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214화 (214/309)

00214 8. 시궁창에서 꽃은 필 수 있을까 =========================

음. 나는 편지를 갈무리하고도 다시 생각했다. 내가 비키 씨와 그걸 한 건 배 위에서니까 적어도 4월 초. 지금은 7월 중순, 임신은 지금 두 달째니까... 한 달 이상 차이가 난다. 아닐 가능성이 훨씬 높지. 그래도 나는 뭔가 좀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었다. 한 번 나와 잤던 사람이라서 그런가. 그 때도, 그녀는 나와 자고 싶었던 게 아니고, 나를 통해 크주크 형을 봤던 거였고 – 그리고 이제 진짜와 함께 지내게 되었으니, 나로서도 좋은 일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왜 마음이 싱숭생숭한지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제 내 손에는 리미가 보낸 편지만 남아 있었다. 리미는 어떻게 지낼까. 크게 의미를 두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녀가 어떻게 지낼지 궁금하다. 나는 도장이 찍힌 뜯어진 편지봉투에서 편지를 꺼냈다.

[기리인에게.

네가 저번 편지에서 그렇게 백작님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는데도 ‘모스 백작님’이라고 시작할 뻔 했어. 솔직히 말할까? 나 저번 편지 받고 좀 질투했다? 왜냐고?

나 요새,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아빠가 ‘어차피 사교계도 모두 중단되었다’고 못 가게 해서, 나 지금 집에서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어. 덕분에 학교 다닐때도 안 했던 마법 수련을 하고 있다니까. 아, 물론, ‘레이디들이 가질 법한’ 취미들, 예를 들면 독서나, 아니면 자수나... 이런 것들도 하고 있는데, 솔직히, 성격에 안 맞아서 말이지.

근데 너는 내가 알던 그 기리인인가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엄청난 활약을 했잖아. 아빠가 대공님에게서 전해듣고 나한테 얘기해주는데, 너 제도에서도 엄청 인기인이라며? 너랑 한 번 이야기하려고 사람들이 줄 선다고 막 그러더라? 물론 아빠가 나를 놀리느라고 일부러 과장해서 얘기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네가 황태자 저하를 구하고 그 공으로 백작이 된 건 똑같잖아? 아까도 얘기했지만, 너 정말 내가 알던 기리인 맞니?

황제 폐하께서 돌아가신 건 여기서도 엄청 화제가 되었어. 아무래도 모든 제국사람이 국상을 치러야 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때도 니가 있었다며? 아빠가 그 얘기를 해 주며 그랬어. 기리인한테는 사건을 끌어모으는 뭔가가 있는 것 같다고. 꼭, 어쩌다보니 제국 통일의 길을 걷게 된 치르낙 대왕이 생각난다고 말야.

그래서, 더 믿기지 않아. 내 친구가 그런 대단한 인물이 되다니 말야.

제도에서 요안나 선생님을 만났니? 그 선생님 제도에서 안식년 한다고 했었는데. 너는 선생님이랑 친했으니까 아마 만났겠지? 난 그 선생님 왠지 모르게 좀 껄끄러워서...

그러고 보니 전쟁터라고 했지. 아빠가 그 얘기도 했어. 사건을 끌어모으는 사람은 다음 사건이 그 사람을 끌어당기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의외로 위험하지 않다고 말야. 그 이야기를 듣고, 걱정 크게 안 하기로 결심했어. 물론 내가 걱정한다고 바뀌는 건 없다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난 나중에 제도에서 온전한 기리인 모스 백작님을 만나고 싶단 말야.

나중에 기리인 너하고 왈츠 추고 싶어.

리미가]

아. 그래. 저번 편지는 안 이랬는데, 나는 새삼 리미를 내가 왜 썩 좋아하지 않았는지 다시 떠올렸다. 리미는 자기중심적이다. 세상을 자기 중심으로 판단한다. 다른 사람의 기준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그리고 나는 그게 별로 마음에 안 들었었지.

제도 사교계에 오면 그걸 좀 고쳐야 할텐데... 아르논 양한테 배우면 좋겠는데. 가만있자. 두 사람을 좀 소개시켜줘 볼까. 마음속까지 레이디인 아르논 양에게 리미가 감화될까? 아니면... 리미 때문에 아르논 양이 좀 변하게 될까? 뭐, 그건 나중의 즐거움이고.

나는 편지를 갈무리하고, 마차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내 짐을 포함해 짐이 꽤 실려있었지만, 공간은 충분했다. 어차피 나 혼자만 타고 있는 마차인데다가, 지붕까지 씌워져 있으니까 볼 사람도 없고. 나는 팔베개를 하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일까. 어젯밤 급박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잘 했냐 못 했냐를 물으면, 시스템의 평가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다르임 형님의 인정과 황제 폐하의 포옹이 아니더라도, 나는 어제 내가 잘 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능력을 이용해, 내 옆과 뒤에서 함께 달리던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어제 내 화살에 목숨을 잃던 수많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나가던 사람, 자탄(子彈)에 꿰뚫려 온 몸에 구멍이 숭숭 뚫렸던 사람, 말들에 깔려 비명을 지르던 사람... 한 명 한 명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런데,

왜 나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걸까. 그들에 대해 동정심을 느끼지 않는가, 혹은 끔찍한 가정이지만, 내가 그들을 죽이면서 희열을 느꼈던가? 하고 생각해 보지만... 내 돌아가신 부모님을 걸고라도 맹세코 그건 아니었다. 한 명 한 명의 죽음에 대해 나는 안타깝다고, 이렇게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들의 죽음이 트리클 신 앞에 준비된 나의 천칭 반대편에 올라갈 것이라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왜 아무렇지도 않을까. 여러 소설 말고도, 처음 그걸 얘기해 줬던 에빌로 누나를 비롯해, 나에게 전장에서 극도의 정신적 충격으로 줄을 놓아버리는 사람들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은 많았다. 나는 그런 걸 모두 겪으면서도, 의지력으로 버티고 있는 걸까?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힘들다, 하지만 버텨야지’ 하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니까.

