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3 8. 시궁창에서 꽃은 필 수 있을까 =========================
마스 경의 말을 들으며 나는 다시 전장을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나는 긴 금속 꼬치에 고기를 꽂아 구워먹는 요리를 떠올렸다. 고슴도치 형태를 유지하고 앞으로 전진하는 우리 보병은, 이미 진영이 붕괴되어 등을 보이며 도망가려고 하는 적병들을 손쉽게 창으로 찔러 거꾸러트리고 있었다. 저벅저벅. 전장에는 아까 내 산탄 화살에 의해 쓰러진 수많은 시체와 부상자들이 뒹굴고 있었는데...
군화를 신은 우리 보병들이, 그 시체를 짓밟고 그대로 지나가기 시작했다. 좌우 폭이 바리케이트나 캘트롭 등으로 심하게 좁아져 있어서, 우회할 틈이 없기도 하지만... 순식간에 군화가 피로 물든 병사들을 보며 나는 다시 헛구역질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왜 이럴까. 이미 내가 머리를 터트려 죽인 사람이 수십 명은 넘을텐데. 아까만 해도 하늘을 나는 마법사며, 보병 몇 명이며 수두룩할텐데, 왜 새삼 나는 지금 저 전장을 보며 사람들을 보며 헛구역질을 하고 역겹게 느끼는 걸까.
아마도... 사람이 이렇게 쉽게 고깃덩어리로 변하는, 그것도 어느 쪽에 서 있는가에 따라 다른, 이 냉정하고 부조리한 현실 때문인가보다. 아까 내가 공격받았을 때는 물론 극도로 분노했지만, 그건 내 안위를 노리는 적들에 대한 당연한 분노였고... 나는 마스 경을 돌아보았다. 내가 엄청난 활약을 보였기 때문에 우리 병사들이 살 수 있었다고 말한 그는, 초반의 선전에 극도로 고무된 것 같았다. 그는 설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꼭 쥐며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우...”
길게 한숨을 쉬며 거기에 내 입속에 맴돌던 역겨운 기분을 토해내며, 나는, 아무리 내가 전공을 세우고 신궁으로 소문이 난다 한들... 나는, 저들과는 완전히 섞이기 힘들겠다, 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을 느꼈다.
“궁수대! 전진!”
린베크 사령관님은 기병대가 아니고 궁수대를 먼저 전진시켰다. 왜일까 했는데, 절반이 전진해서 활에 화살을 메기기만 한 채 주변을 돌아보며 경계태세에 나선 동안, 나머지 절반은 바닥에 떨어진 캘트롭들을 치우거나, 바리케이트들을 뽑고 있었다. 캘트롭 위로 뽑은 바리케이트들을 놓아서, 약간은 속도가 느리더라도 기병들이 전진할만한 환경을 대략 만들어놓고 바쁘게 뒤로 물러났다.
그 동안 보병대는 적을 꼬치로 만들며, 적이 처음 점령하고 있던 구릉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하늘을 날던 마법사가 깃발을 꺼내 휘저으며 적진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전원! 전진! 저 구릉지를 점령한다!”
사령관님이 외치자, 마스 경은 고개를 끄덕인 후 나를 향해 말했다.
“백작님, 가시죠.”
“네.”
나는 활을 등에 매고, 사다리를 내려갔다. 이미 우리 아래층에서 내가 올라있던 대(臺)를 호위하던 기사들은 말을 데려와서는 말등에 오르고 있었다. 나도 그들이 데려온 레브에 올랐다. 이미 기병대들은 보병들이 전진하여 확보한 구릉지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그들 뒤를 따라 궁수들과, 말에 탄 황제 폐하와 린베크 사령관님을 비롯한 사령부가 전진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사령부에 합류하자, 황제 폐하를 비롯한 모두가 나를 보며 짧게 박수를 쳤다.
“기리인, 잘 해줬다. 고맙다. 친구.”
