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0 8. 시궁창에서 꽃은 필 수 있을까 =========================
“모스 백작님. 맨 꼭대기에는 저와 다른 기사, 그리고 백작님만이 올라가실 겁니다. 저희 두 명이 날아오는 화살이나 마법을 마나 에지로 저격해서 막아드리거나 방패로 막아드릴 겁니다. 혹시 모르니 백작님도 갑옷을... 네, 그 정도면 되겠군요. 두 번째 층에는 나머지 기사들과 마법사가 배치될 겁니다.”
“네. 마스 경이 내가 놓치는 목표물에 대해서도 잘 봐 주시기 바랍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령부에서도 모스 백작님에게 목표물에 대해 지시해올 겁니다. 저는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도 올라가는 거니까요. 그럼 가실까요?”
나는 마스 경을 따라 사다리를 이용해, 맨 꼭대기까지 올랐다. 야전에서 급하게 만든 대(臺)이지만, 발을 몇 번 굴러봐도 흔들리는 느낌은 없었다. 적들을 아직 내려다보지는 못했지만, 이제 적 보병 행렬의 뒤를 간신히 볼 수는 있었다. 야트막한 언덕의 사이에, 오르막길에 보병들이 방패와 장창을 들고 몇 열이나 서 있었다.
전에 레카 시에서 여행길에서 산 책 중에 <역사 속의 명전투와 명장들의 전략적 선택>이라는 책이 있었다. 그냥 무용담을 위주로 한 전쟁 이야기였는데, 그래도 생각보다는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 중에, 장창과 방패를 이용한 방진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등자를 비롯한 마구가 제대로 발달하기 전에는, 그래서 기병이 뭔가 전략적인 힘을 발휘하기 전에는 – 아니, 치르낙 대왕이 르플레스탁과 협상에 성공해서 마법을 확 발달시키기 전까지만 해도, 전장의 주연은 장창과 방패를 든 고슴도치들간의 대결이 주였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그랬다가는 고슴도치 등짝 위로 화살과 마법이 쏟아지고, 방향을 바꾸기 힘든 약점을 기병이 후벼파이며 탈탈 털리겠지만... 이 곳이, 양쪽 측면이 좁아서 측면으로부터의 공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이 전장이 다시금 고슴도치들을 불러오게 했다. 적들은 대략 10열 정도로, 6백명 정도가 나란히 어깨를 맞붙인 채 창을 앞으로 내밀고 서 있었다. 1열은 창을 정면으로, 2열은 약간 비스듬히 위로, 3열은 그보다는 위로... 그런 식이었다. 5열쯤부터는 창을 하늘로 세워들고 있었다.
창들 사이로 언뜻언뜻, 로브 차림의 마법사대나, 말을 탄 기병대들이 보이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뒤에 뭔가 있는 것도 같은데... 모르겠다. 나는 하늘을 흘깃 올려다보았다. 우리쪽의 마법사들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저들에게서 뭔가 정보가 들어오지 않을까.
“어, 폐하께서...”
대열의 앞으로, 새하얀 백마를 탄 황제 폐하가, 린베크 사령관님과, 몇 명의 기사들과 함께 걸어나가고 있었다. 마치, 양 대열을 시찰하듯... 폐하는, 천천히, 오른쪽 끝에서 왼쪽 끝까지, 한 번 말을 천천히 걷게 해서 살펴본 후... 다시 우리 대열의 가까이로 돌아왔다. 폐하는 우리 쪽을 향해 섰고, 기사들은 혹시 모를 적의 공격에 대비해 폐하를 호위하고 있었다. 폐하가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외쳤다.
“충성스러운 짐의 병사들이여!”
쩌렁쩌렁. 의외로 큰 황제 폐하의 젊은 목소리는 멀리, 내가 서 있는 곳까지 청량하게 들려왔다.
“짐이 만들고자 하는 나라는 이러하다! 나는 린베크 사령관을 믿는다! 나는 다르임 부사령관을, 사르임 보병사령관을 믿는다!”
언급된 인물들이, 의식적으로, 어깨를 폈다.
“나는 여러분을 지휘하는 장군들을 믿는다! 그리고, 장군들은 여러분들을 전폭적으로 신뢰한다! 여러분 또한, 여러분을 열과 성을 다해 지휘하는 장군들을 신뢰한다! 그러한가!”
“네엣!”
쩌렁쩌렁. 기사들과 궁수들, 마법사들이 모두 짧게 크게 외쳤다.
“짐이 만들고자 하는 나라는, 그렇게 서로를 믿는 나라이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신뢰한다! 여러분이 오늘, 나의 신뢰에 부응하여 줄 것을 기대한다! 그럴 수 있는가!”
“네엣!”
다시 쩌렁쩌렁. 폐하의 연설 솜씨는 짧고 간결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냉철의 도움을 받아 어지간한 것에는 흔들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나조차도 가슴이 뛰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폐하는, 그에 그치지 않고, 뒤로 돌아 적병을 향했다.
“반란군에게 고한다!”
웅성거리던 적진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그 위로 폐하의 젊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어제 나에게 사절로 온, 그대들을 지휘한다고 하는 고즈스라는 자는, 그대들이 아직 짐의 충성스러운 신하라고 하였다! 그런 그대들이, 짐의 충성스러운 신하라고 하는 자들이! 어찌 짐이 이 자리에 있는데 칼끝을 겨누는 것이냐!”
남들보다 높은 자리에서 보고 있던 나는, 알 수 있었다. 적진에, 웅성거림은 없었지만, 분위기가 뭐랄까... 물로 치면, 물이 끓어오르는 느낌? 분위기가 조금 ‘불온’해졌다.
