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1 8. 시궁창에서 꽃은 필 수 있을까 =========================
난류가 생겼지만 여기서 바람을 멈출 수는 없다. 먼저 멈추는 쪽이 절대적으로 불리해지니까. 다시 말해 아군과 적군 모두, 체스의 스테일메이트(stalemate) 상황이 된 거다. 마력이 먼저 고갈되는 쪽이 진다. 그리고... 그건 저 쪽일 거다. 그럼 뭔가 대책에 나서지 않을까... 했는데, 아직까지는 움직임은 없다. 그 때, 마스 경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를 향해 말했다.
“사령부에서 메시지 스펠을 통한 전언입니다. 적 후방에 기병대의 재배치 움직임이 있다고 합니다. 전면으로 돌입하거나, 구릉지를 우회해 우리 기병을 치거나 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거리는 대략 400보 정도 된다고 합니다.”
“네... 어떻게 해 달라는 요구는 없었습니까?”
“어떻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저 바람을 뚫고?”
양 진영의 마법사들이 애써 바람을 부딪히게 하고 있는 두 진영의 한가운데에서는 이미 평원에 굴러다니는 풀쪼가리와 흙먼지들이 난류에 휘말려 하늘로 올라갔다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저 정도의 바람은 뚫으려면 뚫을 수 있습니다. 난전이 되면 제 활을 쓰기 어렵습니다. 그 전에 뭔가 수를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뚫을 수 있다고요?”
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마스 경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이제 고작 열 개 정도 남은, 산탄 화살을 집어들었다. 적진과의 거리가 300보. 내 마나 레일은 직선거리로 150보가 고작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서 떨어지게 하는 것은 어렵다. 휘어진 마나의 레일을 벗어나면 곧장 직선으로 적의 머리 위로 떨어지게 할 수는 있으나... 지금은 그보다는 이게 낫겠다. 나는 최대한 마나의 레일을 길게 뻗은 후, 활시위를 당겼다.
빠아아아아아아.
톡.
스르르륵. 산탄 화살이 앞으로 날아간다. 원래 산탄 화살은 100보 정도에서 터지는 화살이다. 하지만 마나의 레일에 감싸여 있기 때문에 산탄통은 아직 터지지 않는다. 150보 정도까지, 마나의 레일에 감싸여 바람에 전혀 영향받지 않고 날아간 화살은...
꽈앙!
허공에 다시 하얀 꽃을 피우며 순식간에 적진과의 거리를 줄이다가...
퍼엉!
공중에서 다시 한 번 폭발하며, 역시 새햐얀 흔적을 남기는 자그마한 수많은 자탄(子彈)들을 앞쪽으로 쏘아내었다. 그리고,
파파파파파팍!
수많은 자탄들이 일군의 병사들을 휩쓸었다. 갑자기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내가 쏜 자탄 중에 그대로, 혹은 창병들의 몸을 뚫고 지나가 바닥에 꽂힌 자탄들이 피워올린 흙먼지였다. 적진의 마법사들이 만든 바람을 타고 그 흙먼지가 우리 쪽을 향해 밀려오다가, 두 바람이 맞부딪히는 곳에서 그 난류를 타고 하늘 위로 올라가 흩어졌다.
잠시 후, 흙먼지가 사라지고... 드러난 참상은 그 참상을 만든 나조차도 말을 잃게 만들 정도의 것이었다. 마치, 부채 모양으로, 적의 보병 일부가 몸에 구멍이 하나둘 이상 뚫린 채 쓰러져 있었다. 방패도 소용이 없었다. 우그러지거나 구멍이 뚫린 방패들은 더 이상 방패의 기능을 하지 못했으니까. 곧바로 절명한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자탄이 몸을 뚫고 지나가거나 혹은 몸에 박혀 아픔에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는 적병들이 수두룩했다. 못 되어도 서른에서 마흔 명은 되어 보였다.
“백작님! 사령부의 전언입니다! 대단한 성과라고... 아...”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뒤쪽으로 돌아 아침으로 먹은 것들을 게워내기 시작했다. 나에게 무슨 권리가 있어, 저들을 저렇게 처참하게 학살할 수 있단 말인가. 황제 폐하에게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렇다고 저렇게 비참한 몰골로 온 몸에 난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을 굴러도 된다는 건가?
“우웨에에에엑!”
나는 한참, 속에 든 것을 모두 게워낼 기세로 토했다. 마스 경은 내가 안쓰러웠는지 내 등을 두들겨주고 있었다. 더 이상 나올 것이 없을 때까지 토해내다, 토하다 지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마스 경이 나에게 수통을 내밀었다.
“입을 헹구세요. 안 그러면 입맛이 써서 계속 토하게 됩니다. 어이, 아반! 병사를 불러 이걸 치우게 해라.”
그의 호의에 감사하며 입을 헹군 나는, 아까의 불가항력적인 욕지기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인 추태가 부끄러워졌다.
“이거, 추태를 보였군요.”
“추태라니요?”
마스 경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우리 편 병사들을 가리켰다. 새삼 나는 깨달았다. 아까 저들이 “신궁! 신궁!” 하던 챈트(chant)가 멎어 있었다. 몇 명은 나처럼 토하고 있었고, 전체적으로 대열이 흐트러져 있었다.