황제 폐하의 짧지만 강한 말에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반쯤은 의식적이었다. 아. 저렇게 자꾸 띄워주는 걸 보니 나는 황제 폐하의 곁에 오래 있기는 힘들 것 같다. 이 전쟁이 끝나면 어떻게 될까...
나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우리는 초전을 승리로 장식했을 뿐이다. 아직,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적의 보병을 흐트러트렸다지만, 실제 죽인 건 얼마 되지 않는다. ...아, 또 욕지기가 올라올 뻔 했다. 언제부터 나는 사람을 쉽게쉽게 숫자로 생각하게 된 걸까. 왜 이리 혼란스러운지 모르겠다.
‘띠링!’
<원래 전쟁은 시궁창 같은 겁니다. 하지만 연꽃처럼, 시궁창에서도 피어나는 꽃도 있지요. 당신에게는 부조리함과 역겨움의 현장이겠지만, 이를 통해 당신의 정신이 성장하는 자양분을 얻을 수도 있을 겁니다.>
...전쟁에 대해 좀 알아?
<본 시스템은 생각보다 여러 가지를 알고 여러 가지를 봐 왔습니다. 당신에게 말할 수 없는 것도 많이 있지요. 지금 이렇게 당신에게 말해주는 것도 사실은 다소 무리를 한 것입니다.>
그렇구나... 그럼 나에게 이렇게 말을 걸기 이전에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나타난 적도 있었다는 말인가?
<대답하기 곤란한 사항입니다.>
어련하시겠어...
<좀 더 경험을 쌓아서, 레벨을 올리세요. 정보 확인이 그러했듯, 당신이 성장하고 정신의 크기가 커질수록 알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레브는 다른 말을 따라 구릉지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레브의 등에 몸을 맡긴 채 나는 새삼, ‘시스템’에 대해, 생각했다. 물질의 한계도 뛰어넘어, 내 전통에 화살을 집어넣어줄 수 있고, 내 주머니에 금화를 만들어 넣어줄 수 있는 그 능력. 다른 사람의 정보와 상황을 알고, 그걸 나에게 적당한 가공을 거쳐 알려줄 수 있는 능력. 하지만 나에게 해는 끼치지 않는... 아냐, 그건 모르는 거지. ‘아직까지는’이라고 해야겠지.
<냉철의 작동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군요.>
좀 나 혼자 생각 좀 하게 내버려두면 안 되겠냐. 어느새 우리는 구릉지를 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까 내가 주로 만들었던 적병들의 시체가 드문드문 널려 있는 곳을 지날 때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구릉지 정상은 꽤 넓은 편이었다. 기병대와, 사령부가 모두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나와 마스 경 일행과, 사령부와, 황태자 저하와 소수의 호위군을 끝으로 모든 병력이 구릉지 위로 오르자, 주변의 전체적인 시야가 드디어 우리 눈에 들어왔다.
지난 구릉지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마치 밀린 빵 반죽처럼 조그만 언덕들이 볼록볼록 밀려나 돋아있는 곳. 대균열이 만들어질 때 작용한 힘에 의해 밀려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을 정도인 이 곳에도, 대평원과 마찬가지로 이름모를 풀들이 잔뜩 자라 있었다. 물론 기병의 진격을 방해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적들이 차지하고 있던 구릉지가 주변에서도 높은 곳이었던 듯, 이 곳에서는 적진이 전체적으로 보였다. 적의 본진은 우리가 언덕을 올라 본진을 이동하는 그 짧은 시간동안 놀랍게도 질서정연한 후퇴에 성공하고 있었다. 물론 흐트러진 보병들까지 모두 수습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기병대와 마법사대는 바로 옆 구릉지를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멀리 가지는 못했던 듯, 저들의 얼굴이 바로 보일 정도였다. 대략 100보쯤 되려나...
보병이 구릉지의 내리막 비탈에, 보병의 원래 역할인 벽을 쌓듯 창을 앞으로 겨눈 채 늘어서고, 기병대가 언제든 돌격할 준비를 마치고, 그 뒤에 궁수대와 마법사대가 차례로 늘어섰다. 그 맨 뒤에 황제 폐하와 사령부, 그리고 내가 있었다.
