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4 8. 시궁창에서 꽃은 필 수 있을까 =========================
‘띠링!’
<경고! 지금 당신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저께부터 있었던 일을 돌이켜보십시오.>
놓치고 있는 것? 그게 지금 마스 경이 이야기한 찝찝함의 원인인가...? 내가 뭘 놓치고 있지? 나는 주변을 살폈다. 보병들은 방진을 잘 갖추고 있었고, 기병의 돌격을 방해할만한 요소도 없었다. 뭘까. 적병의 낌새가 이상한 것도 아니다. 나는 적병들의 면면을 살폈다. 모두가, 차분하게,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 햇빛에 그을린 얼굴들을... 그을린... 그거다!
“잠시만!”
나는 황급히 말을 걷게 했다. 주변에 나를 호위하고 있던 기사들이 놀라 흩어졌다. 말을 달리게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달려서는 안 된다. 전장에서는 항상 침착하게 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주의를 받았다. 냉철하게. 침착하게. 나는 황급히 사령관님을 찾았다. 사령관님은 기병대의 배열 현황을 직접, 부관들만 데리고 시찰하는 중이었다.
“사령관님!”
“무슨 일인가?”
나는 곧바로 말하려다가, 아까 마스 경이 내 곁에 바싹 붙어서 이야기하던 것을 떠올렸다. 나는 말을 몰아 아버님의 옆에 바짝 말을 붙였다. 그리고는 소리를 낮추어 말을 걸었다.
“사령관님. 눈치채고 계십니까?”
“무엇을 말이냐?”
“저 중에는 피부가 검은 병사가 한 명도 없습니다.”
그거다. 며칠 전부터 작전회의에서 계속 이야기되었던 것. 야습하고 귀환하던 우리를 따라잡은 병력 중에 피부가 검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우리는 그를 통해, 남대륙과, 항구가 있는 뫼르말 가와, 반군과, 융파트 가의 연결을 짐작해내고, 인질 비슷하게 잡혀 있던 파라 융파트 경에게서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며 그를 일부러 나스프 공작령을 경유하는 먼 길로 우회시켰지.
아버님은 흠칫 놀란 표정을 짓더니, 적병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곧장, 부관들에게 말했다.
“너, 다르임을 불러와라. 너, 사르임을 불러와라. 너, 오클리프 엔데 경을 불러와라. 당장! 급하다!”
오죽 급하게 느껴졌으면 부관들을 너! 너! 라고 불렀을까. 아버님은 이어 나에게 말했다.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언덕으로 진군한 것은 함정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다. 아마 우리를 언덕 위에 포진하게 하고 둘러싸려는 것일 거다.”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기습은, 분명 약점이 있다. 그걸 노려서 뚫어버리는 수밖에. 기리인. 내 생각에 우리가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서는 너의 힘이 가장 필요할 것 같다. 사령부 근처에 있거라. 아니, 마스 경에게 얘기해서 그 병력들을 이리로 데려와라.”
나는 군례를 올리고 아까 왔던 길을 되짚어 마스 경에게 갔다. 아까 경이 그랬듯, 마스 경에게 바짝 붙어 말했다.
“마스 경이 느끼는 위화감의 정체를 알았습니다.”
“그렇습니까? 뭐였습니까?”
“있어야 할 적 병력이 없습니다. 그걸 사령관님께 말씀드렸더니, 사령부 근처로 오라고 하십니다. 같이 가시죠.”
마스 경은 놀란 눈빛으로 나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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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령부 근처로 다가갔을 때는 이미 주요 사령관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사령관님은 나를 보더니 손짓해 불렀다.
“다르임, 사르임 장군, 엔데 경. 우리 기리인이 또 큰 일을 해냈소. 기리인. 설명드려라.”
...자기가 말하지 왜...
“적병 중에 검은 피부의 병사가 한 명도 없습니다.”
다르임 형님, 사르임 장군, 엔데 경 세 명 모두 눈을 크게 뜨며, 말등에서 발돋움을 해 적진을 살폈다. 숲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삐죽 세운 토끼 세 마리가 생각나 나는 이 시궁창같은 전장에서 처음으로 피식 웃었다.
“...정말이군.”
“어떻게 알았냐?”
다르임 형님과 사르임 장군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반면, 엔데 경은 눈을 감고 캐스팅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곧바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허공을 날고 있는 마법사들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메시지 스펠이었을까. 곧, 마법사들은 깃발을 꺼내어 이리저리 흔들기 시작했다. 날면서 다른 주문을 쓸 만큼의 서클은 되지 않은 모양이다. 허공 세네 군데에서 깃발 흔드는 마법사들을 바라보던 엔데 경이 고개를 내려 우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수상한 병력이 접근한다는 보고는 없습니다.”
“대규모의 은신이나...”
엔데 경은 고개를 저었다.