“제가 보기엔 자연스러운 반응 같습니다, 백작님.”
“그래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장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오히려, 그간의 전쟁들에 더해 어제의 야습까지 아무런 기색 없이 치러낸 백작님이 이상한 거였습니다. 지금같은 반응이 오히려 인간적입니다.”
글쎄, 인간적이라... 나는 저들에 대해 연민이나 죄책감을 아직 느끼지는 못하고 있는데. 그저 진영이 다르다는 이유로 저런 몰골을 당해야 하는 부조리가 구역질날 뿐... 하지만, 예전에도 그랬듯, 이런 얘기를 함부로 꺼내면 백안시당하기 딱 좋다.
“그리고, 저 쪽을 보십시오.”
적의 창병 방진이 일각이 무너지자, 뒷줄의 병사들이 황급히 앞으로 나와 빈 곳을 메우고, 부상자들을 들어내고 있었다. 한 사람의 부상자를 옮기기 위해 두 사람 이상의 성한 병사가 필요했다. 숫제, 장창을 내려놓고 부상자를 뒤로 옮기는 사람도 있었다.
“백작님의 화살 한 방이 만든 겁니다.”
“아...”
“백작님. 저는 전장을 적지 않게 다녔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위안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아주 잘 알지만, 그래도, 백작님이 그렇게 잔혹하게 적을 학살할수록, 이 병사들과 기사들이 백작님 덕에 한 사람이라도 더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마스 경은 어디까지나 정중하게 나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나는 그 말의 내용보다 그의 말에 담긴 진실성에 마음이 움직여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숙여 감사했다.
“백작님, 5분 후에 진격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 전까지 한 방만 더 날려달라는데, 가능하시겠습니까?”
나는 깊이 심호흡을 했다.
“네, 하겠습니다.”
마스 경이 뒤로 돌아서서 수신호를 보내는 동안, 나는 다시 깊이 심호흡을 했다. 나를 관조한다. 지금 나는... 평정이 깨져 있다. 정신적인 충격은 어느 정도 회복했는지 모르겠지만, 활쏘기에 필수적인 평정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걸 회복해야 한다. 나는 다시, 깊이 심호흡을 했다. 마법사일 때 익숙하게 했던, 내 자신을 들여다보고 마음을 냉정하게 만들어야 한다.
‘띠링!’
<냉철이 발동합니다.>
왜 이제 와서...
<당신이 냉정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만 냉철이 발동할 수 있습니다.>
후우. 나는 시스템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평상시의 마음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때였다.
“마스 경! 하늘!”
그렇게 외치는 소리를 듣고 하늘을 올려다보자 갑자기, 허공에 먹구름이 마구 몰려들기 시작했다. 내 머리 위로 집중적으로 검은 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마법이다!
“번개를 뿌리려는 거다!”
내 말에 마스 경은 바로 아래를 보며 외쳤다.
“게트!”
“문제없습니다!”
그는 이미 눈을 감고 긴 마법의 영창에 들어가고 있었다. 먹구름이 진해져, 파란 하늘 한가운데 우리 머리위의 하늘만 검은색의 구름이 되었을 때, 언제라도 번개가 칠 것만 같았을 그 때. 게트 씨가 머리위를 가르키며 주문을 시전했다.
“보호막(barrier)!”
그와 거의 동시에, 우르릉! 번개가 우리 머리위로 내려꽂혔다. 번쩍 하고 번개가 내려쳤지만... 찌르릉! 어느새 우리 머리 위를 뒤덮은, 대략 가로세로 스무 걸음 정도 되는 주황색의 반투명한 막이 번개를 막아내고 있었다.
“먹구름이 물러갑니다!”
다른 마법사들이 저 마법을 막아낸 것일까, 먹구름이 조금씩 흩어지고 있었다. 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이 새끼들이, 내가 조금 약한 모습을 보였기로서니, 감히 나를 전기에 태워 보내버리려고 해? 나는 내 의지를 불러일으켰다. 이 정도에 고작 토하면서 바닥을 구르며, 내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우리 군을 승리로 이끌지 못한다면, 치르낙 대왕에 버금간다는 내 의지력이 아깝다.
“전구운-! 진겨억!”
사르임 장군의, 전장에서는 단 한마디도 더듬거리지 않는 우렁찬 군령이 전장을 뒤흔들었다. 우리 병사들은 창을 앞으로 든 채, 척 척 척, 발걸음을 맞추며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는 다시 화살을 당기기 시작했다.
나를 노려? 네놈들, 내가 비록 조금전에는 못 참고 토하는 모습까지 보였지만, 나를 공격하는 놈들에게는 일말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도 아깝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말 없이 어제 낮 연재를 펑크냈네요.
어제 오전에 멘탈이 터질 일이 있어서 수습이 안 됐습니다.
그 일을 그나마 때우고 나니 이미 저녁때더군요. 죄송합니다.
읽어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시는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제 멘탈을 살려주셨습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제가 졌습니다 ㅠㅠ 기리인은 시즈탱크로 하지요 ㅎㅎㅎ
eastarea 님 //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