“모스 백작.”
린베크 아버님이 불렀다. 여기는 전장이니 네, 아버님 하고 대답할 수는 없다.
“네, 사령관님.”
“그, 흩어지는 화살 말이다. 그건 몇 발이나 남았나?”
나는 전통을 살펴본 후 대답드렸다.
“이제 여덟 발 남았습니다.”
아버님은 ‘그 정도밖에 안 남았나...’라고 중얼거린 후, 나를 보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아껴서 쓰도록. 백작의 그 화살은 전황을 혼자 뒤집을 수도 있는 무기이다. 그러니,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세 발, 아니 네 발은 전통 안에 확보해 놓을 수 있도록 해라.”
“네, 사령관님.”
“그리고... 호위군은 방패에 특히 신경쓰도록. 눈먼 화살에 맞아 폐하의 옥체에 흠이 가지 않도록 신경써야 할 것이야. 마법사대도 마찬가지. 알겠나?”
“넷!”
그렇게 말하고 사령관님은 다시 저 쪽으로 말을 몰아 가 버리셨다. 잠시 내가 하릴없이 전통을 뒤적거리고 있노라니, 내 옆에 있던 마스 경이 말했다.
“약간...”
“네?”
“아뇨, 혼잣말입니다.”
“대개 그럴때는 ‘약간 거리끼는게 있다’는 말이 나오지 않나요?”
“...백작님, 그렇게 사람을 잘 넘겨짚으시는 타입이셨습니까? 재미있군요.”
“재미있는 건 경인데요. 지금 경은 전형적으로 들켰을 때 화살의 방향을 돌리는 화법을 쓰고 있거든요.”
고개를 가로저은 마스 경은, 말을 내 옆으로 바짝 다가서게 했다. 그리고서도 혹시나 주변에 들릴까 목소리를 낮추었다.
“왜 이러세요?”
“원래 전쟁터에서 불길한 전망을 말하면 돌 맞습니다. 특히나 그게 현실화되면 더더욱이요. 혹시나 만에 하나 몰라서 말입니다.”
“어떤 전망입니까?”
“적의 보병대가 너무 쉽게 무너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까는 제 화살 때문에 쉽게 적을 무너트릴 수 있다고 하셨으면서.”
“그 말도 분명 맞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기에는 적의 본대의 후퇴가 너무 깔끔합니다. 그 정도로 서전에 박살이 났으면 지휘부도 당황해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나는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걸 느꼈다. 분명 마스 경의 말이 맞다. 몇 백명의 병사를 순식간에 잃고, 애초에 점령한 전략적 거점을 버리고 다른 자리로 이동한 사람들 같지가 않다.
“분명히, 뭔가 노리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게 뭔지 모르니 좀 불안합니다.”
그 때였다.
============================ 작품 후기 ============================
어느새 하드코어 전쟁 소설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초반 1, 2챕터는 분명 학원소설과 연애담, 전형적인 성장물이었는데...
3챕터는 추리활극, 4챕터는 관찰기, 5챕터는 추리단편, 6, 7챕터에는 정치물을 찍더니, 어느새 완전 하드코어한 전쟁소설을 쓰고 있었네요. 애초에 한 글 안에 다양한 모습을 담아내려고 애쓰던 거긴 한데, 참 재미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찾아서 읽어주시고, 선작/추천/코멘트/쿠폰 주셔서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Blue+ 님 // 감사합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jin-matient 님, 리바이어던 님 // 사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그리고 전장에서 겪는 PTSD에 대해서는 정답이라는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멀리서만 보다가 가까이 가서 보니 끔찍하게 느꼈을 수도 있고요. jin-matient님 말씀처럼 부조리와 혐오감을 느껴 그랬을 수도 있고요. 이번 편에서 최대한 기리인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담아보려 애썼는데 어떻게 느끼셨을지 궁금합니다.
eastarea 님 // 그러고보니 골리앗 사업이랑 비슷한가 싶습...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