“그랬으면 아까 모스 백작이 쏘았던 그 화살 때문에라도 은신이 풀렸을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규모로 은신 마법을 쓸 대마법사라면 애초에 우리 머리 위로 불덩어리라도 떨어트렸겠지요.”
사령관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경들도 비슷하게 생각하지 않소? 우리 기리인의 화살이 엄청난 위력을 펼쳤고, 그래서 적의 진열이 붕괴되긴 했지만... 나머지 병력이 너무 질서정연하게 후퇴했단 말이오.”
“맞습니다, 아버님. 실제로 보병들도 죽은 병력들보다 도망간 병력들이 더 많습니다. 집결이 잘 안 되고는 있지만...”
“문제군. 함정은 함정이야. 이 자리가. 호랑이굴로 들어오긴 했는데...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나는 건, 사기를 꺾는 결과밖에 안 되고... 어느 것도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선택지란 말이지...”
사령관님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이럴 때는 건드리지 않는 게 좋다는 건, 굳이 군대 경험이 없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눈빛을 마주친 후, 아무 말 없이도 알아서 할 일을 나눠서 하기 시작했다. 엔데 경은 다시 눈을 감고 마법 시전에 들어갔고, 다르임 형님은 적진을 계속 살피기 시작했다. 한편 사르임 장군은 우리 편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뭔가, 약점이 없는지 살피는 것 아닐까.
그래서, 뒤를 돌아본 건 나뿐이었다.
“저, 저기!”
내가 외치자, 아버님, 형님, 엔데 경이 내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낯빛이 변했다.
저 쪽 지평선에서, 흙먼지가 일어나고 있었다. 뭔가 대규모의 집단이 우리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제길! 엔데 경! 후방으로 마법사를! 다르임! 거리가 얼마나 될 것 같으냐?”
“병종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저 정도의 거리는 5만 보 정도 될 겁니다. 저들이 일반 보병이라면, 오늘 밤에나 도착하겠습니다만... 그럴 리는 없겠고, 어디선가 기병 전력을 확보했다고 봐야겠군요. 기병이 전력질주한다면 한 시간 정도일 겁니다.”
“아니, 아닙니다. 전력질주해서 한 시간 정도 달려올수는 있겠지만, 그러면 전투에 돌입했을 때 지쳐버릴 겁니다.”
전혀 더듬지 않고 의견을 제시하는 사르임 장군님. 이 정도의 사람 앞에서는 별로 떨리지 않는 걸까. 그 얘기를 들은 아버님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옳은 얘기다. 그럼 세 시간 정도로 생각해야겠군. 세 시간동안 적을 뚫고 나갈 생각을 해야겠다. 기병대를...”
이 사람들 왜 이래. 나는 손을 들었다.
“발언할 자리가 아닌 줄은 알지만, 죄송하지만...”
“아니다. 네 발견 때문에 가능한 자리가 아니었냐. 말해라.”
“남대륙에서는 말을 잘 안 타는 걸로 압니다.”
“그래, 거기는 말을 타기에는 너무 덥지. 그런데?”
아! 하고, 다르임 형님이, 손바닥에 주먹을 짝 하고 부딪히며 말했다.
“검은 피부의 병사! 아직 우리는 그들의 행방을 모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할 지는 모르겠지만, 저들을 뚫고 나가려고 하는 것 역시 저들의 의도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심스럽게 말하자, 세 사람은 침묵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는 거겠지. 아버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남대륙 출신의 병사들은 기병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보병일 것이고, 그렇다면, 시간 안에 맞춰서 도착하기 위해서는 이 주변에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을 나는 마법사의 눈에도 잡히지 않았다. 뭔가 마법적인 수단을 쓰거나, 혹은 위장을 잘 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얘기해 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말하며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사령관의 영역이다. 나와, 다르임 형님과, 사르임 장군, 그리고 엔데 경은 조용히 기다렸다.
“세 시간의 여유는 있다. 우리가 적들에 비해 여유있는 것은 기병 전력이다. 즉 우리는 돌파력을 살리는 것을 작전의 주 방향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다면, 엔데 경. 궁병대와 마법사대를 동원해서, 앞으로 한 시간동안, 적의 본진을 타격하시오. 최대한 피해를 주되, 화계 마법의 사용은 자제하는 것이 좋겠소. 기병이 돌격할 때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전격계와 빙계 등의 마법을 주로 써야겠군요.”
“기리인, 너도 부탁한다. 저들이 보병대를 일부 희생해가며 우리를 끌어들였다지만, 너의 화살의 위력은 진품이었다. 그러니 저들은 아직 너의 화살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을 것이다. 한 시간동안 저들을 공략해보자.”
“그 다음에는요?”
다르임 형님의, 약간은 불손하다고까지 느껴지는 반문에, 아버님은 팔짱낀 자세 그대로 말했다.
============================ 작품 후기 ============================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리리플은 자정 연재때 몰아서 하겠습니다.
언제나 읽어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시는 여러분들 덕분에 저는 힘내서 씁니다. 감사합니다.