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13 8. 시궁창에서 꽃은 필 수 있을까 =========================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아뇨, 괜찮습니다. 너무 그렇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아닙니다! 가보겠습니다!”
바짝 긴장한, 나보다 서너 살은 많아 보이는 병사가 군례를 올리고 떠나갔다. 나는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귀한 의무’라는 것에 남 눈치 봐야 하는 것도 있는 건가. 친절한 것, 격의없는 것과 예의없는 것은 다르다고 몇 번이나 잔소리를 들은 후라, 전령병 한 명 앞에서도 나는 행동에 신경써야 했다. ...그러면 다른 귀족들은 언제나 이런 걸 신경쓰고 있는 건가. 으아...
다행히, 사령관님 이하 모두는 우리가 어젯밤 큰 고생을 했다는 것, 고생을 하면서 전과를 크게 올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최대한 휴식을 보장해주고 있었다. 우리 황제 친정군이 사용하는 짐마차 2백여대에 어제 야습에 참여했던 기사와 궁수, 마법사 5백여명이 나누어 타고, 다음 숙영지가 될 곳으로 이동하는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쉬거나 할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마차 한 대가 단독으로 주어졌다. 전장이 아니면 사소한 특혜였지만, 전장에서는 아주 크게 다가왔다. 아무도 불만이 없었다는 게 더 크게 다가왔다. 심지어 다르임 형님마저도 어제 역습을 선두에서 지휘한 에닌이라는 기사와 같이 짐마차에 올라있는데 말이다.
...아니, 꼭 그것때문일까?
내 화살은 비상식적인 움직임과 비상식적인 위력을 지닌다.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광경은, 물론 전쟁이 만드는 광경이 언제나 참혹하고 끔찍하지만,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 보통의 화살은 머리가 거품처럼 퍽 터져버리거나, 금속 방패를 관통하거나 하지 못하니까. ‘아군에게 신궁이라고 불린다’라... 그게 존경이 아니고 경외(敬畏)가 아닐까.
모르겠다. 잠은 아까 제법 잔 것 같지만, 여전히 졸립다. 하지만 지금은 할 일이 있다. 나는 품 속에 손을 넣어, 어제 넣어두었던 선생님의 편지를 꺼냈다. 어제 격한 움직임 때문에 구겨져 있었지만, 다행히 땀에 젖거나 하지는 않았다.
편지는 개봉되어 있었다. 검열을 마쳤음을 알리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전장이니까 어쩔 수 없겠지. 애초에 나와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알렸고. 그러니 이상한 내용은 적지 않았겠지... 나는 첫 번째 편지를 펼쳤다.
[보고싶은 기리인.]
아. 서두부터. 민망해라.
[그전까지 제도의 생활에 불만을 느껴본 적은 없었어. 하고 싶은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고, 아무리 좋게 말해도 심심한 구석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 북부 대영지보다 훨씬 다채로운 볼거리에 만족하기도 했고.
그런데 요즘은 재미가 없네. 예전에는 분명 재미있던 것들인데.
네가 옆에 없어서 그런 것 같아.
네가 돌아오기 전에 얼른 여러 가지 것들을 준비하려고 애쓰고 있어. 네가 작위를 수여받고 나니까 제국 대학이나 신전에서 이전과는 달리 너무 협조적으로 나오는 것 있지. 어쨌든 그래서 다음 주에 대도서관에 가 보려고 해. 얘기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제국 대도서관은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자료를 찾아준다고 하거든. 아직 가 본적은 없어서 잘 모르지만, 거기라면 너와 관련된 자료가 있지 않을까?
다치면, 엄청 때려줄거야. 몸 조심하고 얼른 돌아와. 보고싶어.
요안나]
마지막 서명 앞에는 여러 번 펜이 긁고 지나간 흔적이 있었다. 뭐라고 더 적고 싶었다가, 적었다가, 황급히 마법으로 지워버린 것 같은 흔적이었다. 뭐라고 적었을까... 궁금하긴 하지만, 여긴 전장이라 도구가 마땅치 않다. 마법이 있으면 편하겠는데. 쩝.
나는 첫 번째 편지를 잘 접어서 넣고 두 번째 편지를 꺼냈다.