“그대들이 짐에 대해 충성심이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칼을 내려놓아라! 칼을 내려놓고 스스로 항복하는 자들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다!”
이건... 먹히지는 않겠지. 당장 지금 항복한다고 했다가는 등 뒤에서 칼을 맞을 거다. 하지만... 분명, 황제 폐하의 연설은, 우리 편의 사기를 올리고, 적의 사기를 깎는데는 충분한 효과가 있었다. 폐하는, 잠시 기다리는 듯한 몸짓을 하다가... 팔을 축 늘어트렸다.
“그대들의 마음을 잘 알았다!”
그 말만 하고 폐하는 말을 돌려 전장으로 돌아갔다. 분명, 분위기는 불온했다. 뭔가 적진에 큰 게 한 방 터지면, 초전을 유리하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닌가보다.
“모스 백작님! 큰 걸로 한 방 먹이라는 지시입니다!”
좋지. 나는 과장된 동작으로 활에 화살을 먹이고, 적의 정면을 향해 활을 겨누었다. 적병 중 일부가, 내 쪽을 보고, 뭐라뭐라 떠들기 시작하고... 곧, 앞 열에 선 보병들 모두가, 내 쪽을 가리키며 뭐라고 하기 시작했다.
큰 거라. 내 멋대로 해석해도 될까. 기술이 화려하고 파괴력이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들의 마음을 박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미 황제 폐하의 저들에 대한 연설은 저들의 마음을 상당부분 흔들리게 했다. 그 상황에서...
빠아아아아아. 나는 마나로 레일을 만들었다. 휘어질 필요는 없다. 적진의 한 가운데를 노린다. 내 강력한 화살이 앞으로 날아가는 걸로 족할거다. 화살을 마나의 레일 위에 올리고, 감싼다. 이제는 익숙하게, 나는, 릴리즈를 풀었다.
톡. 스르르륵. 이제는 많이 보아 익숙한 광경. 화살은 150보 정도를,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앞으로 날아갔다. 대략, 적들과 우리의 한가운데 정도에서... 꽈앙! 공기의 벽을 찢으며 초고속으로 앞으로 날아가기 시작하는 화살은, 언제나 그렇듯, 하얀 색의 꽃을 허공에 피우며 날아간다. 그리고.
퍼억.
내가 노린 대로 화살은 대열 한가운데 있던 적의 병사의 머리를, 투구째로 꿰뚫었다. 머리 뒤쪽이, 아까 허공을 날던 마법사가 그러했듯, 폭발하듯 터져나가고, 피와 뇌수가 후방으로 튀었다. 그걸 뚫고, 내가 쏜 화살이, 아직도 힘을 잃지 않고 날아가, 그 다음에 있던 사람의 머리를 다시 꿰뚫었다. 투구마저 뚫고 나온 화살이, 두 번째로 머리가 꿰뚫려 터지는 피와 뇌수를 뒤로 한 채, 세 명째마저 꿰뚫었다. 두 명의 머리를 지나며 화살에 실린 힘이 약간은 약해졌던지, 이번에는 화살이 뚫고 나오기는 했지만, 머리를 터트리지는 못했다. 그리고도 약간의 힘이 남아있던 화살은 네 번째 사람의 한쪽 눈에 틀어박혔다.
“으, 으아아아아아악!”
순식간에 대열의 한가운데에 세 명의, 아니, 눈에 화살맞은 사람까지 네 명의 빈 자리가 생겼다. 그 뿐만 아니다. 피와 뇌수를 순식간에 뒤집어쓴 주변의 병사들이,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쉽게, 그것도 화살 하나에 이렇게까지 죽어버릴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일까.
그건 그거고, 전과를 냈으니, 그걸 확대해야 한다. 나는, 다시, 과장된 동작으로, 화살을 활에 재고, 활 시위를 당기며, 적진을 바라본다. 곧, 누군가가, 다시 나를 가리키며, 뭐라뭐라 소리친다. 아직 내가 시위를 놓지 않은 그 순간.
“궁수대, 일제사격! 마법사대는 적을 향해 바람을 불게 하라!”
린베크 사령관님이 때를 놓치지 않고 명령을 내렸다. 300보 정도 떨어진 적진은, 궁수대가 최대 사거리로 아슬아슬하게 맞출 수 있는 곳이었다. 마법사대가 바람을 불게 해 주자 약간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비스듬하게 자신들을 향해 떨어져내리는 화살의 비를 향해 병사들이 숙련된 동작으로 일제히 방패를 들어올리지만...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나는 시위를 놓는다. 톡. 빠앙! 쐐애애애애액! 퍼억! 퍽! 아까와 마찬가지로, 일직선에 서 있던 세 명의 병사의 머리가 뚫리며, 뇌수와 핏물이 사방으로 터져나간다.
“신궁! 신궁! 신궁! 신궁!”
앞열의 보병들이 발을 구르며 외치고, 화살이 계속해서 쏘아지고 있는 가운데... 적의 궁병과 마법사대도 대응에 들어갔다. 똑같이 그들 역시 그들에게서 우리 쪽으로 바람을 불게 했다. 그것만으로도 일반 화살이 적 보병대에 닿는 정도가 확연히 줄었다. 진영 한가운데에 마주치는 두 바람으로 인한 난류가 생기며 화살을 뒤틀어놓았기 때문이었다.
============================ 작품 후기 ============================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을 축하합니다. 5년간 고생길이 훤한데 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들 모두도 수고하셨습니다.
제 글을 찾아서 읽어주시고, 선작/추천/코멘트/쿠폰을 쏴 주시는 모든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광하 님 // 추천 감사합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eastarea 님 // 시즈탱크라뇨... 기리인은 공중도 공격할 수 있단 말입니다. 타협해서 포톤캐논 정도가 어떨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