 만들어냈다.
“으악!”
“마, 마법사!”
저들의 마법사를 동원해 불길은 빠르게 잡았지만 – 애초에 탈 것이 없어서 빠르게 꺼질 거라고 예상은 했다 – 이미 놀라버린 말들로 인해 적들의 우익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지금이다! 돌격 앞으로!”
두두두두. 일부 사상자가 있었지만 아직은 전력이 건재한 우리의 기병대가, 내가 만든, 그래, 내가 만든 사람과 말의 시체와 부상자로 이루어진 벽을 우회해, 적의 좌익을 들이치기 시작했다. 선두에 선 것은 아까 대열을 정비하던 에닌 경이었다. 그를 따라, 화살촉 모양의 진영을 만든 기사들이 매섭게 적을 짓쳐들어가기 시작했다. 아까 우리 기사들은 기병에게 어울리지 않게도 가만 서서 벽 역할을 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 기사들은, 돌격 거리를 얻었고... 적은 벽을 준비할 시간 여유가 없다.
“궁수대! 마법사대! 적을 총 공격하라! 대응할 여유를 주면 안 된다!”
내 곁에서 전체 전황을 지휘하는 다르임 형님은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곧 허공으로 화살과 불덩어리들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저 쪽에서도 맞받아 쏘려고 했지만, 숫자 자체가 적은 데다가 여유가 없다.
“기리인, 그거 한 발만 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원통 달린 화살 하나를 더 꺼내었다. 와. 이게 이제 몇 발 안 남았구나. 오늘 하루만 전장에 뿌린 금화가 몇 개냐. 적의 우익 머리 위로 떨어지게끔 마나의 레일을 만들고, 시위를 당기면서, 나는 내 자신에게 잠시 흠칫 놀랐다. 전장에서, 죽느냐 죽이느냐 하는 전투를 하면서, 적병의 머리를 터트리면서 – 화살 한 발에 얼마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내 자신이 괴물이 되어가는 걸까.
‘띠링!’
<그렇게 자신에게 되물을 수 있으면 아직 걱정은 이릅니다. 일단 여기서 살아나가는 게 중요합니다.>
나는 맞는 말이다 라고 생각하며 시위를 놓았다. 배부른 걱정은 여유있을 때! 내가 쏜 원통형 화살이 적의 우익 머리 위에 도달해, 뻐엉! 아까처럼 아래로 살의가 가득한 비를 뿌렸다. 우리 기병을 맞아 오른쪽으로 물러나려던 적병들이 일대 혼란에 빠졌다.
“으아아아악!”
그리고, 그들 위로, 제국 최고의 정예 기사들이, 날카로운 덩어리가 되어, 덮쳐갔다.
============================ 작품 후기 ============================
조용한 휴일이네요.
연재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4일 자정과 정오, 5일 자정에는 정상 연재되고, 5일, 6일, 7일 정오 연재는 쉬겠습니다.
가족이 여행가기로 해서, 밤에 컴퓨터놓고 한 편만 간신히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의 넓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언제나 찾아서 읽어주시고 선작/추천/코멘트/쿠폰 보내주시며 응원해주시는 독자님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좋은 연휴 보내시기를 기원합니다.
쓰굴 님 // 그 떡밥은...차차...ㅎㅎ
화이트프레페 님 // 사실 부대 전력의 3~40%만 잃어도 전멸 취급을 받는다고 하죠. 1/12면 꽤 큰 타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전력을 다한 기습도 아니니까요.
칼레이어드 님 // 원고료 쿠폰 정말 감사합니다. 더 힘내서 열심히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