마법사는 자신에 대해 관조(觀照)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그래야만 자아를 죽이고 더 큰 세상과 동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반드시 자기를 긍정하는 방법도 익혀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더 큰 세상에 먹혀버리니까.

그래서 나는 나를 관조해 보려고 애썼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내가 혹시 어딘가 마음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원래 결함이 있는 것일까? 관조라는 게 그렇다. 답이 안 나온다. 답을 찾는 과정 자체에 의미를 둬야 하고, 그 자체가 나를 더 크고 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답을 알고 싶었다. 나는 왜,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충격을 먹고 다 토하고 난리를 치지 않을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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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인!”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어느새, 머리 뒤에 팔베개를 한 채로 나는 잠들어 있었다. 졸리긴 졸렸으니까 금세 잠들어버렸나 보다. 그런데, 누가... 나는 머리를 다듬으며 일어나 밖을 보았다. 에아임 형이었다.

“아, 형.”

“좀 쉬었냐?”

형은 그렇게 말하며, 마차 위로 고개를 내밀어 두리번거리고는, 나 혼자 있다는 걸 알고는 “뭐야, 혼자 쓰고 있었어?” 라고 하며 훌쩍 뛰어올라왔다. 나는 형에게 약간 자리를 내 주었고, 형은 털썩 주저앉았다.

“피곤하지는 않아?”

“몸은 괜찮아요.”

“그럼?”

마침 눈 앞에 형이 있었기에 나는 얘기를 시작했다. 아까 잠들기 전까지 했던 고민에 대해. 왜 나는, 그들의 죽음이 안타깝다고 생각하면서도, 왜 죄책감 같은 걸 느끼지 못할까? 남들처럼 토하고 끔찍해하는 게 더 인간다운 것 아닌가?

“그걸 누가 정했는데?”

“네?”

“끔찍해하고 안타까워하면 아무것도 못 하는게 인간적이라고 누가 정했는데?”

나는 말문이 막혀 멍하니 형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형은 씩 웃으며 말했다.

“너 너만 그러는 거 같아서, 니가 인간적이지 않은 것 같아서 그러는 거잖아?”

“...어떻게 알았어요?”

“너 같은 놈도 없지는 않거든. 그리고 그런 놈들이 대개는 지휘관이 되더라.”

“네?”

“감정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억눌러놓았던 감정이 뻥 하고 터져나오며 망가지게 되지. 그렇다고 감정적으로 결정하는 놈들 역시, 시한폭탄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믿고 맡길 수가 없어. 너처럼 ‘나는 왜 그럴까’ 하고 고민하는 놈들이, 항상 보면 감정을 인정하지만 그에 크게 영향받지 않거든. 믿고 맡길만 하지.”

뭔가, 알 것도 같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형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그것보다, 가자.”

“어디를 가요?”

“적의 정체가 대충 판별되었어. 그것 때문에 부르러 온 거다. 대놓고 지휘관 회의에서 얘기 못 할 거라.”

나는 잠시 형의 말의 뜻을 생각하다가, 깜짝 놀라 물었다.

“형, 지휘관 회의에서 대놓고 얘기 못 한다는 거는... 그 멤버 중에...”

형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얘기는 누가 들을지도 모르니 가서 하자. 얼른. 폐하가 기다리실거야.”

“네에?! 형 그 얘기를 먼저 했어야죠...!”

형은 웃으며, 다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아. 네가 누구보다 큰 공을 세운 것도, 그리고 피곤해하는게 당연하다는 것도 잘 알고 계실 거다. 이제 가면 되지 뭐.”

나는 간신히 머리만 다듬은 채 형을 따라, 무려 황제 폐하가 기다리고 계시다는(!) 형의 천막으로 향했다.

============================ 작품 후기 ============================

많이 늦어버렸네요. 죄송합니다.

말씀드렸던 대로, 5일, 6일, 7일 주간연재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밤에 쓰는 것도 노트북 가져가서 와이프 눈치보면서 깔짝거리는 정도일 것 같습니다.

여유있을 때 소설 생각 좀 많이 해 보고 오겠습니다. 다들 어디 가지 말아주세요ㅠㅠ!

찾아서 읽어주시고, 선작/추천/코멘트/쿠폰 주시는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제 힘입니다.

계룡산도인 님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astarea 님 // 늘 감사합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그러면 소설 장르가 치정극으로 바뀌게 되니까요 ㅎㅎㅎㅎ;;;;;;

유한도전 님 // 정주행과 칭찬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없는 머리 안빠지게 최대한 조심중입니다 ㅎㅎ

Xiayu 님 // 오, 그것도 괜찮겠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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