[보고 싶은 기리인.
편지 잘 받았어. 급하게라도 그렇게 한 통 써서 보내주니까 이 나이 먹고 오랜만에 눈물이 나더라. 건강하다니 정말 다행이야. 나는 예전과 다름없이 건강하게 지내고 있어. 몸은 말야. 마음은... 한구석이 빈 것 같아서 조금 쓸쓸하고. 얼른 누가 돌아와서 그 빈 구석을 채워주면 좋겠는데.
제도 분위기를 궁금해했지? 음... 높은 분들은 어떤지 모르겠네. 아카데미는 세상일에 크게 관심없는 곳이라 별 영향이 없는 거 같고, 밖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음, 그 분들도 그냥 일상을 그대로 살아가고들 있는 거 같아. 아, 그건 있어. 희귀한 물품들 있잖아? 저 남부나 동쪽 해안 쪽에서 와야 하는 것들. 예를 들면, 대균열 근처 삼각지에서만 자라는 그 블루 아이리스 있잖아. 그런 것들이 없어지거나 값이 엄청 비싸졌어. 전쟁 때문이겠지. 그래도 아직 생필품이 비싸지거나 하지는 않네.
어제 처음으로 대도서관과 대신전과 회의를 했어. 그때 그 여자, 너랑 술집에서 봤던 여자도 나와 있더라. 이름이 이브 오르테였던가.]
히익!
[나보고 너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어봤어. 자기한테는 소식 하나 없다면서 엄청 서운해하더라고. 서운해하긴 하는데... 좀, 뭐랄까, 느낌이 이상했어. 뭔지는 잡아내지 못하겠지만. 이러면 안 되는 거 알면서도 우월감 같은 걸 느꼈어. 그런 내가 싫었지만.
그래도, 기리인. 편지 한 통 써 줘. 모르는 척 할 테니까.
보고 싶어. 얼른, 모든 걸 잘 마무리하고, 건강하게 돌아와줘.
(누가 보내주는) 애정이 고픈 요안나]
...그러고 보니 완전히 잊고 있었다. 이브 오르테. 나에게 매혹 마법을 썼다가 뭔가 꼬이면서, 그 날 나를 ‘주인님’이라고 불렀던, 제국 대학의 마법이론 교수. 제국의 상황이 엄청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그 뒤로 한 번도 보거나 편지조차 주고받은 적이 없었는데. 화 많이 나 있겠군... 편지를 쓰면 더 곤란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우리 착한 선생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기도 하니까... 그렇게 나는 자신을 합리화하며, 두 번째 편지도 갈무리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읽을 편지가 많이 남았구나. 나는 같은 짐칸에 실어준 내 배낭을 당겨와, 선생님의 편지를 다른 편지나 작은 개인용품들이 들어있는 작은 가방에 넣은 후, 다른 편지를 꺼냈다. 아르논 양이 한 통, 리미가 한 통, 그리고 뮤리나 누나가 한 통...
[모스 백작님께.
전선이라 자세한 소식은 전해줄 수 없지만 건강하시다는 편지 받고 상당히 안심했어요. 황제 폐하와 백작님을 포함한 원정군이 떠난 후, 원정군 공식 소식은 이런저런 자리로 받고 있지만, 그 누구도 백작님이 건강한지는 알려주지 못하더군요. 그러던 차에 직접 편지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제 아버지를 포함해 모두가 건강하다고 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몰라요.
제도의 분위기가 어떠냐고 물으셨죠... 지금 제가 아는 건 제한적이에요. 아무래도 분위기가 흉흉하다보니 사교계의 모임이 많이 축소되었거든요. 두 달째 무도회 같은 게 열리지 않고 있어요. 간간이 다른 가문과 티타임을 갖는 정도에요.
그래도 제가 아는 바 안에서 말씀드리면, 재상 각하와 황후 전하가 잘 하고 계신 것 같아요. 분명히 조금 이상한 입장의 귀족들이 있을텐데도 제가 아는 한은 이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곳은 없어요.
돌려서 말씀하셨지만, 저와 저희 집안을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버지와도 서신을 주고받고 있어요. 아버지는 분명 힘든 상황이지만, 최선을 다해 황제 폐하를 보필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제 큰오라버니 – 아마 백작님은 만나보신 적이 없으시겠죠? 지금은 저희 고향, 나스프 공작령을 맡아서 다스리고 있어요. 큰오라버니도 제국군의 보급에 성심성의껏 협력하고 있다고 하구요.
그래도 백작님이 걱정해주니 참 고마웠어요. 빈말이 아니구 진심으로요. 누군가가 저를 걱정해준 적이 정말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아무리 사령부에 황제 폐하와 함께 근무하신다지만, 전쟁터라 눈먼 칼날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니 걱정이 많이 되네요. 늘 건강하셔야 해요.
아르논 드림]
그놈의 ‘백작님’은 하지 말지 좀...
[기리인에게
저번 편지에서 그간의 소식을 적어놓은 거 보고 깜짝 놀랐어. 네가 존댓말 하거나 백작님 하고 부르면 정말 화낼거라고 몇 번이나 적어놓지 않았으면 아마 서두를 모스 백작님께 하고 썼겠지 아마? 어떤 운명의 인생을 살기에 황제 폐하를 수행하며 전쟁터까지 갔니? 참... 신께서 너가 모든 운명을 견뎌내었을 때 어떤 삶을 주실지 정말 궁금하다.
나는 잘 지내. 오빠도, 그리고 새언니도 잘 지내고. 오빠는 지난 두 달간 많이 아팠어. 어... 막 열이 펄펄 끓고 그런 게 아니고, 음. 우리는 ‘은퇴한 격투가 병’이라고 불러. 긴장하면서 살다가 은퇴하고 나면, 긴장이 풀려서, 막 몸살처럼 한두 달 드러누워 있거든. 자주 골골거리고. 오빠가 딱 그랬어. 다행히 새언니가 곁에 있어서 오빠를 잘 돌봐줬지.
지금 오빠는, 그때처럼, 격투왕이었을 때처럼 건강하지는 않아. 하지만 그때보다 훨씬 편해 보여. 사람도 좋아졌고. 가끔씩은 이게 새언니 덕분인가 싶어.
아, 맞아. 어제 들었는데, 새언니 임신했어. 이제 2달째래.]
뭐?! 황급히 날짜를 따져 본 나는, 날짜가 안 맞는다는 걸 깨달은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편지를 마저 읽어내려갔다.
[오빠는 벌어둔 재산도 많고 하니 나보고 이제 뭘 하고 싶은지 찾아보라고 하는 중이야. 새언니도 그렇고. 두 사람이 눈치는 안 주지만 그래도 신혼부부 곁에 있으려니까 조금은 눈치가 보여서 나올까는 생각중인데... 음. 뭔가 만드는 일을 해 보고 싶어서, 레카 시에 있는 도자기나 조그마한 수공예 가게들을 알아보고 있어. 물론 하려면 길드에 가입해야겠지만, 뭐... 오빠보고 길드 자격증 하나 사 달라고 하지 뭐.
언젠가 네가 레카 시를 다시 지날 일이 있으면 좋겠다. 그 때는 꼭 들러줘. 그동안 쌓인 얘기 하고 싶어. 네 얘기 듣는 것도 정말 흥미진진할 것 같고.
전쟁에 따라갔다니 걱정이 많이 되네. 다치지 말고 몸 성했으면 좋겠어. 나중에 꼭 답장 줘.
뮤리나 누나가]
============================ 작품 후기 ============================
쉬어가는 편입니다.
중간중간 지나왔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제도 상황을 전해드리기 위해 넣었습니다.
제게 힘을 주시는, 읽어주시고 선작/추천/코멘트/쿠폰 주시는 독자 여러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제 힘입니다.
melontea 님 // 아이쿠^^;;; 힘내세요 기말만 지나면 곧 여름방학이!!!
eastarea 님 // 아마... 주인공이라서 죽지는 않겠죠? ㅎㅎ;; 감사합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근데 지금 기리인한테 능력치를 보상으로 주면 더 먼치킨이 돼서... 그렇다고 돈이나 보석 같은 걸로 주기에도 그렇고 말이죠. 그리고 아직 전쟁은 많이 남았으니까 나중에 뭐 큰 보상이 올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